월하검무 (2)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밤. 수십 미터의 크레이터가 생겨난 숲 속. 뽑힌 나무와 바윗덩어리가 사방을 뒹굴며 흙먼지를 자아내는 곳.
챙-! 카가각-! 슉-! 쾅!!
그곳에서 이하린은 온몸에 피를 뒤짚어쓴채 마인과 맞서고 있었다. 붉게 물든 머리를 휘날리며 그녀는 힘겹게 검을 휘둘렀다.
“질긴 녀석이로구나.”
피식-! 카아앙-!!!
서늘한 불씨가 튀어 오르며 밝혀지는 빛.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나는 저 녀석을 데려가려고 온 거란다.”
“······.”
“그러니까······ 너는 저 녀석 때문에 휘말린 것 뿐이고, 네 목숨까지 버려가며 저 녀석을 지켜줘야 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콰아앙-!! 내려치는 카룬드의 일격을 흘려냄과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팔이 조금씩 뒤틀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특성의 힘으로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지만 힘의 차이는 명확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
하지만 이하린은 그 사실을 무시한 채 머릿속으로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파동이 터져 나온 건 한순간.
하지만 이전의 마인 사냥에서 비슷한 일을 경험했던 이하린은 간신히 그 파동에 대응해 낼 수 있었다. 의념을 곧추세워 흐름을 베어낸다- 그날 밤 빈사상태로 유천하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배우지 못했을 기술이 그녀의 목숨을 구해낸 것이었다. 분명 비싼 대가를 치른 보람이 있었다.
‘······상황이 안 좋아.’
허나 반대로 말하자면, 그런 경험이 전무했던 아리엘이 침식 파동에 당해버린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하린은 필사적으로 마인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신의 뒤에 쓰러져있는 아리엘을 지켜내고 있었다.
그나마 둘 다 리타이어 되는 상황은 면했다지만 그들이 있던 위치가 3학구였다는 점도, 카룬드가 시스템을 교란시키기 위해 테러를 의뢰했다는 것도, 벌써 그녀의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모두 최악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얼마나 버틴 걸까. 10분? 아니면 5분?
“······.”
카가각-! 퀴잉-! 카앙-!!
당연히 그녀의 상태가 멀쩡할 리는 없었다. 한계에 다다른 몸은 조금씩 생명을 토해내기 시작했고, 그녀의 몸 상태는 점점 나빠지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폐는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고, 마력을 불어넣어 억지로 움직이고 있는 근육은 끊어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점점 심해져 가는 출혈은 그녀의 피부를 적색으로 물들였고, 검을 움켜쥔 손마저 점점 비틀려 가는 순간이었다.
“언제까지 버틸 생각이지?”
“······.”
퀴이잉-!
사실 본래의 기량 차이가 극명했던 만큼 이렇게 타천자를 상대로 시간을 끌고 있는 것만으로도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었을 뿐.
“장난에 어울려주는 것도 슬슬 지루해지는구나.”
“···닥쳐.”
“쯧. 하여튼 요즘 것들은.”
카가각-!! 그녀의 두부를 으깨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내리쳐진 일격. 그녀는 양손으로 검을 부여잡고 간신히 공격을 막아내었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생도 주제에 참 대단도 하군. 어떠냐. 지금이라도 살려줄 테니 좀 꺼지지 않겠느냐?”
허나 이하린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타천자가 원하는 건 루타텔의 분노. 본신의 힘으론 루타텔 앞에 나설 수 없기에 그의 딸을 유린함으로서 저열한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 마인의 성정상 그건 분명 상상도 못 할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될터였다.
그렇기에 자신은 아리엘을 지켜야 했다.
그렇기에 자신은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런 설정을 써내려간 게 그녀 자신이었던 만큼, 뒤에 쓰러져 있는 저 어린아이를 지키는 건 자신의 책임이었으니까!
“대답이라도 좀 해보거라!!”
콰아앙-!!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격. 타천자의 팔을 막아냄과 동시에 이하린의 정신이 다시금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순간, 뜬금없게도 그녀의 머릿속으로는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제 검은 무언가를 베기 위해 존재했고, 저는 검을 휘두를 때면 무언가를 베었습니다. 의념을 통해 저는 검이 되었고, 하린씨는 제 의지에 베이셨습니다.’
‘하린씨의 검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갑자기 왜 그의 얼굴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하린의 직감은 이 기억이 괜히 떠오른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제 의지를요?’
‘예. 하린씨의 검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제 검이 베기 위한 검이었다면, 하린씨의 검은 무엇을 위한 검인지 말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그 기억 속에 몰입되었다. 그러면서도 <검의 반려>는 그녀의 정신과 별개로 그녀의 몸을 최적의 효율로 춤추게 해주었고, 그녀의 검은 끊임없이 허공을 베어 갈랐다.
“······.”
그날 밤- 유천하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순한 심상이었다. 마인을 베고, 그림자를 베고, 마침내 심연까지 베어내는 검. 이 세계의 아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원죄를 책임지기 위해.
모든 것을 베어낼 수 있는 검.
이하린은 그런 검을 원하였다.
카가가각-!!
하지만 그런 검으론 유천하의 검을 이겨낼 수 없었다. 일순간 검으로 화했던 유천하. 그리고 자신을 향해 그어지던 검. 끝없이 이어지는 죽음 속에서 난도질당하던 그 순간의 기억은 이하린의 뇌리 깊은 곳에 강렬한 화인으로 남아버렸고, 그런 만큼 어설픈 심상으로는 그의 심상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고민했다. 어떤 ‘검’을 들고 마주 서야 유천하를 마주할 수 있는 걸까. 자신은 어떤 검을 원하는 걸까.
퀴이잉-! 쾅-!!
그렇게 이하린은 고민했고,
그녀는 이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세상에 나와 처음 마주한 분이기도 하고,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기도 하니까요.’
그녀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를 베기 위한 검이 아니었다. 그녀가 마인을, 그림자를, 심연을 베어내길 바랐던 까닭은 그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직접 써내려간 이 세상을,
그녀의 애정 속에 만들어진 이 아이들을,
그녀가 구해낸 빛나는 생명을.
그들이 비록 지금의 자신보다 강할지언정, 그녀는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 심상을 마음속에 품고, 유천하의 심상과 마주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유천하의 검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이하린의 검은 ‘지키기 위한 검’이 되었다.
“······질기군 질겨! 그만 좀 죽어라!!”
부웅- 콰아아앙!!!!
다시금 터져 나오는 그림자의 파동. 그 패도적인 마력 앞에서도 이하린의 이성은 서늘하게 가라앉았고, 그녀는 망설임없이 마력을 베어냈다.
그녀의 추구하는 ‘검의’는 수신의 극의.
패도가 아닌 수신을 위해 짜여진 마음!
그렇기에 아리엘을 지키고자 하는 이 순간 그녀의 의념은 세차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의념은 마음의 표상이었고, 마음은 다시 염원의 발로였으니. 다시 한 번 그걸 되새긴 순간 그녀의 몸에 다시금 활력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한줄기의 마음을 통해 그녀는 터질듯한 폐에 숨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끊어질 것 같은 근육을 부여잡아 마음을 불태웠다.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그녀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명정해져 가고 있었다.
“네년도 저년도 산채로 씹어먹어 주마!!”
콰아앙-!! 분명 타천자의 공격을 받아낼 때마다 이하린의 당장에라도 기절해 쓰러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한순간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지는 순간 그대로 온몸이 짓이겨질 것 같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적의 공격을 받아칠 때마다 그녀의 팔이 조금씩 뒤틀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의 의식은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죽지만 않으면 고쳐낼 수 있었다. 살아만 있다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그런 ‘특성’을 가진 사람이 존재했고, 그녀는 그 사람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건 눈앞의 마인을 쓰러트리는 것. 오직 그것뿐!
“크흐흐···. 팔이 떨려오는구나.”
“······.”
콰아앙-!!
이하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유천하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면, 그가 평소처럼 이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천하는 분명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생도였다. 상대는 타천자. 유천하에게도 위험한 적일 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었다. 이 순간을 마주하고 있는 게 자신이라서. 이런 위험한 줄타기를 하게 된 게 그녀 자신뿐이라서.
그러니까 자신이 해내야 했다.
눈앞의 마인에게서 아리엘을 지켜야 했고,
앞으로의 위험에서 모두를 지켜야 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저 자를 죽여야 했다.
설령 치명적인 상처를 입더라도, 팔이 뜯겨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해내야 했다.
이 순간- 빙의자는 그렇게 결심했다.
우우웅-!
그렇게 흔들림 속에 날카롭게 정련되어가는 정신. 살의와 결의. 두 가지 의지가 하나의 매듭을 이루며 순백의 염원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그 의념은 검과 하나게 되어 더 예리한 살의로 승화되었고, 그 순간 이하린은 온전한 의기상인의 경지에 발을 들이게 되었으니, 그렇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잿빛의 폭거를 마주하면서도 이하린의 검은 그곳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달빛을 머금고, 백색의 마음을 불태우며.
그렇게 소녀의 검은 어둠을 베어 갈랐다.
***
서로의 공격이 스쳐 지나간다.
이제껏 공격을 받아내기에 급급했던 이하린이 방어를 도외시하고 카룬드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지른 상황.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카룬드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제껏 자신의 특성을 뚫어내지도 못했던 녀석이 이제 와서 저런 선택을 하다니 실로 멍청한 선택이지 않은가?
하지만 연이어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에 카룬드는 그 생각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
“···!!”
그 순간, 서로의 공격이 교차했다. 푸슉-! 카룬드의 팔이 이하린의 몸을 스치고 지나감과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부터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솓구치는 피. 뿜어져 나오는 혈향.
하지만 이하린의 눈동자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카룬드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그저 침착하게. 그렇게 팔을 움직였고-
그렇게 그녀의 검은 나아갔을 뿐이었다.
그 검위로 흔들리지 않는 순백의 형상을 덧씌운채, 그림자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서!
그리고.
“···크··· 크아아아악-!!!!“
서걱-! 섬뜩한 절삭음이 울려퍼졌다.
그 순간 타천자의 가슴이 갈라지며 혼탁한 마력이 터져나왔고, 쿠구국-!! 고통 어린 외침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그림자의 격류가 쏟아져 내렸다.
“크으아아···!! 감히···! 감히-!!”
“······.”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은 서서히 지면을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크윽!! 네 까짓 게 감히!!!”
얕았다- 그것이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 단 1cm만, 조금만 더 깊게 베어냈으면 마인의 핵을 갈라버렸을 텐데. 자신의 부상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하린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감정이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네년을 산채로 씹어먹어 주마-!!!”
그렇게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순간에도 빙의자는 미래를 걱정했다. 자신이 죽고, 아리엘마저 죽게 된다면 이곳의 미래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진시우는 원작대로 성장해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유천하는 그 삶을 계속 영위해 나갈 수 있을까.
그렇게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며 그녀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을 때-
쿠구구구-!!
“···!!”
그 순간 맹렬한 살의가 그곳을 덮쳐왔다.
칼로 찌르는 듯한 기파가 공간을 격하고 그들이 있던 곳을 베어왔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즉시 전신을 난도질할 것 같은 기세가 타천자의 몸을 휘감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살의.
“이, 이게 무슨···?!”
하지만 이 순간, 그녀의 입가 위로는 힘없는 미소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분명 살을 에일 듯이 찔러오는 살의였지만, 이건 그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기세였기에.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곳에 나타난 이가 누구인지. 그녀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디에 손을 대는 거지.”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
하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이하린은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고,
“크, 크아아악-!!”
콰앙-!! 그 순간 카룬드의 몸이 흑색의 마력을 토해내며 순식간에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
그렇게 고개를 들어올린 이하린의 앞. 어느새 그녀의 눈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달빛마저 흡수할듯한 짙은 머리를 치렁거린 채, 피어오르는 흙먼지와 함께 나타난 사람.
하루종일 떠오르던 사람.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생각나던 사람.
유천하.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이하린은 저도 모르게 온몸에 긴장이 풀어지는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전투 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한순간에 휘몰아쳤다.
“···방금의 검은 훌륭했습니다.”
“······아··· 아.”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과는 다르게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녀로서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 모든 게 해결된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제 그만 쉬셔도 됩니다.”
자신은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던 걸까.
상대가 타천자라는 것도.
유천하가 아직 생도에 불과하다는 것도.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상관없게 느껴졌다.
“맡기세요.”
그 말과 함께 그녀를 지탱하던 정신력이 모두 풀어졌고, 그녀의 이성은 스스로를 다잡아 보려 했지만 그 눈꺼풀은 서서히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이대로 쓰려지면 안 되는데···
천하씨를 지켜줘야 하는데···
그렇게 그녀의 눈은 의지와는 별개로 점점 감겨왔고, 그렇게 암전의 순간. 이하린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건 칠흑의 운무에 휩싸인 유천하와 그를 비추고 있는 푸른 달빛이었다.
오늘은 달이 참 아름답구나.
뜬금없었지만 혼미해져 가는 정신 속에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고, 그것을 끝으로 이하린의 정신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