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길 (4)
시간마저 멈춰버린 세상. 비명을 지르던 이들도, 절규 속에 분투하던 이들도, 묵묵히 싸워나가던 이들도 모두 멈춰버린 세계.
그곳에서 목소리는 울려 퍼졌다.
[황색탑의 시련을 통과하였습니다.]
[새로운 순례자의 이름이 만상세계에 기록됩니다.]
그 순간 세계가 깨져나간다.
치지직-!
차원 단면이 부서짐과 동시에 시야를 가득 메우며 반짝거리는 빛. 마치 차원 이동을 경험했을 때처럼 오색찬란한 빛무리가 영롱한 광채를 내뿜으며 나를 휘감았다.
아득해지는 정신.
“!”
그렇게 빛이 사라지자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무척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만상세계에 업적이 기록됩니다.]
[순례자 유천하의 업적이 세계에 각인됩니다.]
내 눈앞에 놓여 있는 건 탑의 입구. 하늘을 찌르며 높게 솟아있는 거대한 황색의 석탑. 허공에 흩날리는 눈송이.
나는 그곳에 서 있었고.
그제서야 나는 현실을 깨달았다.
“······환상 이었던 건가?”
조금 전 목격했던 현상.
탑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만상의 눈으로 목격했던 광경은 무척이나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직감적으로 나는 내가 있었던 곳이 현실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실제하는 세계가 아니었고, 내가 조금 전까지 존재했던 곳은 일종의 허상과도 같았던 것이다.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처음부터 탑 내부에 소용돌이치던 마력이 기묘하게 느껴지긴 했었다. 시련이 시작되고 나서부턴 이질적인 기분과 불쾌함도 느끼지 않았는가?
하지만 위화감 속에서도 나는 허상을 깨닫지 못했다. 어째서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이내 답을 깨달았다.
본래라면 내가 이런 환상을 눈치채지 못할 일은 없었을 테지만 시련 속에서 겪었던 감각만큼은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즉시 내력을 일으켰다.
‘···아예 환상인 건 아니었나 보군.’
역시- 몸에는 격전을 치른 여파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혹사당한 혈도는 다시 또 부어올라 있었고, 내공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건 심상의 매듭 또한 마찬가지.
천천히 내력을 불어넣고 의념을 일깨우자 패도적인 기세가 솟구쳤다. 이 기세는 분명 6성의 경지에 맞닿아 있었다.
“······하.”
이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
천마신공의 경지는 단순히 요행으로 넘어설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오로지 깨달음- 특히 4성 이후의 구간부터는 마음에 대한 본질을 깨달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헷갈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감각과 경험은 실질적으로 남아있었지만, 방금 전 탑에서 튕겨 나올 때 ‘만상의 눈’이 직시한 광경은 분명 그 차원이 실제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었고, 어디서부터가 환상이었던 걸까.
황색탑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없다 보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이하린이라도 있었으면 모르겠다만 그녀는 아직도 탑 속에 있는 모양.
“······.”
잠시 고민해 본 나는 이내 깔끔하게 생각을 털어냈다. 혼자 궁리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 당장 알아야 할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는 우선, 새로운 눈으로 차원의 단면을 관측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만상의 눈.’
이게 내 특성인 걸까.
나는 만상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세계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 눈은 내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볼 수 있었다.
기의 흐름, 공기의 유동, 의념의 표상.
그리고 물질의 너머까지.
물론 평상시에도 이런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면 심히 곤란하겠지만, 다행히 상시로 발동되는 건 아닌듯 싶었다.
내가 원하는 순간, 나는 볼 수 있었고.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만상의 눈은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쁘지 않아.’
원래의 눈도 분명 특별한 자질을 품고 있었지만 만상의 눈은 확실히 격이 달랐다.
이래서야 감각이라기보단 권능에 가까운 느낌이지 않은가? 이건 단순히 전투에 국한되지 않고도 다양하게 쓰일 것 같았다.
이 세계에 온 지 겨우 이틀이 지났건만 만상세계에는 확실히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이제 특성을 얻었을 뿐이지만, 앞으로는 다른 이능들도 손에 넣을 수 있을 터.
그것들은 분명 내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 순간.
[축적된 업이 일륜을 이루었습니다.]
[업적 각인 – 업륜이 수여됩니다.]
내 귓가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
만상세계의 안내가 들려옴과 동시에.
쿠구구구-!!
내 몸- 정확히는 손등을 향해 거대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 즉시 만상의 눈으로 현상을 관측하자 세계의 업이 내 손등으로 모여들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삼라만상의 근원에서부터 흘러들어온 기운은 부드럽게, 그리고 뜨거운 열감을 품고 손등 위에서 춤을 췄고.
“···!!”
읔- 그 순간 지독한 통증이 손등을 덮쳤다.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화끈한 고통이 손을 뒤덮었다. 그 지독한 통증 속에서도 나는 만상과 동조된 눈으로 손등을 바라보았다.
웅웅웅-!
순식간에 타올라 순백으로 화한 기운은 그대로 내 손등 위에 내려앉았고, 그 기운은 세계와 동조하듯 울림을 토해냈다.
지잉-!
내 손등 위로 한가지 문양이 떠올랐다.
그건 하나의 획으로 이어진 원형의 각인.
“···아.”
그 모습을 본 순간,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기운을 확인한 순간 나는 기억속에 뭍혀있던 한가지 설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업륜!’
업륜業侖- 그것은 만상세계가 부여한 세계의 가호이자 각성자가 쌓아온 업적의 구체화. 세계가 칭송하고 만상에 각인될만한 업을 쌓았을 때 나타나는 업적의 각인.
그것이 바로 업륜이었다.
“무슨 이런 기운이······?”
나는 손등 위로 새겨진 흑색의 각인을 바라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만상의 눈으로 바라본 그 문양은 실로 경이로운 기적이었던 것이다.
허공위로 손을 나긋하게 휘젓자, 그에 맞게 손등에서부터 흩날리는 기운의 잔재.
각인이 이동함에 따라 대기 중에 퍼져있는 기운의 흐름도 같이 물결처럼 흩날린다. 비산하며 반짝거리는 입자가 시야 속에 떠올랐다.
“···아.”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지는 형상이었지만 이건 만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시 황홀하게 바라보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업륜에 의지를 실어 보냈다. 그러자 부드럽게 흘러들어 가는 순백의 근원.
‘내공하고는··· 역시 동화되는군.’
의지를 일으키과 동시에 그 기운은 내 몸속으로 녹아들며 도도하게 흘러갔다. 그리곤 내가 쌓아온 내력과 완벽히 동화되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
‘기의 공조가 완벽해.’
잠시 기억을 되짚었더니 업륜과 관련된 설정이 떠올랐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업륜은 어떤 이능하고도 융합될 수 있다는 묘사가 존재했던 것이다.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순수한 기운이 밀집된 기운이었기에 그런게 가능하다고 했던가?
확실히 기억 속에 남아있던 업륜의 이미지는 만능 보조배터리에 가까운 느낌이었고, 내 기억은 생각보다 정확했다.
‘이 정도 기운이면······.’
방금까지 남아있던 내력은 고작 2할가량.
천마신공 6성의 경지는 분명 압도적인 강렬함을 선보였지만 그 대가는 확실했다.
마수를 사냥하며 소모된 내력도 적진 않았지만, 마지막에 거인을 베어 가르는데 타오른 내공만 해도 전체 내력의 5할 가까이 되었던 것이다. 그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효율이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 정도로 내공이 소모된다면 결국 6성의 경지는 함부로 활용하기 힘들 테고, 그래서야 경지가 높아져도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하지만 만상세계가 선사한 업륜은 그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마치 해답을 던져준 느낌.
‘최소 10년은 연공 해야 쌓일만한 내력이야.’
바닥났던 내력이 어느새 순식간에 차올라 있었다. 대략 5할쯤 될까? 업륜에 담겨있는 기운의 양은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양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절로 회복되는 건가?’
나는 만상의 눈으로 업륜을 바라보았다.
업륜에 모여있던 기운은 사라졌지만, 이 순간에도 세계에 퍼져있던 미약한 기운이 손등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대략 한나절, 연공에 집중한다면 반나절 안에도 다시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사실상 내공이 늘어난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 깨달음보단 내공이 더 절실했던 내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쁘지 않았다.
‘업의 축적이라···.’
내가 결심했던 목표는 두 가지.
복수할 무력을 갖추는 것,
돌아가 복수를 행하는 것.
적어도 그중 하나만큼은 구체적인 길이 눈앞에 제시된 기분이었다.
‘내력을 쌓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마수를 토벌하고 기운을 흡수한다.
업적을 쌓아 업륜을 획득한다.
게다가 만상세계가 부여하는 기적은 업륜이 전부가 아니었다. 특성도, 업륜도, 가호도 내가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
물론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모든 결과는 내 행적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그런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거라.’
나는 무인이었고.
나는 도전을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수와 싸우는 것?
탑을 공략하는 것?
목표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해주마.
나는 그렇게 다짐했고.
그 순간.
눈앞에서 번쩍- 하고 빛이 휘몰아쳤다.
오색찬란한 빛무리 사이로 흩날리는 검은빛 머리카락. 작은 체구의 인영. 드디어 이하린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발이 지면에 맞닿았다.
“······.”
무언가 조금 혼란스러운 듯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 이하린은 머리가 어지러운 듯 잠시 몸을 비틀거리더니 이내 머리를 휘저었다.
그리곤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난데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환상··· 맞아 그랬었지······”
나를 발견하지 못한 걸까?
탑에서 나온 자세 그대로 멈춰 선 그녀는 머리가 아픈듯한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어렵긴 했는데 뭔가 별거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정신에 간섭당하는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고개만 돌려보아도 내가 옆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탑에서 빠져나온 후유증이 남아 있는 모양.
혼란스런 기색으로 이마를 조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자신의 스마트 워치를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래도 합격했으니까 다행이긴 한데 이래서야 원작의···”
“하린씨?”
이대로 내버려두면 곤란한 소리까지 할 것 같았기에 나는 재빨리 그녀의 혼잣말을 끊어냈다.
그런데 조금 전 격전을 벌이고 와서 아직 감각이 혼란스러웠던 걸까?
“···!!”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이하린의 손은 등 뒤로 향했고, 그 새하얀 손가락이 검병에 맞닿음과 동시에 그녀의 온몸에 힘이 깃들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아 날카롭게 벼려지는 그녀의 시선.
한순간에 임전 태세를 취한 이하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시야에 그녀의 눈빛이 맞닿았다.
“······.”
“······.”
잠시 정적이 흐른다.
“괜찮으신가요?”
“······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이하린은 마치 기지개를 피듯 검으로 향했던 손을 나긋하게 펼쳤다.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어색한 광경. 순간적으로 미묘한 정적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
“······.”
그녀가 잠시 고개를 숙였지만 나는 잠시 조용히 있어 주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귓가가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잠시 정신을 추스르는 걸 기다려주고 있자니···.
갑자기 이하린이 고개를 팟- 하고 들어 올렸다. 매우 빠른 속도로 말이다.
“···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하린은 당황스러워 보이는, 그리고 경악스런 기색이 담긴 눈빛을 한 채.
“검강-!!”
그녀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
***
자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유천하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하린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그··· 천하씨?!”
“······예?”
이하린은 지금 시련 속에서 마주했던 장면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시련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유천하의 기량. 그 자연스러운 검로, 냉철한 판단력.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란 건 지난번 사건 때 충분히 알았다 생각했건만, 자신이 묘사한 적 없는 영역에서 튀어나온 이 천재는 그녀의 예상보다도 더 말도 안 되는 존재감을 표출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녀를 경악시킨 건 따로 있었으니.
“마, 마지막에 그거 뭐였어요?!”
“······네?”
“설마 거, 검강을 날린 거에요?!”
맙소사- 검강이라니!
그걸 본 순간 이하린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막, 천하씨가 마수들 사이로 팍! 뛰어들고, 갑자기 수호자가 쿵! 나타나고, 갑자기 막 검강이 빰! 하고 날아가고···!”
“······잠깐만요. 그걸 어떻게 보신 건가요?”
“네? 어떻게라니요. 그야···”
“방금 전 시련··· 환상 아니었습니까?”
순간적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이하린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유천하는 방금의 시련을 개별적인 환상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
탑에서 나온 순간 정신 간섭은 끝났을텐데 저렇게 말하는걸로 봐선 유천하는 황색탑의 구조를 아예 모르고 있던 걸까? 아무래도 전혀 모르고 입장했었나 보다.
유천하의 배경을 떠올린 이하린은 빠르게 납득할 수 있었다.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하지···.
이하린은 머릿속으로 기억하고 있던 설정을 조금씩 끄집어내었다.
“어······ 그게 애매하긴 한데 황색탑, 그리고 일부 백색탑의 구조는 대부분 허상 차원이 맞긴 해요. 잿빛탑이랑은 근본적으로 다른 기반을 두고 있으니까요. 근데 그게 이면 세계의 분화현상이랑 관련이 있는 건데 모두 같은 허상 차원을 경험하되 일정 트리거에서 현실로 분리되는 방식이라 다차원 복합굴절이론을 바탕으로······”
“······예?”
유천하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매번 무덤덤한 표정만 짓고 있던 사람이었던지라 그 표정을 바라본 이하린의 머릿속으로 미묘한 감상이 슬며시 떠올랐지만 그녀는 이내 그 감상을 조용히 가라앉혔다.
그러는 사이 유천하는 얼떨떨한 얼굴을 한채 조용히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설명을······ 조금 더 풀어서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넵······!”
천하씨는 이론에 약하구나- 유천하가 알았다면 억울했을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하린은 속세와 떨어져 검만 휘둘렀을 그를 위해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을 요약해주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허상 차원에 진입하면서 도전자들의 육체가 임시로 구현되었다가, 죽거나 클리어하게 되는 순간에 현실로 튕겨 나오는 거에요. 물론 그걸 인식못하게 정신 간섭도 이루어졌구요!”
“아······. 그럼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 죽은 건 아니었군요?”
“음. 그렇죠? 물론 고통이나 체감은 그대로라 정신력에 따라 트라우마를 겪을 수도 있긴 한데······.”
죽은 응시자들이 걱정되었던 걸까?
유천하의 눈빛에 미약하게, 아주 미약하게 안도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가는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이하린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 남자는 처음 만났던 날도 쓰러질 때까지 마수와 싸우고 있었다. 그런 실력이라면 위험한 순간에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도 유천하는 기절하기 직전까지 마수와 싸웠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응시생들을 걱정하는 모습까지 보이니 근본적인 성향자체가 선한 사람이구나- 이하린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딴 생각에 빠졌던 이하린은 이내 원래의 화제를 떠올렸다.
“아···!”
설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저도 모르게 딴 길로 새고 말았던 건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 천하씨 검강 쓰실 줄 알았어요?!”
“아.”
“아니···! 아, 가 아니에요···!! 무슨 검강을 쓸 줄 아시는 분이 황색탑의 시험을 보고 있어요?! 아니, 그것보다 검강을 도대체 어떻게 날리신 거에요? 그거 원래 그렇게 날아가는 거였어요??”
“아··· 그건···.”
속사포처럼 터져 나온 이하린의 물음.
유천하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만 대답하기 어렵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뭐 이런 걸 물어보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는 표정이었다.
“아, 아니 도대체 얼마나 사회와 떨어져서 생활하셨으면······.”
그 천진난만한 반응에 이하린은 조금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집필한 소설은 헌터물이었고, 이하린이 알고 있는 무학지식은 얄팍한 겉핥기에 불과했지만 그렇다 한들 ‘검강’마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하린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유천하가 검강을 사용했다는 건, 그것도 아까처럼 마수의 거체를 단번에 베어버릴 정도로 검강을 날려대는 건 절대 평범한 기예가 아니었으니까!
수많은 각성자들 중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최선두 공략자들. 검강은 그 중에서도 최소 등천자급은 되어야 보여 줄 수 있는 경지였다.
하물며 그게 성인도 안된 각성자가 갖춘 기량이라면··· 등천회랑에 입학?
그런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분이 왜 아직 무소속···! 아! 얼마 전에 하산하셨다 했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분명 원작 주역들에 비견될만한 엄청난 재능이었다. 아니 이 시점에서라면 진시우를 제외하곤 아무도 못 미칠 만큼 어마어마한 실력.
하지만 그게 말이 되는 걸까?
세계의 다양한 초인들을 모으고 모아, 벼려낸 천재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위치해있는 원작의 주역들에 비견될만한, 아니 뛰어넘을만한 말도 안 되는 재능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하린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실력을 갖춘 사람이··· 무슨 말도 안 되는······.”
“······?”
왜냐하면.
이하린- 자신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천재를 ‘설정’한 적이 없었으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아.”
자신의 말이 조금 민감했던 것일까. 유천하의 표정이 굳어졌고, 이하린은 아차 싶었다.
분위기를 읽은 그녀는 황급히 화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 그, 그 날이요! 도대체 이런 실력을 갖추신 분이 왜 그날은 그렇게······ 하마터면 죽을 뻔하셨잖아요···!”
마침 떠올랐던 의문.
그녀는 자연스레 변명을 둘러댔다.
나름대로 맥락이 들어맞았기에 유천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아. 그날은··· 위험했지요.”
“위험한 수준이 아니었어요···! 제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그날 천하씨는··· 하마터면······ 큰일 날······ 아.”
그 순간 번개가 이하린의 뇌를 강타했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
“아······.”
화제를 돌리기 위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이하린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 날의 은혜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언젠가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
자신의 말에 표정을 굳힌 채 진지한 인사를 건네는 유천하를 바라보며 이하린은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잠깐만 그렇다면 설마.’
이하린은 스스로를 되짚었다.
분명 원작에 눈앞의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차라리 유천하가 계속 은거를 하고 있었더라면, 아니 등천회랑에 입학하려 하지 않았다면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천하는 등천회랑에 입학하려 하고 있었고, 충분히 그럴만한 실력을 갖추었다. 하지만 그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계는 자신이 집필한 세계다.
하지만 자신은 ‘이곳’에 빙의했고, 이 세계가 실존하는 세계가 된 그 순간부터 원작과는 다른 미래가 예견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빙의한 순간부터 자신은 미래를 대비하여 여러 활동을 쌓아가는 중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건.’
적어도 이하린이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은 그 날 자신의 행동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유천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유천하의 부상은 그만큼 심각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빙의자가 아니었다면, 그곳에 나타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원래의 이하린은 침식지역에 갈 일이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눈앞의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이 세계에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유천하는 그 날 죽었을 테니까.
수많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고, 그 모든 건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나비효과.’
이하린은 유천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