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9화 (9/205)

순례자의 길 (2)

내면의 심상, 그 깊은 곳에서부터-

한 가닥의 매듭이 풀어져 나왔다.

해일과도 같은 내공이 혈도를 내달리자 온몸에 근육이 꿈틀거리며 몸에 탄력을 부여했다. 약간의 통증이 올라왔다.

‘천마신공 天魔神功’

하지만 상관없었다.

일천검결 一天劍結

제마검형 際魔劍形

퀴이잉!

빛처럼 쏘아져 나간 칠흑의 검기는 공간을 가르고 마수의 몸을 베어냈다. 갈라진 절단면 사이로 일렁거리는 잿빛의 핵.

‘암뢰 暗雷’

촤악!

그리고 거기에 맞닿은 검.

콰직-

그 순간 검극에 일렁거리던 검기가 불처럼 타오르며 터져 나왔다.

퍼엉-!!

마수의 몸체가 터져나가며, 갈기갈기 찢겨진 그림자의 형상은 울음소리 하나 내뱉지 못한 채 그래도 허공 속에 녹아내렸다.

[만상세계에 업적이 기록됩니다.]

“······부정형을 일격에?”

이 정도야 당연한 결과.

옆에서 들려온 독백을 뒤로 한 채, 나는 다시금 손을 뻗어 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그어지는 궤적.

-KI···Kiaeeek···!!

서걱- 시야의 사각에서 뛰어들어오던 마수는 그대로 짜여진 각본처럼 베여졌고, 터져나간다.

퍼엉-!!

[만상세계에 업적이 기록됩니다.]

순간적으로 검을 휘두르려던 이하린의 손이 그대로 멈칫했다. 그녀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대단하시네요.”

“별말씀을.”

애초에 지난번 사태 때 그녀가 파악했던 건 온전한 내 실력이 아니었다. 한계에 다다른 몸으로 보여줬던 검격으로는 파악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가볍게 볼만한 실력은 아니었을 터지만 원래의 내 실력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의 나는 후원할 가치가 있는 인재. 딱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곤란했다.

서걱!

물론 다른 이의 생각 같은 건 중요하진 않았다만, 이건 경우가 좀 달랐다. 굳이 실력을 감출 생각도 전혀 없었고 말이다.

‘여기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이곳에는 내 성장을 감시하는 눈길 따윈 없었다. 내 경지를 감춰야 할 적 또한 없었다. 내가 앞으로 상대해야 할 대부분의 적은 사람이 아니었고.

퀴이잉!

굳이 내 스스로 ‘엑스트라’를 자처할 이유 따윈 없었다.

서걱!

계속해서 그녀가 손을 쓰기도 전에 순식간에 마수를 베어 넘겼더니 옆에서부터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내 정체가 궁금하다는 듯 이하린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의아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원작의 주요인물들을 되짚어보고 있는게 아닐까?

‘물론 아니지만.’

나는 그녀와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나는 돌아갈 방법 따윈 모르니까.

그건 원작에선 묘사되지 않은 내용이니까.

그러니까.

‘그녀를 통해 알아내야 해.’

콰직!

정확히는 그녀의 동료가 되어야 한다.

그녀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녀는 그걸 위해 원작을 따라간 사람이었으니까.

당연히 처음에는 고민을 좀 했었다.

모든 걸 사실대로 밝히고 협조를 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녀라면 흔쾌히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불확실한 이야기야.’

그건 최후의 선택지일 뿐이었다.

정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만 고작 글 몇 줄기로 접했던 이를, 이제야 막 알게 된 이를 함부로 신뢰할 만큼 난 해이하지 않았다.

애초에 알아낼 방법은 존재했고 말이다.

퍼엉-!!

연중 되기 직전- 원작의 후반부 전개에서 그녀는 심연과 싸우기에 앞서 자신의 동료들, 원작의 주역들에게 모든 걸 고백했다.

이 세계에 오게 된 이유부터, 돌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 그에 필요한 조건까지. 그 모든 걸 밝혔다는 묘사가 있었다.

마음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동료들을 속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이유로 말이다.

‘그러니 나는 그때를 노린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 방법을 알아낸다 한들 당장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원작의 이하린이 등천회랑에서 3년이란 시간을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또한.

설령 지금 당장 돌아갈 수 있다 한들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내가 돌아가야 하는 이유, 강해지려는 이유.

그건 오직 한가지 원인에 기인했으니까.

‘돌아가기 전까지 기필코 검혈마제를 죽일만한 경지에 도달해야 돼.’

강해질 수 없다면 중원으로 돌아간들 똑같은 결과가 되풀이될 뿐이었고, 그러지 않기 위해선 내 앞을 가로막은 벽을 넘어 지고한 경지에 발을 들여야 했다.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한 내겐 시간이 있었다.

이곳에 있는 한 내겐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특성, 가호, 업륜? 단순히 그런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순수히 경지를 갈고 닦을 시간.

내게 유일하게 부족했던 그것.

시간이 주어졌다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러므로.

‘3년, 아니 무조건 2년 안에 초절정의 문턱을 넘어선다···!’

그게 내 계획이었다.

등천회랑에 입학해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으며, 내 경지 자체를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린다. 그게 내가 걸어가야할 길.

그에 필요한 건 시간이었고.

그 시간 동안 이하린과 가까워질 수 있다면 돌아갈 방법쯤은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그녀가 심연과 맞서 싸우는 계기- 세계침식은 이 세계에선 확고하게 예정된 미래였고, 정 방법이 없다면 심연토벌에 참여함으로써 그녀에게 협조를 구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서걱-!!

물론 모든 게 내 예상대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주연들에게만 쏠릴 것이다. 그녀는 원작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필요로 하는 건 심연에 맞서 싸울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들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그 관심을 빼앗아와야겠지.’

나는 새로운 주역이 될 생각이다.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녀의 방향을 제어할 수 있도록, 그녀가 의지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녀가 신뢰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원작에 나왔던 수많은 초인을 제치고-

인과율을 뚫고 나온 가시가 되어서.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닌-

미지의 엑스트라가 되어서.

그게 내 앞으로의 계획이자 방향성.

퀴이이잉-!!

나는 나비효과가 되기로 결심했다.

***

-TRAHhhhhhhAAAAA!!

“···끝이 없군.”

서걱-!

도대체 얼마나 죽인 걸까.

50마리가 넘어간 이후부턴 깔끔하게 세는 걸 포기했다. 그런데도 사방 곳곳에선 아직도 새로운 마수들이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질리는 물량.

철걱-!!

달려든 마수를 베어 넘기면서 탑이 제시했던 목표를 떠올려보았다.

스스로를 증명하라.

도대체 어떻게 말인가?

제한시간 동안 살아남는걸 원하는 걸까?

아니면 일정 수 이상의 마수를 죽여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나는 마수를 베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까지 싸우라는 거야!!”

“씨발!! 말할 시간에 마법이나 써!!”

마수들의 수준이 높은 건 아니었다만 끝없이 되살아나는 물량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사방에 피와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기분이 조금 불쾌해진다.

[과업이 부여됩니다.]

[과업 – 스스로를 증명하라.]

나는 처음 입장했을 때 보았던 문구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스스로를 증명하라는 건 무엇일까.

단순히 싸우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는 걸까? 왜 마수들과 싸워야 하는 곳에서 저런 과업을 부여한 걸까.

쾅!

나느 달려든 마수를 걷어참과 동시에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으··· 으아아악!!”

“···죽어 이 씨발!!”

“여기! 여기 좀 도와주세요!!”

도망 다니는 자, 싸우는 자, 죽어가는 자.

모든 게 혼재된 그야말로 아비규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서로 힘을 합쳐 마수와 접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퍼엉!!

화르륵!

“뭐, 뭐야! 누가 불덩이 던졌어!! 뒤질 뻔···크아악!”

“아, 제, 제 특성입니다! 죄, 죄송합··· 컥!”

이런 난전 속에서 모르는 이와 합을 맞추기엔 서로의 능력도, 수준도 너무나 달랐기에 부질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럴 능력과 경험이 있는 이들은 극히 적었고, 그에 따라 응시생들은 끊임없이 죽어 나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

그나마 활약하고 있는 건 홀로 마수 토벌을 자행할 만큼 실력 있는 이들뿐. 예를 들어 저기 보이는 ‘주인공’처럼 말이다.

서걱!

“······.”

평소의 그녀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하린은 냉막한 표정으로 마수를 도살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위치가 켜진 듯 맹렬하게 장검을 휘두르며 움직였고, 스르릉- 부드럽게 휘둘러진 검의 궤적을 따라 백색의 검기가, 아니 백색의 오러가 내달렸다.

-Kieeeaak!!

저 자그마한 체구로 본인의 키만 한 장검을 휘둘러대는 건 분명 기이한 장면이었지만, 그 검로만큼은 지극히 이상적이었다.

그녀의 경지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만큼 깔끔한 검격. 아마도 만상세계가 그녀에게 부여한 ‘특성’ 덕택이겠지.

‘기본기에 비해 검격의 투로 만큼은 어지간한 고수들보다 뛰어나.’

검로를 보고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걱!

-Ki··· Kiaaaaak!!!

퍼엉-!!

물론, 그녀를 보고 있다 해서 내 전투를 소홀히 하는 건 아니었다.

퀴이잉!

몇 마리나 베어 넘겼을까. 시험이 시작되고 못해도 70, 아니 80마리는 죽인 것 같았다. 하지만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었다.

그림자들은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고 있었고,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마수를 확실히 토벌하려면 기氣가 필요했다.

물론 이렇게 오랜 시간 격전을 벌이기란 힘든 일이었고,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서서히 지쳐갈 수밖에 없는 상황.

“회복!! 회복 특성 있는 사람 없습니까···!!”

“회복은 지랄···! 일단 잡기나 해!”

당연히 대부분의 응시생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어수룩한 이들은 끊임없이 죽어 나갔고,

사람의 목숨은 참 쉽게 스러지고 있었다.

“거기 조심··· 미친!”

“자, 잠깐만요! 여기···!”

그렇게 죽어 나가는 이들 중에는 당연히 성년도 안 지난 것처럼 보이는 어린 외형을 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아마도 등천회랑 입학의 꿈을 갖고 도전하러 온 게 아니었을까?

하반신이 분리된 채 죽어가고 있는 저 아이는 대체 몇 살이나 되었을까.

“······괜히··· 들어왔··· 어······.”

“시발!! 언제! 끝나는 건데!!!”

사람이 죽는 모습이야 많이 봐왔다.

당장 며칠 전만 해도 내 손으로 수십 명을 넘게 죽였다. 적을 죽이는데 자비는 필요 없었고, 나는 살생 따위에 망설일 만큼 멍청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저들은 내 적이 아니었고, 내 눈에는 저들이 너무나 어리게만 느껴졌을 뿐이다.

애초에 나는 사람이 죽는 걸 싫어했고, 그렇기에 이 상황이 그리 편치는 않았다. 기분이 불쾌해졌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설픈 연민이 독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내게 독이 되는 것이든, 연민 받은 이에게 독이 되는 것이든 말이다.

무정강호 無情江湖

그게 여지껏 내가 살아온 세상이었으니까.

애초에 내 감정과는 별개로 저들 또한 스스로 선택한 결과를 마주하는 것뿐이었다. 무언가를 위해 그들은 도전했고, 그에 맞는 결과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러니.

“왜···! 왜 안 끝나는 거야!!”

“시발···!! 다 죽어야 끝나는 거냐고!!!”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저게 아니었다.

“······.”

[과업 – 스스로를 증명하라.]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나는 무엇인가.

“···뒤에 한 마리 더!!”

“부정형이다! 마력 남는 사람 여기 좀 도와줘!”

상념과 망념이 교차한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마음이 번잡해졌다. 심상 속에 매듭지어진 심마가 조금씩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무정강호.

연민과 동정은 좋은 감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긴 강호가 아니지.’

허나 저들을 도울 이유는 없었다.

우우웅-!

내력이 검신을 타고 일렁거린다.

서걱-!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마수들.

나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이 교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이 시련이 어디까지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여유가 있을지언정,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닌가?

그러니 다른 이에게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런 걸까?’

[특성이 개화하고 있습니다.]

“으아아아악!!!”

“파, 팔이···!!”

끊임없이 고막을 때려오는 외침과 비명소리. 그리고 어지럽게 몰아치는 마수들을 바라보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를 증명하라.’

나는 무인이다.

그렇다면 무인은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으로 증명해야 하는 걸까.

“뒤에 하나 더 생긴··· 미친! 부정형!!”

“이, 이쪽에도 부정형이다!! 왜 갑자기···!!”

“······자, 자, 잠깐만··· 도대체 몇 마리가!!”

그건 어려울게 없는 문제였다.

무인을 증명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쌓아온 건 무의 업 業.

그리고 무인을 증명할 수 있는 것 또한 일생을 단련해온 무예 武藝.

“형태를 갖추기 전에 어서···!”

“시발! 그냥 도망가는 게 낫지!!”

“기, 기다려!! 빨리 안 하면 다 죽···!”

알고 있다.

연민은 독이다.

하지만.

그깟 검 몇 번 더 휘두르는 걸로 고민해야 할 만큼 나는 약했던가?

내가 쌓아온 무공이 보잘것없었던가?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런 걸로 고민할 만큼 난 약하지 않았다.

천마신교 소교주의 위치는 결코 그런 자리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에서 난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나를 증명할 수단은 오직 하나였다.

그 순간, 합리화인지 깨달음인지 모를 소용돌이를 잠재우며 나는 마음속의 매듭을 한 가닥 풀어헤쳤다.

우우웅-!!

심상의 매듭이 내면에서 흩날린다.

깊은 내면에서부터 화산처럼 터져 나온 패도적인 기운은 파도처럼 내달렸고.

그렇게.

‘천마신공.’

칠흑은 빛이 되어 뻗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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