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 (1)
어느새 주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벌써 1주차의 커리큘럼이 모두 지나간 것이다.
첫째 날과 둘째 날에는 이런저런 소란이 있었다만 다행히 다른 날들은 생각보다 평범하게 지나갔다. 이론수업은 딱히 일이 생길만한 건덕지가 없기도 했고, 실기수업의 경우 아예 강사의 사정으로 휴강된 강의도 있었던 덕분이었다.
물론 어디를 가더라도 다른 아이들의 시선과 소곤거림은 당연히 따라왔지만, 그건 이제 와선 당연해진 일상이었을 뿐.
예를 들면 배치고사 때의 일이라든가, 필기시험의 일이라든가, 업륜이라든가, 아니면 남궁설아를 이긴 일이라든가··· 그런 소리쯤은 한주 내내 지겹도록 들어서 그런지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나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참 많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만, 그래도 아직 첫주가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으니 이 정도야 새 학기의 진통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뭐··· 안 그러면 어쩌겠는가? 이곳에 오게 된 이상 알아서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또 한눈파네? 정말 너무해!”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펑!!”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언령.
후웅-! 대충 내뱉어진 한 음절의 단어는 그대로 거대한 마력으로 변해 질풍의 해일을 동반하며 나를 덮쳐왔다.
아무리 언령마법이어도 그렇지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을 정도였지만, 그 효과마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쾅-!!!
쏴와아아아-
재빨리 자리를 박차 물러나자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마력의 폭발이 터져 나온다. 그곳에 담긴 마력의 후폭풍에 주변의 숲이 들썩거렸다.
나는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한눈판다고 그런 걸 날리는 사람이 더 너무한 것 같은데?”
“어? 그게 누구야? 천하야 누구 봤어···? 여기 있나? 어디 있지?”
“······.”
참고로 그 날- 그러니까 아리엘과 처음으로 숲에서 마주쳤던 날 이후로 우리는 매일 밤 이곳에서 대련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렇게 된 까닭은 간단했다.
근처에 지맥이 활성화되어있는 곳은 한정되어있었고, 그런 만큼 나도 그녀도 효율적인 수련을 위해 이곳을 찾게 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
처음에는 수련하러 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던 그녀였지만, 차마 이 장소를 포기하는 건 싫었는지 얼마 안 가 솔직히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게 서로 같은 곳에서 수련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대화가 오가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나와 남궁설아의 소식을 듣고 온 아리엘이 내게 비공개 대련을 요청해왔을 뿐이었다.
물론 나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말이다.
“애초에 대련 중에 딴생각하는 사람이 잘못한 거 아닐까? 그치 천하야?”
“잘못을 따지면 대련금지 기간에 이러고 있는 거 자체가 잘못이겠지.”
“······근데 오늘따라 달이 참 밝은 것 같네.”
아리엘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하였다.
“······.”
지난 며칠 동안의 특이사항이 있다면, 그건 이 녀석하고 생각보다 친밀해진 느낌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한가지 알게 된 건 이 순수해 보이는 아가씨는 다른 이들의 생각보다 장난기가 꽤 심하다는 점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내 시선을 무시하며 계속 딴청을 피우던 아리엘은 이내 내게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리고는.
“······펑!!”
콰앙-!!!
나는 그대로 아리엘을 향해 발을 박찼다.
마법사인 그녀를 배려해 천마신공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력이 활성화된 신형은 삽시간에 그녀의 앞으로 도달했다.
코앞에서 서로의 시야가 마주친다.
내 시야로 들어오는 건 평소처럼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그리고 있는 얼굴. 그 입에서 마력이 새어 나왔다.
“멈춰.”
쿠웅-!
그 말과 동시에 내 몸에 걸리는 부하.
나는 그 즉시 의념을 일으켜 언령을 떨쳐냈지만 이미 그 잠깐 사이에 아리엘의 몸은 멀찍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입에선 끊임없이 언령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속도강화,바람질주,프레스토,프레스티시모,빠르게,더빠르게······”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의지가 그대로 그녀를 가호하는 법칙이 되어 중첩된다. 그렇게 아리엘은 수많은 언령속에 휩싸였다.
순독徇讀술이라 했던가?
그 잠깐동안 저렇게 언령을 뱉어낼 수 있다는 게 꽤 대단했다. 육체 자체의 반응 속도는 평범했지만, 사고속도와 언령을 구사하는 속도만큼은 상당한 빠르기를 자랑하는 수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아리엘은 이미 상당히 먼 곳까지 후퇴한 뒤였다. 일반적인 싸움이라면 이렇게 마법사와 거리를 벌린 순간 승부가 나버리겠지만···
당연히 내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
‘그래도 느려.’
그 순간 막대한 내력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며 내 몸은 한순간에 그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나는 지난 며칠 동안 수련했던 성과를 발동해보았다.
우웅-! 손등 위 각인이 진동을 토해내며 강대한 마력이 휘몰아쳤고, 그와 동시에 내 몸은 한 줄기 바람이 되어 공간을 뛰어넘었다.
발을 박차며 1차적으로 가속, 무릎이 펼쳐질 때 2차적으로 가속, 몸이 쏘아질 때 3차적으로 가속. 이건 분명 남궁설아의 특성 ‘변속제어’와 같은 발현과정.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특성의 구현.
그날의 대련에서 나는 만상의 눈으로 남궁설아의 특성을 들여다보았고, 내 시야에 들어온 그녀의 특성은 분명 육체를 기반으로 작용하는 권능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세계의 법칙에서 빗겨나과는 과정을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었는데, 또 운이 좋았던 건 내겐 그 과정을 대체할 수 있는 순수한 근원- 업륜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원래라면 가능할 턱이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만상의 눈과 업륜이라는 특이점은 서로 교차하며 결국 하나의 기적을 이뤄내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제한적이나마 ‘가속’을 손에 넣었다.
그렇기에.
“벼락처럼내리쳐라거인의발걸··· 무슨!”
단 한순간- 그걸로 충분했다.
찰나의 순간, 수십 미터를 격하고 다가가자 보름달처럼 확장된 아리엘의 두 눈이 시야를 가득 메워왔다. 아마도 고화력의 마법 스펠을 시전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이 가속은 그녀에게 처음 보여주는 기술.
당연히 대비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게 서로 허공에 체류하는 와중,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달빛을 머금은 녹빛의 보석 속에 내 모습이 담겨왔고,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후!!”
그 입에서 쏘아진 바람. 시전하던 마법은 포기한 모양인지, 그 음절은 한 자루 창이 되어 벼락처럼 쏘아졌다.
후우우웅!!
서걱-!! 물론 그래 봤자 임기응변. 그녀의 공감각적 심상을 단칼에 베어낸 뒤, 나는 그대로 그녀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러나 내가 마법을 베어낼 줄 짐작하고 있었는지 아리엘은 어느새 양손을 엄지를 치켜든 V자, 그러니까 권총처럼 펼치더니 나를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그건 분명 장난스러운 외견이었지만 시야로 들어오는 광경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만상의 눈에 일련의 과정이 담겨온다.
휘몰아치는 마력이 특정한 현상이 되어 현실을 뒤틀어버린다. 그건 자신의 심상을 현실에 강제하는 그녀의 특성 <심적권령心跡勸詠>의 현상.
“탕-!”
그 순간, 손가락으로 만들어낸 권총의 현상에서 마력으로 이루어진 탄환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우웅-!! 나는 다시 한 번 업륜을 소모했다.
“탕탕탕!탕!탕탕!!”
“유치하기는···!”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장난스러운 말과 손짓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의 탄환은 그 말과는 반대로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내게 쏘아졌고, 가속이 걸린 내 몸은 순식간에 그 마력의 구심점을 베어버렸다.
샤각-!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그녀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퀴이잉-!!
“렌티시모(매우 느리게)!”
성가신 언령- 방금처럼 구체화되는 언령이라면 언제든지 베어낼 수 있었지만, 저런 비가시적이고 직접적인 언령은 현상으로 화하기 전에 처리하는 게 좋았다.
그러니까··· 언령이 발현 되기전에 벤다!
내 검이 다시 한 번 마력을 꿰뚫었다.
이건 이제까지의 대련을 통해 언령이라는 현상을 조금 더 깊게 이해하게 된 결과.
그렇게 나는 강제적으로 법칙의 연결점을 끊어냈다. 아직 순수한 마력의 형태로서, 특성과 마법이 어우러지기도 전의 요소를, 현상으로 화하는 발현과정 자체를 베어낸 것이다.
그 순간 파삭-! 무언가 부서지는 느낌이 검극에 걸쳐졌고-
“멈···!”
당황한 그녀가 황급히 언령을 토해내려 입을 달싹거렸지만, 쉭-! 이미 내 검은 그녀의 앞에서 멈춰선 뒤.
그녀의 입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
“끝났어.”
그렇게 승부는 결정 났다.
방금 보여준 모습이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던 건지 아리엘이 다소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로써 3전 3승. 이의 있어?”
“······.”
참고로 이런 대련도 벌써 세 번째.
하루에 한 번씩 이루어진 대련은 내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언제 써먹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이 구체화되기 전에 마력을 끊어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했다. 나중에 마법을 파훼할 일이 생긴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다.
어쨌든 대련의 결과는 모두 나의 승리.
나로서는 당연한 결과였지만 아리엘의 입장에서는 매번 충격적인 모양.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세 번째지만 별로 달라진 점이 없어.”
“······야.”
“딜레이와 화력에 조금 더 신경 써봐.”
“······기야.”
“뭐?”
“······사기야!!”
아리엘이 부릅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간 느낀 바지만 평소에는 그렇게 온화하면서도 승부욕은 참으로 강한 아이였다.
“구체화하기 전에 언령을 베어내는 게 어딨어! 아니,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특성. 보여.”
“···사기야!”
“특성이야.”
“···사기야!!”
어지간히도 지는 게 분했던 모양이다.
아리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어느새 반짝거리는 빛으로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아까도 든 생각이지만 확실히 아리엘의 실제 성격은 내 기억 속 작중 묘사와는 꽤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리엘이라는 캐릭터의 이미지는 상냥한 모범생. 언제나 우수한 천재로서의 모습만을 내비치던 그런 인물이었다. 적어도 이하린의 시야로 묘사되었던 성격만큼은 말이다.
근데 실제로 보게 되니 뭐랄까···.
“형상 발현까지 구체화된 마력도 아니고, 발현 직전의 마력을 어떻게 보는 거야! 완전 반칙이잖아···! 그거 완전 반칙!”
평소의 모습을 생각하면 상냥한 성격인 건 맞는 거 같다만 조금 더 아이 같은? 뭔가 내 앞에서는 명랑한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다만 대외적인 이미지는 상냥하고 완벽한 천재 모범생. 내 기억 속 이미지와 동일한 모양.
그렇다 보니 이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소설 속의 뒷이야기를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괴리감이 꽤나 재밌게 다가왔다.
“그런데 너 내 앞에서만 너무 이미지가 다른 거 아니야?”
“······갑자기 그런 말 꺼내는 것도 조금 반칙이잖아.”
이건 그녀로서도 인지하고 있던 부분이었던 걸까? 아리엘이 순간 움찔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면 꽤 놀랄 것 같은데.”
“···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중요해?”
“절대로!”
“어차피 말할 사람도 없어.”
“······아.”
안심시켜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어째 아리엘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녀는 잠시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힘내.”
“······?”
“친구가 많다고 꼭 좋은 건 아니랬어······.”
“······.”
순간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만, 나는 이내 그녀의 눈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장난 치지 마. 대련 안 한다.”
“진심으로 위로해준건데······.”
“······.”
“알았어 알았어. 안 놀릴게. 그럼 됐지?”
“너··· 첫인상하고 성격이 너무 달라.”
“그건 천하 너도 마찬가지거든? 그리고 말이지······”
그리 말한 아리엘이 이내 새침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러기는 부담스러워서 그래. 다들 나한테 기대하는 값이 꽤 높아서 그런지 너무 완벽한 모습만 바란단 말이야!”
“아닌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래도 대부분은 나한테 기대하는 모습이 있을 테니까··· 어렸을 때부터 계속 쌓여온 거라 나도 모르게 신경 쓰게 되더라구···.”
스스로 자처한 부분도 크지만 말이야- 아리엘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녀에 관한 정보가 몇 가지 떠올랐다.
대부분 이하린이 이야기한 거긴 하지만···.
“기원학회의 유망주이자 아이돌이라서?”
“···삑! 그런 건 말하지 말아 줄래?”
내 말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나를 노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요새 회랑에 떠도는 이슈가 뭔 줄 알아?”
“뭔데?”
“유천하라고 있지? 걔가 글쎄 새로운 유망주라는데 별명이 고독한 순례자니, 검룡이니···”
“생각해보니 주제가 좀 별로네.”
나는 빠르게 말을 끊어냈다.
중원 무림이었다면 담담하게 받아들였겠다만, 현대에 와서까지 별호나 이명으로 불리고 싶진 않았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상황과 장소가 필요한 법. 똑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영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내 반응에 아리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천하 너도 이제 내 기분 이해해?”
“······어. 그래.”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런 걸 난 3살 때부터 겪어왔다는 거야.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이 수많은 사람한테 둘러싸여 마력을 발현하던 순간이라니··· 상상이 가?”
“부담··· 스러웠겠네.”
사실, 매스컴의 관심은 아닐지언정 나도 그런 기대 어린 시선쯤은 충분히 겪어봤다. 당연히 기대뿐만이 아닌 질시와 경계, 살의와 암투까지도 말이다.
“그치?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남들한테는 항상 완벽한 모습만 보여야 될 것 같더라고.”
“그래. 이해했어.”
그녀의 말을 듣다 보니 갑작스레 천마신교에서의 기억들이 떠오르려 했기에, 나는 생각을 떨치려고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마침 스마트 워치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3시다.”
“어? 벌써?”
내일은 주말이긴 했지만 그렇다 한들 새벽 3시가 이른 시간은 아니었다. 당연히 아리엘의 관심도 그쪽으로 돌아갔다.
“시간 참 빠르네.”
“언제 들어갈 거야.”
“······으음··· 너 들어갈 때쯤?”
저렇게 말하고 또 남아서 수련을 하려는 거겠지. 지난 며칠 동안 아리엘이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
저런 모습 또한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려는 노력의 일환일까? 문득 드는 생각에, 나는 그간 모른척했던 말을 살며시 꺼내보았다.
“근데 왜 항상 들어간다 말만 하고 남아서 수련을 하는 거야?”
“···어?”
“그렇게까지는 안 숨겨도 되는데.”
“······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그걸 눈치채고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는지 아리엘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 마냥 떨려왔다.
“진짜 모른다 생각한 건가?”
“······.”
“아니면 이것도 비밀이야?”
그녀의 귀 끝이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이것도 비밀이야.”
“비밀 한번 많네.”
“원래 비밀이 많아야 매력적인 법이지.”
“······매력은 어디 갔는데.”
“······쉿.”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언령이 튀어나왔다. 정말이지 부드러운 마력운용.
하지만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업륜의 마력을 투사해 그녀가 만든 언령의 흐름을 끊어버렸다. 허공에서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마력의 흐름이 서로 뒤엉키자 언령이 흩어진다.
아리엘도 그걸 느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천하 너 그거 정말 반칙이야···!”
그녀의 투정을 한 귀로 흘려듣고 있자니 문득 묘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너무 풀어진걸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금전 아리엘이 내게 언령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딱히 불쾌하단 느낌을 못받았던 탓이었다. 물론 그녀는 적이 아니었고, 딱히 대련 중이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원래의 나였으면 분명 신경이 조금 예민해졌을 일.
원작의 인물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일주일의 생도생활이 너무 여유로웠던 걸까?
벌써부터 여유에 적응해버린 건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뭐, 이곳에서 굳이 정신을 갈아놓고 있을 필요는 없긴 하다만···.’
그저 평온이 가져다주는 여유.
그게 내게 있어선 너무나 낯설기만 한 단어였기에 조금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등지고 돌아섰다.
“됐고. 난 이만 가본다.”
“어? 지금 가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얼음판 위에서 살아왔기에 그런 건지, 아직은 이런 느낌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 세계에 오게 된 이상 적응하긴 해야 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어. 수고해.”
“···응. 조심히 가!”
그렇기에 나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도망치듯 빠르게 숲에서 벗어났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