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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이 빙의를 숨김-22화 (22/205)

등천회랑 (4)

등천회랑에는 총 3개의 학구가 존재한다.

교육 및 사무시설이 밀집된 제 1학구.

주거 및 편의시설이 밀집된 제 2학구.

그리고-

등천회랑의 면적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오직 백색탑만이 존재하는 제 3학구.

이렇게 회랑의 구역이 각각 목적에 따라 나누어져 있다 보니 평상시의 생도들은 자연스레 2학구에서만 생활하게 되었고, 그와 반대로 생도들은 실습이 있을 때가 아니면 3학구로는 발을 들이지 않는 편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광활한 구역 속에 존재하는 건 오로지 듬성듬성 배치된 백색탑뿐. 그런 곳에 갈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회랑의 직원이나 생도들, 그 누구도 찾지 않는 곳이면서도 오히려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그 구역은 역설적으로 회랑의 거주민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자랑하는 편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

그 얼마나 편리한 공간이란 말인가.

그런 만큼 다른 이 앞에서 선보이긴 힘든 일, 은밀한 무언가를 하고 싶은 학생들이 3학구를 찾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

“사고가속. 사고분할. 시력강화. 근력강화. 관성제어. 마력증폭. 마법연계. 심상······”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척을 죽이고 움직여서 그런 걸까? 그녀는 내가 숲 속에서 걸어 나오는 걸 눈치채지 못한듯싶었다.

그녀의 수련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잠시 고민해본 끝에, 이내 천천히 인기척을 드러내었다. 부스럭- 그리고.

“휴··· 그러면 한번··· 꺄악!!”

“······.”

아리엘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유, 유천하?”

“······.”

“너, 너 뭐야···?!”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건데.“

사실 태연하게 나타나긴 했지만 나도 이 상황이 조금 당혹스럽긴 마찬가지. 차라리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을 테지만 모든 일에는 때와 장소가 중요한 법이었다.

이 야심한 새벽에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렇기에 그녀의 표정도 그렇고, 내 심정도 그렇고 서로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게 느껴지는 상황.

“······.”

“······.”

일이 이렇게 된 까닭은 별게 아니었다.

낮에 마력의 형상화를 알게 된 만큼 나는 하루종일 업륜에 몰두했을 뿐이었고, 겨우 1획밖에 없던 업륜은 내 호기심을 충족시키시기엔 너무나 미약했을 따름.

그렇기에 나는 업륜의 회복속도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구비된 수련시설을 벗어나 3학구로 발을 들였고- 마침내 이곳을 찾아냈다.

백색탑이 많아서 그런 것인지, 한라산에서 이어지는 맥이 살아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3학구에는 지맥의 흐름이 왕성하게 몰려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찾아낸 용맥龍脈 위에서 달이 머리 위를 스치고 넘어갈 때까지 업륜을 소모하고, 회복시키고, 다시 소모하고를 반복하며 이런저런 수련을 하던 도중.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갑작스레 마력 파동이 터져 나오는걸 보게 되었다. 잠시 소리를 차단하고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발견하는 게 다소 늦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누가 이 시간에 여기서 저러고 있는 건가 의아해진 나는 마력이 터져 나온 곳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 결과- 이렇게 아리엘을 마주했다.

잠시 침묵이 흘러간다.

“······.”

“······.”

참고로 현재 시각은 새벽 3시쯤.

당연히 대부분은 곤히 잠들어있을 시간.

그렇기에 이 야심한 시각, 기숙사에서도 한참을 떨어진 이런 숲 속에서 사람을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주연인물을 말이다.

처음에는 그냥 못 본 척 무시할까 잠시 고민했었으나, 이내 앞으로를 생각해 말을 걸어보기로 결정했다. 일단은 그녀도 첫 번째 메인 에피소드와 관련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 뭐 하고 있는 건데.”

“···그, 그러면 너도 안자고 뭐, 뭐해?”

다만, 그렇게 인기척을 드러낸 것까진 좋았는데 역시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이 상황에 몹시 당황해서 그런건지 아리엘 또한 완전히 얼어붙은 모습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렇게 우리는 어색함 속에 입을 열었다.

“···나는 수련을 좀 하고 있었는데.”

“나는 잠시··· 산책을 좀 하려고!”

“산책?”

“수련?”

말이 겹쳐졌다.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시간에 수련을?”

“그럼 넌 이 시간에 산책? 아니 그것보다 너도 방금 수련하고 있던 거 아닌가?”

“···무, 무슨 소리야? 나 산책 중이었는데?”

“······3학구에서?”

“······.”

내 말에 아리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딴청을 피워댔지만 나는 그녀의 이마에 맺혀있는 식은땀을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원작의 그녀는 상당한 노력파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 앞에서 그런 면모를 드러내는 걸 부담스러워 했었던 것 같았다.

다만 그 이유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잠시 머릿속을 되짚어보고 있자니, 이내 아리엘이 화제를 돌리려는 듯 말을 걸어왔다.

“···그, 그것보다!”

“······?”

“천하 너···! 업륜 있다며···?”

“아. 이거.”

아무래도 벌써 소문이 다 퍼져나간 모양.

딱히 숨길만 한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손등에 내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우웅- 하고 짙어지는 칠흑의 각인.

나는 그녀에게 손등을 내비쳐주었다.

그 순간, 아리엘은 당황하던 것도 멈춘채 그대로 다소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짜네.”

아리엘은 호흡까지 멈춘 채 내 손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 위로 부러움과 허탈감, 그리고 조바심이 스쳐 지나간다.

“······진짜로 업륜이 있었구나.”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얼굴.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왜 이 시간까지 수련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같은 신입생인 내가 업륜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연들 모두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왔을 터였다. 각자 나름대로의 사연을 지닌 아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속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나는 조금 우울해 보이는 아리엘의 표정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을 해보았다.

형상화를 시도할때 그녀의 마력운용을 참고했던 만큼 조금 오지랖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남아있던 업륜의 마력이 흘러나온다.

‘어차피 이제 들어갈 생각이었으니까 뭐.’

그러자 각인에 남아있던 마력이 우웅- 공명음을 토해내며 흑색의 나비를 주조해냈고, 한순간에 몰아친 마력은 가시화된 물질로서 허공에 떠올랐다.

“···아.”

그렇게 형상화로 만들어낸 나비는 이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날갯짓을 하며 허공을 맴돌았다. 검은 날갯짓에 달빛이 산란한다.

그렇게 그녀의 눈앞으로 날아간 나비는 몇번의 날갯짓 끝에, 마지막으로 푸른 달빛과 함께 그녀의 머리카락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예쁘다.”

그 동안 아리엘은 멍한 눈으로 업륜이 만들어낸 나비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사실, 실상은 기의 흐름을 일일이 조작하고 있는 것 뿐이었지만 외견으로 보이는 모습만큼은 분명 만족스러웠다.

마력을 이렇게까지 운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갈아 넣었던 성과는 충분한 셈.

그렇게 멍하니 업륜이 빚어낸 나비를 들여다보던 아리엘은 이내 정신을 차리곤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혹시 업륜의 형상화야?”

“알고 있네.”

“······그야 이론은 배웠으니까.”

“나쁘지 않지?”

“······지금 자랑하는 거야?”

“글쎄?”

내 능청스러운 대답에 아리엘이 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이런 성격이었어? 그렇게 묻는듯한 눈빛.

물론 나도 조금 어색하긴 했다만 언제까지 부담스러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적당히 상대하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었다.

애초에 굳이 예의를 차려야 할 상대도 아니었고, 그녀와는 정말 수시로 마주치고 얽히게 될 테니 말이다.

“으음··· 너 첫인상하고 조금 다르구나?”

“사람을 파악하기엔 하루는 짧은 법이니까.”

“하루··· 뭐. 그러네.”

그래도 내 행동으로 인해 자연스레 아리엘의 잡생각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뾰로통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왔던 곳을 가리켰다.

“수련할 거면 여기 말고 저 위에서 하는 게 좋을 거야. 지맥의 흐름을 보면 저곳이 용맥龍脈이니까.”

“용맥? 그게 뭔데?”

“기운이 더 활발하게 모여드는 곳.”

“아. 그래? 고마··· 아니 산책이라니까?”

“그럼 말고.”

굳이 꼬투리를 잡고 싶진 않았다.

마력운용으로 얻은 도움의 대가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말문을 튼 걸로도 충분했다.

“난 이만 간다.”

“······다시 수련하러 가?”

“아니, 이제 돌아갈 거야. 너는?”

“어? 아, 나, 나도 가야지.”

“그래. 수고해.”

“···어. 잘 들어가! 다음에 봐.”

사실 들어가서도 한 시간 정도는 운기조식을 할 생각이었다. 강제로 열어 재낀 6성의 경지였던 만큼 평소에도 꾸준히 심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던 것.

애초에 격전을 치른 것도 아니고, 잠은 하루에 3시간만 자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아버님이 주화입마로 쓰러지신 이후로는 항상 그렇게 생활했었으니 딱히 무리는 아니었다. 소교주로서 업무를 보던 시기에는 여유란 게 없었을 정도였으니까.

‘여러모로 참 바쁘던 시기였지 그때는.’

그렇게 새벽의 숲 속을 걷고 있자니 자연스레 그때의 일들이 떠올랐다. 지나쳐온 일들이 머리를 두드렸고, 싸늘한 밤공기가 폐부를 두들겼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런저런 생각 속에 산을 걸어 내려가다 보니 기감속에 마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참나.’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숲에서 벗어날 때 즘 만상의 눈으로 숲 너머를 투시해보았더니 아까 전 아리엘과 만났던 장소가 텅 비어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대신 다른 곳에서 마력이 느껴졌을 뿐.

‘확실히 모범생은 모범생이네.’

그렇게 나는 내가 가리켰던 곳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의 잔흔을 바라보며 숲에서 빠져나왔다.

***

다음 날 아침- 1교시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에 이하린과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해맑은 표정으로 양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천하씨도 무학담론 들으러 가세요?”

“예. 저도 그걸 신청했었으니까요.”

참고로 등천회랑의 수강신청은 입학지원서를 보낼 때 한꺼번에 수강신청까지 같이 처리되는 방식이었다.

사전에 받은 강의목록 중에서 원하는 걸 선택하면 따로 수강신청을 할 필요 없이 시간표가 편성되는 시스템이었고, 이하린 또한 나와 같은 강의를 신청해서 동선이 겹친 모양.

<무학담론>은 무투계 선택전공으로서 이번 학기 강의 중 유일한 무학이론 강의라 볼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내, 이하린이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아니요···! 그냥 신기해서요.”

“신기··· 요?”

“어제 하루종일 천하씨때문에 회랑이 소란스러웠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구나.

확실히 학기 첫날부터 조금 소란스럽게 지나가긴 했었다. 배치고사 영상부터 시작해서 업륜의 공개까지, 이래저래 가는 곳마다 관심이 넘쳐났으니 말이다.

강의가 끝난 후부터는 온종일 업륜을 탐구하느라 신경을 끄고 있었다만, 역시 꽤 주목받은 모양이었다.

“천하씨 지금 엄청 주목받고 계신 거 아세요? 배치고사 만점에 업륜까지 밝혀졌으니··· 어제 회랑에타나 헌터넷에서도 하루종일 그 얘기밖에 없었는걸요?”

“그 정도였나요?”

“네! 안 그래도 저희랑 계약을 맺은 것도 이미 소문이 다 퍼졌는지 어제 등천의 구도자에도 문의가 엄청 들어왔었대요.”

“······.”

“얼마나 문의가 많이 왔으면 저한테까지 연락이 왔을 정도예요···!”

“그렇군요.”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내 생각보다 더 많은 관심이 쏠린 듯 싶었다. 딱히 문제 될 건 없었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운 느낌은 있었다.

그나마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다는 게 다행이지 않을까? 혹시나 자체 공략을 시도하는 일이 있어도 조용히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부 인사팀에서도 연락이 왔었는데 여러 클랜에서 천하씨한테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 다른 데서 침 못 묻히게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으라는 거 있죠···?”

“곤란하시겠네요.”

“아···! 곤란한 건 아니에요!”

“근데 왜 저한테 연락 안 하고 하린씨한테 연락한 겁니까?”

“아. 그건······ 아마 천하씨가 연락을 안 받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제가··· 아.”

나는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생각해보니 어제 수련을 하던 도중 스마트워치의 전원을 아예 꺼놓았던 것이다. 업륜에 정신이 팔렸던 결과.

이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나는 바로 워치를 조작해 전원을 켜보았다. 그러자 스마트워치가 웅웅- 울려대며 그간 밀려있던 메시지를 토해내기 시작한다.

나는 알림을 하나씩 확인해보았다.

등천의 구도자에서 온 연락이 8건.

어딘지 모를 곳에서 온 전화가 4통.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하린으로부터 34건···?

“연락······ 많이 하셨었네요?”

“······아! 넵. 어제 연락이 안되셔서···.”

“죄송합니다. 수련하느라 전원을 꺼놓았던 걸 그만 깜빡했네요.”

“···아, 아니에요! 벼,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요 뭘. 별일 없었으면 된 거에요···!”

그녀의 반응이 조금 미묘했다.

나는 메세지를 확인해보았다.

[아까 정말 대단하셨어요! ㅎㅎ!]

[천하씨? 바쁘세요?]

[본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수련 중이신가 보네요···!]

[수련 열심히 하세요! 화이팅! ^^]

.

.

.

[수련을 너무 오래 하는 것도 건강에 안 좋다고 들었어요.]

[회랑은 넓어서 가끔씩 길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조심하세요!]

[주무세요?]

[내일 봐요 : )]

······.

나는 이하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전원은 제대로 켜놓겠습니다.”

“네? 아, 아니에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그래도 전원은 켜놓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혹시나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걱정······ 되기도 하니까요······.”

말하면서도 민망했는지 그녀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무래도 고작 하루 연락이 안된 걸로 걱정이 되었던 모양.

조금 유난이다 싶긴 했지만 이해는 되었다. 생각해보면 원작의 이하린도 잔걱정과 오지랖이 많은 성격이긴 했었으니 말이다. 그건 그녀가 원작의 주연- 남궁설아에게 했던 행동들만 떠올려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당신은 쾌검보단 둔검이 어울려요- 라니, 무인에게 그런 말을 건네는 건 어지간해선 힘든 일이지 않겠는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녀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수련에 몰두하시는 건 정말 좋은 거라 생각해요. 천하씨 실력이면 자만할 만도 한데 대단하세요···!”

이내 그녀는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해보면 제가 그날 정말 대단한 분을 구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조금 부끄러운 표정으로 장난스레 건넨 말이었지만 그 말 속에 담겨있는 건 분명 순수한 호의뿐이었다.

나는 그게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녀의 관점에서 나는 ‘원작’을 어그러트리는 나비효과 같은 존재일 텐데도 이렇게 살갑게 대한다는 게 의아했을 따름.

특히 순례자의 길 이후부터 왠지 모르게 특별대우를 받는 느낌이었는데, 분명 내가 쓸모있는 인물인 건 맞았지만 시기에 비해 생각보다 호감도가 너무 높은 것 같았다.

혹시 내가 모르는, 초반부터 무력이 필요한 일이 또 있었던 걸까? 나는 잠시 궁리해보았지만 역시 메인 에피소드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해본 끝에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그건 그렇고 혹시 제가 도와드릴 만한 일은 없나요?”

“네? 도움이요······?”

“예. 하린씨에게 갚아드려야 할 빚이 꽤 많은 것 같아서요.”

“······에이. 제가 뭘 했다고 그러세요.”

이하린은 민망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지만 갚아야 할게 많다는 건 사실이었다.

병원에 데려가 치료해준 것도, 순례자의 길에 도전할 수 있게 경비나 정보를 제공해준 것도, 에테리얼 크리스탈을 요청해준 것도 모두 그녀에게 진 빚이었으니 말이다.

비록 지금의 난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아닌 일개 생도에 불과했지만 그렇다 한들 무림인으로서 은원마저 소홀히 여길 생각은 없었다.

은恩과 원怨의 무게는 동등한 법.

그녀를 위해서라면 타천의 마인 몇 명을 베어버리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일은 나로서도 직접 겪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딱히 도움이 필요한 일도 없어서 으음······ 나중에 공략을 열심히 해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다만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이하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 1학기 초반에 타천자가 쳐들어오는 에피소드가 있었을 텐데도 생각보다 태연한 모습.

그건 분명 지금 그녀의 실력으로는 위험한 사건이었고, 원작에서도 이하린은 타천자를 상대하느라 큰 고생을 했던 기억이··· 아!

그제서야 생각났다.

생각해보니 그건 내가 읽은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였고, 이하린이 집필했던 ‘원작’의 전개와는 달랐다는 묘사가 기억난다.

그 말은 즉.

“회랑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필요한 일이 뭐가 있겠어요. 으음··· 기껏해야 조별과제? 그치만 그런 건 안 도와주셔도 돼요!”

“······그렇군요.”

이하린이 아는 ‘원작’의 내용상 그건 아직 한참 뒤에 일어날 예정이라는 말.

나도 정확한 시기를 기억하진 못하고 있었기에 자칫하다간 계획이 조금 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하린은 결코 죽어선 안 되는 존재였기에 나는 우선 밑밥을 깔아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나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아이참······ 괜찮다니까요···! 그럼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기면 말씀드릴게요. 그러면 됐죠?”

“예. 반드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정말···.”

이하린은 민망한듯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앞으로 걸어나갔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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