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길 (1)
“천하씨···?”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하린이 염려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괜찮으세요···?”
“아. 조금 시끄러워서 그런지 순간 정신이 멍해졌네요. 사람이 생각보다 많군요.”
“아···. 아무래도 그렇죠? 황색탑이 열리는 기간은 짧은데 자격을 원하는 사람은 항상 많으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자격이라- 사실 원작에서도 황색탑이 묘사된 부분은 무척 적었기에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저 이하린은 필요에 의해서 순례자의 길을 통과했고, 그 자격을 통해 등천회랑의 추천서를 얻어냈다. 딱 그 정도의 기억뿐.
소설 속에서는 기껏해야 이하린은 황색탑의 시련을 통과했다- 정도로만 언급 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내가 생각했던 황색탑의 이미지는 등천회랑과 관련된 부분으로 국한되어있었지만, 주변에 널려있는 사람들의 연령대는 내 생각보다도 더 다양해 보였다. 적어도 학교에 다닐만한 연령에선 확실히 벗어난 이들도 꽤 보였던 것이다.
“자격이 등천회랑 입학요건만 말하는 건 아닌가 봅니다?”
“네. 순례자의 칭호는 대부분의 기관이나 클랜에선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편이에요. 그래서 공인된 소속이 없는 사람들은 한 번씩 꼭 도전해보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근데 그렇게 인정해주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그 말에 이하린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약간은 뿌듯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 질문에 대답했다.
“그야 황색탑의 기준은 까다로운 편이거든요. 타천의 마인은 절대로 진입할 수도 없고, 실력이 미달되는 자들은 결코 통과할 수 없는 곳이어서 그럴 거예요!”
그 대답을 들은 순간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뭔가 되게 편의주의적인 구조네요.”
“······그, 그런가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감상에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의기양양했던 이하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
그 모습에 살짝 아차 싶었던 나는 바로 말을 흐려버렸다.
“······뭐. 그래도 인류한텐 좋은 일이겠지요.”
“그, 그렇죠? 사, 사실 이런 게 없었으면 저희처럼 신원정보가 없는 사람들은 조금 곤란했을 거에요···!”
본인이 설정한 세계라 그런 걸까?
내 말에 당황스러워하는 이하린의 모습이 조금 재밌게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허둥대더니 이내 자연스레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 것보다! 응시자들 모두 꽤 무서워 보이지 않나요?”
“그런가요?”
화제를 돌리려는 것치곤 꽤 진심이었던 걸까? 긴장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그녀의 모습이 원작을 아는 입장에서는 꽤나 기묘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순례자의 길’은 제대로 된 신원이나 자격이 없는 이들만이 도전하는 루트.
대부분의 각성자가 정규 기관이나 집단에 소속된 상태로 성장하는 만큼, 이곳에 주의할만한 인물이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건 내 눈으로도 확인되는 부분.
‘딱히 주목할만한 사람은 없군.’
무인이 아니어도 기본적으로 감지되는 기, 아니 마력의 기세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대부분이 이류, 몇 명은 간신히 일류.’
애초에 원작에서도 시련을 통과한 건 이하린 하나뿐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시련을 치렀던 일자에서는 말이다.
실제로도 이하린의 기량은 주변의 인물들에 비해서 훨씬 뛰어나 보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주변에 비해서긴 하지만···.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하린이 내게 격려를 건네왔다. 주먹을 움켜쥔 그녀의 목소리에는 긴장감과 열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래도 같이 열심히 해봐요!”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꼭 같이 합격합시다.”
“···아자 아자! 화이팅!”
나는 분명 원작 <소설 속 주인공>을 재밌게 읽었지만, 막상 그 세계에 들어와 있으려니 묘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나 또한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하겠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내가 이 세계를 소설 속의 세계이자 또 다른 현실로 받아들였듯, 그녀 또한 나를 소설 속에 속한 인물로 받아들였을테니까.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딱히 그 사실이 불쾌한 건 아니었다.
그 정도는 이미 받아들인 부분이었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저 이 세계와 내가 건너온 세계. 그리고 내 전생과 이하린의 원래 세계에 대해 복잡한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만상세계란 도대체 무엇일까.
환생과 빙의는 어떤 현상인걸까.
‘······.’
그렇게 잡념이 깊어질 때 즘.
--------!!
무언의 파동이 공동에 울려 퍼졌다.
의식을 찌르는듯한 기이한 파장.
-읔!
-뭐, 뭐야 갑자기···!
난데없는 압력이 공동을 덮쳤고, 사방에 메아리치던 웅성거림은 한순간에 멎어버렸다. 순식간에 기이한 분위기가 공동에 내려앉았다.
숨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는 고요함.
그에 각성자들이 꿀꺽- 침을 삼키는 순간.
조용한, 그리고 냉막한 음성이 공동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이제 곧 ‘순례자의 길’ 시련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별 거없는 내용이었지만, 왠지 모를 서늘함이 느껴지는 기계적인 음성.
[시련이 시작되면 중도 포기가 불가능하오니 마지막으로 응시 여부를 선택해주시기 바랍니다.]
[시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이 딱딱한 안내음이 마치 도전자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으로 느껴졌다면 그건 내 착각인 걸까? 조금 거슬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고민하진 않았다.
“도전한다.”
“도전할게요.”
우리의 선택은 당연히 도전.
-여기까지 와서 무슨······
-이 기회를······ 도전······
-당연히 도전······
-도전···! 빨리 시작······
다른 도전자들 사이에서도 하나둘씩 응답이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울려 퍼지던 응답은 어느새 여기저기서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애초에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려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그 웅성거림마저도 공동에 감도는 긴장감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메시지와 함께 내려앉은 중압감이 공동의 공기를 순식간에 무겁게 만들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으스스하네요.”
“······.”
이하린 또한 조금 긴장되는 기색.
그녀를 바라보며, 그리고 방금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나는 조금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원작에서는 가볍게 지나가지 않았나?’
아까도 말했듯 원작에선 이 부분이 제대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 생략된 건 이 부분만이 아니었다.
원작의 시작 부분- 그러니까 이하린이 소설 속에 빙의한 후 등천회랑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전개가 빠르게 생략되었었다.
읽을 때는 빠른 전개라 생각했을 뿐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처하니 조금 거슬릴 따름.
그렇기에 원작의 그녀가 이곳을 어떻게 클리어했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그저 요약된 내용 속에서 그녀가 ‘쉽게’ 통과했다는 묘사가 있었기에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그래서일까? 왠지 모를 위화감이 계속해서 불쾌하게 느껴졌을 따름이다.
[잠시 후 시련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다시 들려온 안내 음성에 나는 그저 조용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
천마신공이 활성화되며 온몸의 기력을 천천히 끓어 올렸다. 아직 본격적으로 내력을 일으킨 건 아니었지만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솔직히 몸 상태가 별로 안 좋긴 했다.
혈도는 아직도 부어있었고, 찢어진 근육은 아물어가며 다양한 통증을 내지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내공만이라도 회복된 지금의 몸 상태라면 기절 직전 상대했던 괴물 정도는 몇 번이든 베어 넘길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시련의 내용을 모른다 한들 원작이 시작될 시기의 이하린도 통과할만한 수준일 테고, 그렇다면 지금 그녀의 실력 정도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통과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게 내 판단의 근거였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시련 시작.]
그 순간 빛이 반짝였다.
-팟!
***
순간적으로 번쩍거린 시야.
머릿속으로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시야가 불편한 느낌.
나는 곧바로 기감을 일깨웠다.
위화감 속에서 상황을 파악함과 동시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련이 시작됩니다.]
[과업 – 스스로를 증명하라.]
처음 탑에 들어왔을때도 떠올랐던 문구.
‘스스로를 증명하라.’
스스로를 어떻게 증명하라는 말일까?
다시 접한 내용에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기감을 통해 끔찍한 기운이 느껴졌다.
동시에 사방에서 하울링이 울려 퍼졌다.
-Kyaaaaakkk!!!
-BKKKKaaAA···!!
사방에서 검은 마력이 꿈틀대며 응집된다.
그와 동시에 공동 곳곳에서부터 잿빛의 괴물들이 순식간에 솟아올랐다.
마수들의 크기와 형태는 각기 제각각이었고, 생성되는 위치 또한 무작위였는지 사방에서 튀어나와 온몸을 꿈틀거렸다.
온전히 형상화를 이룬 마수들은 상황을 파악하는 중인건지 가만히 제 자리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조금은 섬 찟한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읔···! 머리 아파··· 어? 어?!
-뭐, 뭐야 이렇게 갑자기?
-그, 그냥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
실전 경험이 없던 걸까? 대부분의 응시생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생성된 마수로부터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있었고,
-일단은 빨리 죽입시다···!
-시련을 치르러 왔으면서 왜 도망가는데 이 헌터같은 새끼들아!!
오로지 소수의 응시생만이 긴장한 기색으로 마수를 향해 전의를 일으켰다.
‘······참나.’
적이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오히려 도망을 치다니. 사람들의 행태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순간.
푸슈슈슉!!!
바닥에서부터 검은 가시가 솟구쳤다.
“······어?”
“······이게··· 무슨···.”
그림자가 뭉쳐지던 곳이 아닌, 마수가 없던 곳으로 뒷걸음질 치던 응시생들 사이를 뚫고 올라온 검은 송곳.
당연히 대부분의 응시생은 그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고···.
결과는 간단했다.
촤악-!! 푸루룩!!!
공동에 쏟아져 내리는 붉은 비.
산산이 찢겨 나가는 사람이었던 것들.
후두두둑!
그렇게 실내에 쏟아지는 핏빛의 빗방울을 뒤짚어쓴 사람들이 미처 경악을 토해내기도 전에, 사방에 자리하고 있던 마수들은 일제히 포효를 터트렸고.
-KYYAAAAAAAAKKKKKK!!!!!!
-KrrrrRAAAAAAAAAAAA!!!!!!
그렇게 시련이 시작되었다.
“아, 아··· 아아아아악!!!!”
“꺄아아악!!”
나는 그 즉시 발을 박찼다.
‘······뭐지? 예상과 달라.’
난데없이 펼쳐진 죽음의 향연에 나는 바로 마음가짐을 고쳐먹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실전에서 중요한 건 여유도 자존심도 아니었다.
방심은 멍청이나 하는 것.
실전에선 냉철한 정신과 적절한 판단.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나는 마수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전신을 타고 패도적인 기세가 올라왔다.
“···시작부터 부정형 마수네요.”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마수를 향해 내달리는 그녀. 이하린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는 차가운 눈빛 아래, 염려를 담아 나를 바라보았다.
“도와드릴 수 있으면 도와드릴 테지만, 이런 상황이면··· 그러기는 힘들 것 같네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부상······”
그 순간 나를 향해 달려드는 마수.
-KTAAAAAAA!!!!
대형견만한 크기의 마수를 향해 그 즉시 팔목을 퉁! 하고 튕겨낸 나는, 그대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마수를 베어 넘겼다.
그렇게 달려가는 속도 그대로.
서걱!
내 검은 마수를 갈라버렸다.
퍼엉-!!
[만상세계에 업적이 기록됩니다.]
그 광경에 이하린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순식간에 냉철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정말 필요 없었네요.”
“그렇습니다.”
내 부상이 심각했던 만큼 그녀의 걱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만, 오히려 난 이하린이 걱정될 수준이었다.
그녀는 죽으면 곤란한 사람이었고, 시험의 난이도가 내 생각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
그래도 상황이 전개되자 순식간에 변한 표정과 태도를 보니 다소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애당초, 원작의 이하린은 알아서 합격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다른 곳에 있었다. 목표로 제시된 건 오직 한가지.
‘스스로를 증명하라.’
마수와 싸우는 게 목적이 아니란 말인가? 스스로를 증명하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조금 의아했다.
시련의 목표를 고민하는 사이 또 다른 마수가 내게 달려들었다. 방금 전의 녀석보다 더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HyyyaaaaAK!
‘일단은 이것부터.’
내 눈이 마수를 응시했다.
형체는 인간을 토대로, 크기는 3m.
표면의 형상은 끊임없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건 이 세계에 도달하고 처음으로 상대했던 마수와 동일한 특징.
‘부정형 마수인가?’
이 녀석은 쉽게 죽지 않는다.
나는 지난번 경험을 통해 그걸 깨달았다.
부정형의 마수는 그림자처럼 몸을 변형시키며 끊임없이 몸을 재생할 테니 말이다.
-HYAAAAAAKKKK!!!!
그렇기에 검기가 아니면 사살하기 어려운 마수였지만 지금의 내겐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