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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이 빙의를 숨김-28화 (28/205)

잠 못 이루는 밤 (3)

이하린은 들뜬 마음을 억눌렀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이런 감성에 젖어있을 시간 따윈 없지 않은가. 미래를 대비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히 바빴다.

앞으로 위험이 될 만한 요소를 미리미리 없애야 했다. 주요인물들의 성장을 더 빠르게 촉진시켜야 했고, 만약을 위해서라도 손에 넣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렇다. 자신은 이런 감정을 느낄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무사히 원작을 끝마쳐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세계의 아이들이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 사실을 떠올렸더니 이하린은 기분이 팍 식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까 전 유천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 나와 처음 마주한 분이기도 하고,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기도 하니까요.’

처음 마주한 사람, 그리고 목숨을 구해준 사람. 유천하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를 것이다. 저 자신이 그 날 죽었을 운명이라는 것은. 하지만 이하린은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하린의 발걸음은 서서히 느려졌고, 가만히 멈춰 선 그녀는 이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

하지만 고개 돌린 그녀를 반기고 있는 건 오직 어두컴컴한 밤하늘뿐. 공허하게 텅 빈 밤거리가 그녀의 현실을 가리켜주고 있었다.

이하린의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래. 정신 차려야지.”

그를 위해서라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운명이 바뀌어 버린, 나비의 날갯짓 속에 떠오른 찬란한 생명.

“······.”

이하린은 지난 한 달 동안 지켜본 유천하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등천회랑에 들어오고 나서도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재능을 빛내고 있는 그 이름. 그는 강한 의지를, 뛰어난 재능을, 압도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그는 침착했고, 또한 선량했다.

하지만 원래의 운명대로라면 저 아이는 ‘원작’이 시작된 이 시점에 이미 무대 밖으로 퇴장당한 뒤였을 것이다.

총탄이 빗발치는 시가지속에서,

그날의 장면처럼 싸늘한 바닥에 드러누워.

애초에 무리해서 계획을 앞당긴 이유가 뭐였던가. 무수한 이유가 있었지만, 시기를 앞당기기로 한 결정적인 까닭은 오직 한 사람 때문이었다.

바로 유천하를 위해서.

자신이 구원해낸 그 아이가 ‘원작’의 종장에 도달하여도, 절망적인 미래마저 이겨내고 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미래를 대비해야 돼.”

그래서 계획을 앞당겼다. 이야기 바깥에서 구원해낸 생명은 너무나도 찬란했기에, 그 빛이 벌써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이하린은 달라질 미래를 대비해야 했다. 잿빛탑은 사람의 인과에서 벗어난 영역일지라도 침식마인은 아니었으니까.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오로지 인류에 대한 증오와 본연의 흥미뿐이었으니까. 그러니 유천하의 재능은 웅크려있던 마인들을 자극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이런 감성에 젖어 있을 시간따윈 없었다. 위험이 될 만한 요소를 최대한 없애야 했다. 인류를 위해서라도,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유천하를 위해서라도.

‘하린씨는 제게 생각보다 더 중요하신 분입니다.’

분명 이하린에게도 유천하는 그의 생각보다 더 특별한 존재였다. 자신이 써내려간 절망 속에서, 많은 파멸이 예비된 세계에서,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구원. 자신으로 인해 운명이 바뀌었다는 게 누구보다 확실하게 다가오는 한 사람.

그는 그녀에게 마련된 속죄의 상징이었다.

“······미안해요.”

그렇기에 해맑게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모습이 기뻤어도, 자신을 염려하는 그의 말을 이해했어도, 이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설령 그가 자신을 원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평온한 일상이 되어야 했다. 설령 그게 불가능한 일일지언정 자신은 그걸 위해 노력해야 했다.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그녀 자신뿐일 테니까.

‘하린씨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테니까요.’

그렇기에 조금 전 들었던 따스했던 말을 가슴에 품고서 이하린은 차가운 밤을 걸어나갔다. 앞으로 펼쳐질 인적없는 어둠 속에서도 그 따스함을 지킬 수 있도록. 이하린은 스스로를 붙잡았다.

다음 계획을 점검하며,

빠르게 해치워야 할 목표를 생각하며.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그렇게 뒤늦은 대답이 허공에 스러졌고,

그녀의 밤은 어두웠을 뿐이었다.

***

주말은 빠르게 지나갔다.

일요일 밤이어서 그런 걸까? 아리엘은 다른 볼일이 있던 모양인지 3학구에 오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전력을 점검해 볼 수 있었다.

그간 만나본 등천자들을 기준으로 판단해보자면 이 정도면 등천자 상위권 수준까지는 얼추 해볼 만 하다는 느낌. 현재의 티르유나 철위강정도의 수준까지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 세계에는 특성과 업륜, 그리고 가호라는 요소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확신하기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순수한 무력의 측면에선 그렇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업륜까지 한 번 점검해본 뒤, 나는 스마트 워치를 들여다보았다.

[2020. 03. 09 / Am 01:23]

‘벌써 월요일이라···.’

주말 내내 수련에만 몰입했더니 어느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이제 아침이 되면 다시 강의를 들으러 가야겠지.

오늘 들어야 할 강의는 분석 개론과 업의 이해였고, 둘 다 나쁘지 않은 수업이었다. 특히 배치고사 분석은 꽤 흥미로웠는데, 비록 녹화된 기록에 불과했지만 다양한 특성을 관찰하는건 만상의 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지난 시간 1, 2위인 나와 진시우의 영상을 먼저 보여줬으니 오늘은 3, 4위인 아리엘과 이솔라의 영상을 보여줄 차례.

다른 아이들의 영상도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솔라의 특성은 더 자세히 관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특성은 업륜의 형상화에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잠시 원작의 내용을 생각했더니 자연스레 이하린이 떠올랐다.

“역시··· 나갔겠지.”

결국 주말이 다 지나갈 때까지도 이하린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메시지를 보내던 사람이 말이다.

분명히 당부했건만 아무래도 한 귀로 흘려버린 모양. 왜 그리 다급하게 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지금 이하린의 실력은 잘해야 유망주급.

빙의자로서 숨겨둔 실력을 이것저것 다 꺼내봐야 간신히 10위권에 안착할만한 실력이었고, 그게 부족한 실력은 아니었지만 의념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이상 그녀의 한계는 뚜렷했다.

그런 만큼 원작의 내용을 고려해보면 지금 이하린이 하는 행동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등천자가 가지고 있는 위상과 그 실력을 고려해보면 이하린이 타천자급 마인을 마주칠 일은 극히 적었지만, 그렇다 해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머릿속으로 많은 고민이 스쳐 지나간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회랑에 묶어놓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본말전도. 메인 에피소드의 흐름은 피해갈 수 없는 게 더 많았고, 세계침식까지 그녀가 무사히 버티려면 최소한 원작처럼 승천자의 문턱까진 도달해야 했다.

그러니 나는 그녀가 최대한 ‘안전’하게 ‘원작’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게 해야 했다. 위험하지 않게, 착실히 성장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결과만 생각해보자면 현재의 최선은 이하린을 설득해서 마인 사냥을 금지하고, 천천히 성장하도록 유도하는 것. 그게 가장 안전했다.

그리고 중책은 내 손으로 직접 그녀의 무력을 빠르게 성장시켜주는 것. 어차피 흐름이 중요한 거지 구체적인 전개가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애먼 곳에서 죽지 않을 정도의 무력만 갖춰도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물론 하책으로 그냥 이하린의 옆에 착 달라붙어 주야장천 떨어지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었고, 또 회랑측에 아직 그레이라인인 그녀의 등급을 들먹여 교칙위반으로 마인토벌을 고발하는 것도 있었지만 장기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최하책이었다.

그녀의 신뢰는 중요한 요소였으니 말이다.

“······.”

현실적인 상황과 그녀의 입장을 고려하면 설득은 무리에 가까웠다. 마인 토벌을 시작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시작한 이상 그녀도 제대로 마음을 먹고 시작한 거일 터.

그렇다면 중책도 나쁘진 않았다.

아직 1학기인 이상 커트라인은 높지 않았고, 최소한 의념만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아도 어느 정도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저 그조차 미달되니 걱정될 따름이지···.

‘일단 만나봐야겠네.’

혼자 고민해봤자 결정될 문제는 아니었기에 나는 결국 그런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아침에 강의를 들으러 가면 그녀를 만날 테니 그때 이야기해보자. 당장 고민해봤자 의미 없지 않겠는가?

애초에 벌써 마인 사냥을 시작했다 한들 그녀 스스로도 나름대로 계획을 짜고 시작한 거일 테니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

그리고 내 생각은 빗나갔다.

기숙사로 돌아가던 중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기묘하고도 익숙한 상황에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은은한 달빛을 머금고도 흑단처럼 짙은 머리카락. 긴 가닥을 치렁거리며 걸어가는 작디작은 뒷모습.

“······.”

주말이 시작되던 날의 밤과 동일한 상황처럼 보였지만 세부적인 광경만큼은 전혀 아니었다.

“···하아··· 하··· 윽···.”

그 걸음걸이는 무척이나 위태로웠고, 그녀의 가녀린 몸은 당장에라도 온몸에 힘이 빠져 고꾸라질 것처럼 이리저리 휘청거리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걸치고 있는 외투 곳곳에는 날카롭게 베인 흔적이 남아있었는데, 등에 메여진 검집 위에는 선명한 핏자국마저 엿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짙은 혈향이 그녀로부터 풍겨 나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한걸음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아··· 하아···.”

“하린씨?”

“······!”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에 놀랬는지 그녀는 순간적으로 전의를 내뿜었지만, 이내 나란걸 깨달았는지 표정이 풀어졌다.

“······천하··· 씨?”

하지만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이는 표정.

나는 재빨리 그녀의 상태를 훑어보았다.

만상의 눈으로 걸쳐진 외투 속을 들여다보자 시뻘겋게 젖어있는 의복과 곳곳에 나 있는 자상이 눈에 들어왔다.

“······.”

그나마 다행인 건 그 피의 대부분은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인듯했다. 하긴 이 정도 출혈량이 전부 이하린의 부상이었으면 그녀는 여기까지 걸어오지도 못했을 테지.

하지만.

“···다치셨군요.”

그렇다 한들 그녀가 상처 입었다는 사실 자체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

“······.”

안 그래도 하얗던 피부는 새파랗게 질려있었고, 피로 물든 의복 안쪽에서도 조금씩 새로운 핏물이 올라오고 있는 상황.

“괜찮으십니까?”

“······별거··· 아니에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안색으로도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순간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눈빛이 무척이나 애처로워 보였던 것이다.

마침 그녀가 휘청거렸다. 나는 재빨리 쓰러지려는 그녀를 한 손으로 받쳐주었다.

“······많이··· 다치셨습니다.”

“······어쩌다 보니··· 윽···.”

“이게 어쩌다 보니로 설명될 상황입니까?”

“······미안해요···.”

“도대체 왜··· 그렇게 무리를···!”

도대체 이 사람은 뭐가 그리 조급했던 걸까. 원작의 후반부가 그렇게 걱정되었던 걸까? 당장의 조바심이 그렇게 무서웠던 걸까?

하지만 원작의 주연들에게도, 그녀에게도 시간은 충분히 존재했다. 초반에 들이닥칠 위험은 극히 일부였고, 그 정도는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걸 알 리는 없겠지.

내가 그 사실을 말해주지는 않을 테니까.

조금이지만 속이 쓰려 왔다.

“······제가 더 죄송합니다.”

“······네··· 그게 무슨···”

투툭- 나는 양해를 구하기도 전에 먼저 그녀에게 점혈을 가했다.

내 손짓에 그녀가 순간 움찔하였지만, 평소였어도 피하기 힘들었을 속도를 다친 몸으로 피할 순 없는 노릇.

혈을 봉함과 동시에 출혈이 멈춘다.

그렇게 순식간에 12개의 혈에 내력을 불어넣어 출혈을 점한 뒤, 나는 그녀를 받쳐주던 손을 조금 더 올려 그녀가 편하게 몸을 기댈 수 있게 자세를 바꿔주었다. 그러자 혈향과 뒤섞인 그녀의 체향이 느껴졌다.

“···아.”

“위험해 보여서 먼저 손을 썼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 아요···.”

“바로 의료시설로 가시지요.”

“······그건 조금 곤란··· 하아···”

그녀를 받치면서 나는 만상의 눈으로 계속해서 그녀의 환부를 훑어보았고, 동시에 받쳐 든 팔을 통해 기를 흘려 상세를 타진하였다.

다행히 손상된 장기는 없었다.

처음 이 세계에 오게 됐을 때의 나처럼 자잘한 상처들로 인해 출혈이 심할 뿐이었다. 허나 내상보단 외상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란 거지 그녀의 상태가 괜찮다는 건 아니었다.

“수혈이 필요해 보입니다.”

“······기록··· 남는 건··· 곤란···.”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

기록이 남는 게 곤란하다면 애초에 게이트를 통해 들어온 게 아니라는 말. 그렇다면 이런 부상을 입고서도 최소한 3학구를 거쳐서 들어왔다는 소리였다.

그녀의 상태로는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

아무래도 이하린은 여기까지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온 것 같았다. 그 생각을 뒷받침하듯 내가 부축해준 뒤부터 그녀의 긴장이 풀어지고 있는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긴장이 풀린다는 건 곧 기절하겠다는 소리와 동일했고, 나는 이 위태롭기 짝이 없던 상황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다치셨으면 바로 치료를 받으셔야지 왜 그러시는 겁니까? 애초에 하루만 해본거라 하셨잖습니까? 그리고 다음에는 저를 불러달라 말했잖습니까!”

“······.”

“대체 왜 그런 위험한 일을···!”

“······그럼 미워 할 거예요···?”

그 순간 흘러나온 그녀의 말.

확실히 정신이 흐려지는 모양인지 이하린의 대답이 이상했다. 갑자기 뭘 미워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누구를, 이 순간에 왜?

힘든 건지, 슬픈 건지, 아니면 기쁜 건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힘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저 표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를 호의적으로 바라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저 말이 도대체 어떤 감정 속에서 나온 것인지도, 어떤 생각 속에서 저 말이 나온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아니에요···?”

“······왜 미워합니까 제가.”

“······그럼··· 다행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이하린은 가녀린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대로 기절했다. 그렇게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진 그녀.

나는 재빨리 남아있던 손으로 그녀를 받쳤다. 온몸이 피에 젖은 상태로 내 품속에서 정신을 잃은 그녀가 눈에 들어왔고, 의식을 잃기 전 그녀가 지어 보였던 미소속에는 내 눈으로도 들여다보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을 뿐이었다.

도대체 왜 저런 말을 했던 걸까.

그리고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인 걸까.

머릿속이 다소 혼란스러워진다.

“······.”

인적없는 밤길에서 우두커니 멈춰 서있던 나는 이내 깊게 한숨을 한번 내쉬고선 그대로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렇게 안아 들었다.

***

이하린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우선 해결해야 할 일은 아리엘과 남궁설아··· 그리고 진시우······ 남궁설아한테는 평가보고서를 써야지··· 설아씨는 쾌검보다 둔검이 더 어울려요··· 아리엘씨한테는··· 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진시우 넌 그래도 괜찮··· 네 잘못이 아······

아··· 맞다 천하씨······ 천하씨는 대단해··· 근데 죽을 뻔했는걸······ 그래도 살렸어··· 내가 살렸어······ 내가··· 내가··· 앞으로도 구해줄 거야······

이하린은 무의식은 내면의 바닷속에 가라앉아 천천히 부유하고 있었고, 기억 속에 파묻힌 그녀의 의식은 기억의 물결에 두둥실 휩쓸리고 있었다.

······의 마인은 대부분 처리······ 초반의 위험은 꽤 줄었어······ 죽을 뻔 했는데······ 아···혹시 죽은 걸까···? 아닌데······ 안 죽었는데···

그렇게 어두컴컴한 세상 속에서 그녀는 온몸이 무겁고 아린 느낌을, 또 한편으로는 기묘한 편안함과 나른한 기분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곳은 어디인 걸까.

문득 의식이 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침대에 누웠더라? 내 침대는 이렇게 안 푹신하던데··· 내 방 침대랑 비슷한데··· 냄새가 좋네··· 내 방···? 나는 방이 두 개였던가······?

그때 이하린의 귓속으로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함께 감겨진 그녀의 두 눈 너머로 적막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이하린의 정신은 기묘한 부유감과 함께 서서히 깨어났다. 그건 분명 몽롱한 감각 속에서도 편안한 기분이었다.

“······아···.”

일어나기 싫은 기분.

일하는 것도 싫었고, 학교도 가기도 싫었다. 나른한 오후의 늦잠과도 같이 단단히 늘어져 이대로 침대에 녹아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하린은 생각했다.

내가 언제 숙소로 돌아왔지- 그 의문은 그녀의 의식을 두드렸고, 그녀의 기억 속을 되짚은 의식은 마침내 한 장면에 도달했다. 그리고.

“!”

그 순간 그녀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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