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주인공 (3)
물론 이 세계로 오게 된 게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애시당초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부분을 신경 써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다시 한 번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상태창.”
[유천하 踰天遐]
특성 : 無
등급 : 각성자
칭호 : 無
가호 : 無
업륜 : 無
*특성이 개화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떠오른 반투명한 문자. 그중에서도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특성.”
기억에 따르면 특성이란 만상세계가 각성자에게 부여한 특별한 능력이었다. 그 종류는 개개인에 따라 여러 갈래로 구분된다.
누군가에게는 재능, 누구에게는 특별한 기술, 혹은 어떤 이에게는 단순한 육체적 특징이 되기도 하는 힘.
‘원작의 특성은 뭐가 있었지···?’
나는 원작 주역들이 보유했던 특성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검에 대한 초월적인 가호, 만물의 요소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힘, 원소를 다루는 권능 혹은 불사에 가까운 특성 등.
여러 특성을 떠올려본 나는 다시금 눈앞의 글자로 시선을 옮겼다.
*특성이 개화하고 있습니다.
“개화 중이라···.”
아직 특성이 개화하진 않았지만, 어떤 능력이 주어지든 분명 내게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특성이나 가호 등, 만상세계의 요소는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큰 전력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주어졌다는 게 중요해.’
교에서의 마지막 싸움- 그곳에서 그렇게 수세에 몰리게 된건, 결국 내 무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내가 단련을 소홀히 한 것도, 재능이 부족한 것도, 무공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공’과 ‘경지’라는 요소는 재능과 노력만으로 메꾸기에는 너무나 정직했던 탓.
특히 그 무엇보다도 내공.
천고의 영약을 밥 먹듯이 먹는 게 아닌 이상, 무인의 내력은 그 세월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내게 부족했던 건 내공이었고, 또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겐 그 시간이 주어졌다.
‘적어도 여기엔 내가 힘을 쌓기 전에 죽이려는 녀석은 없으니까.’
무림에서의 일을 떠올린 나는 잠시 이를 악물고 고개를 휘저었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그런 게 아니야- 스스로를 다잡았다.
“······.”
나는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시 한 번 몸 상태를 관조했다. 두 눈을 감고 내기를 순환시키자 스스로의 육체가 느껴졌다.
먼저 내공부터 확인했다.
‘남아있는 공력은 3할.’
한계까지 소모되었던 공력은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도 운기조식에 집중해 회복을 도모한다면 하루 안에 다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혈도는··· 시간이 필요하겠네.’
혈도는 조금 심각했다. 내력운용에 신경 쓴 만큼 찢어지진 않았으나 한계까지 혹사당해 아직도 쓰라림이 느껴진다. 아마 몸을 갈라 확인해보면 혈도가 몇 배로 부어있지 않을까? 아마 그럴 거라 확신했다.
‘그래도 근맥이 상하진 않았어.’
몸 여기저기에 새겨진 자상은 많았으나 다행히 힘줄이나 근맥이 잘려나간 부분은 없었다. 그저 찢기고 부어올라 온몸의 근육이 파열됐던 여파가 남아있을 뿐이다.
‘외상은 대부분 치료된 상태고··· 내상까지 완전하게 돌아가려면 몇 주는 더 있어야겠군.’
그렇게 육체를 관조한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려보았다.
“······.”
중요한 건 원작을 따라가는 것.
그로서 이하린에게 정보를 알아내는 것.
그리고 강해지는 것.
그 모든 걸 충족시킬 방법은 분명 존재했고, 그걸 위해서 내가 향해야 할 곳은 한 곳.
‘우선은 등천회랑.’
나는 그곳에 가야 했다.
***
이하린은 잠시 옥상에 나와 있었다.
막 깨어나서 그랬던 건진 모르겠다만 유천하의 상태도 미묘했고, 그가 갑작스레 건넸던 제안도 조금 얼떨떨했던 탓이었다.
‘왜 같이 가자고 한 걸까······.’
그렇게 잠시 바람을 쐬고 있자니 손목에서부터 웅웅- 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이하린은 스마트워치를 내려다보았고 익숙한 이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아. 마침 잘됐네.
이하린은 전화를 받았다.
“···네. 티르유씨!”
[하린. 아직도야?]
역시나 받자마자 상대- 티르유 아르파냐는 그것부터 물어왔다.
“아니요. 방금 막 정신을 차렸어요. 근데 아직 후원 이야기는 못 꺼냈어요···.”
[아. 깨어났구나. 그럼 괜찮으니까 천천히 설득해봐. 그래도 순례자의 길 기한 전에 깨어나서 다행이네.]
“그렇죠? 조금 조마조마하긴 했는데 다행히 시간은 맞을 것 같아요. 근데 그거랑 관련돼서 마침······”
이하린은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네. 이상한 녀석이면 순례자의 길에 간다는 말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애초에 블랙리스트에도 기록이 없었잖아.]
“······그렇긴 해요. 애초에 마수랑 싸우다 그런 부상을 입은 사람이니까요.”
[마침 정기회의에서도 그 얘기가 나왔었어. 하린이 네가 보낸 토벌기록도 같이 올라왔었거든.]
“아. 정기회의에서요?”
얘기가 나올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예상보다 빠르네. 이하린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응. 물론 처음 말을 꺼낸 건 나였지만 녹화된 장면만 봐도 어지간한 유망주급은 돼 보였으니까.]
“그렇긴 해요.”
참고로 침식방어전을 치르는 연맹군 헬멧에는 규정상 액션캠이 필수로 부착되어 있었고, 공략자라면 누구나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침식현상이 갈수록 더 심화되고 있는 만큼 인류의 경계심 또한 같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티르유 또한 그날의 기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걸 예상하고 나한테 말해준거 아니었어?]
“······하하.”
침식역류가 터졌던 그 날. 이하린은 티르유에게 자신이 본 장면을 얘기했고, 당연히 티르유는 그녀의 기록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각성자가 A급 마수를 일격에 토벌한다?
그건 저 등천회랑의 생도 중에서도 최소 유망주급은 되어야 가능성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티르유는 그 날 바로 연맹의 녹화기록을 열람했다.
유천하가 보여준 전투는 정말 깔끔했다.
전투의 효율을 따지자면 그야말로 최적. 최대한 공격을 흘리며 마수의 호흡을 간파하더니 일격으로 마수의 핵까지 갈라버렸다.
심지어 그의 몸 상태는 정상도 아니었다.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골목에서 뛰쳐나와 부정형 마수를 베어 넘기고, A급 마수까지 토벌한 채, 기절하는 순간까지 검을 휘두르던 모습.
그건 정말이지 그녀가 생각하는, 그리고 그녀들이 소속된 기관- 등천의 구도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략자의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정도 포텐셜을 갖고 있는데도 연맹 데이터베이스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고, 그렇다고 다른 기관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블랙리스트에 등재돼있는 것도 아니잖아?]
“네. 그랬죠···?”
[그래서 다들 정식으로 후원해주는 것 까진 만장일치로 찬성했어.]
“아. 티르유씨가 아니라 아예 등천의 구도자 차원에서 후원을 하는 걸로요?”
유천하의 기록을 본 티르유의 머릿속에 후원이 떠올랐던 것도, 기록을 검토한 등천의 구도자에서 이런 결론이 나온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애초에 특성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부정형의 핵을 한 번에 가른 것도 그렇고, A급 마수를 일격에 죽인 것도 그렇고. 방치하기에는 아까운 재능이잖아?]
“네. 제대로 된 지원만 이루어지면 분명 등천자까지는 빠르게 도달할만한 실력이었어요.”
[맞는 말이야. 그러니까 헌터 같은 게 되기 전에 빠르게 길을 제시해줘야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이하린의 얼굴 위로 쓴웃음이 올라왔다.
자신이 쓴 설정이 이런 식으로 다가온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던 탓이었다.
“기절하는 순간까지 마수와 싸우려 한 사람이에요. 그럴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긴 하지.]
이하린은 적당히 말을 돌렸다.
“···아! 그리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대화하면서 보인 태도만 봐서는 저희가 예상했던 게 맞았나 봐요.”
[응? 아. 은거 문파···?]
“네. 중국지역 접경지 쪽에는 설정, 아니 지역 특성상 은거한 무인들이 아직도 꽤 있는 편이니까요.”
잠시 말이 헛나왔지만 빠르게 정정한 이하린은 기억 속을 되짚어 보았다.
은거 문파와 관련된 부분은 그녀가 직접 설정했던 부분인 만큼 그쪽이 유천하의 배경이라면 개연성 상에서도 납득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가능성은 있어. 이면순례자 같은 기관에도 등록이 안 돼 있는 각성자라면, 정말 세상에 처음 나온 사람일 테니까 말이야. 뭐··· 그런 인간들이 키워냈다기에는 실력이 좋아서 의문이지만.]
“······아.”
[그럴 기력이 있으면 탑이라도 하나 더 공략할 것이지···. 어쨌든 그러면 컨택은 진행해줘. 순례자의 길은 같이 도전해도 괜찮겠지?]
“으음··· 네···! 그러면 그렇게 해볼게요.”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어려울 것 없는 제안이었다. 같이 시련에 도전하러 가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고민을 한단 말인가?
그저 그녀가 느끼는 심리적 부채감이 그 제안을 조금 떨떠름하게 느끼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
유천하는 기절하기 직전까지 마수를 향해 적의를 불태웠고, 그 적의가 어디서 기인했는지는 이하린으로선 알 수 없는 부분.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까지 마수를 베어내려는 마음가짐은 결코 쉽게 생길만한 게 아니었다. 높은 확률로 그럴만한 과거를 갖고 있는 거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는 그런 세계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유천하를 바라보며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그 과거에는 그녀의 과실이 담겨있을 테고, 그녀는 그걸 외면할 수 없었으니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 이하린은 빙의자였으니까.
이 세계를 직접 집필했던 원작자였으니까.
그렇기에 이하린은 창조주로서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일말의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소설 속 장치로 써내려간 설정들은 이 세계에서 실체를 갖춘 불행으로서 자리하고 있었고, 이 세계에 야기한 불행은 모두 그녀의 손으로 써내려간 것이었으니까.
그런 이유였다.
그렇기에 황폐해진 도시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도, 병상에 누워있던 유천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도 이하린의 마음은 심란해졌던 것이었다.
[응. 그러면 수고해줘. 인류에겐 한 명의 공략자라도 더 필요하니까 말이야.]
“······네. 알겠어요.”
그렇기에 이하린은 마음을 다잡았고.
[고마워. 그럼 다음에 봐.]
“아니에요. 티르유씨도 수고하세요···!”
그래,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그런 게 아니야. 정신 차리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
계획의 구체적인 방향성이 잡혀갈 때쯤 이하린이 다시 병실로 돌아왔고, 그녀는 다소 심란한 표정으로 내게 대답했다.
“일단 아까의 대답부터 드리자면······ 네. 같이가요···!”
“아. 감사합니다.”
“대신 몇 가지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리고는 내게 양해를 구해왔다.
“우선 천하씨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자세히 말입니까?”
“네···! 신원이 없긴 하지만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것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신원 없는 사람 정도야··· 그렇잖아요? 특히 이 지역에는 그런 분들이 꽤 많기도 하고요.”
“예. 그렇지요.”
“그래도 혹시 따로 소속된 곳은 없는지, 어떻게 그런 상황에 처해있으셨던 건지가 조금 궁금해요···!”
이 정도는 이미 예상한바.
딱히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조금 오래전의 과거부터 이야기해드려야 될 것 같군요.”
“······오래전이요?”
나는 아까 전, 이하린이 했던 착각과 기억 속에 떠오른 설정을 버무려 간단한 배경을 지어낼 수 있었다.
이 세계의 특성상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어릴 적의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침식지역에 버려진 저를 스승님께서 데려다 키워주셨다 하더군요.”
“아···.”
“그렇게 스승님의 손에 사문의 비처에서 키워지면서 저는 스승님의 무맥을 잇기 위해 일인 전승의 무예를 계승해왔고······”
그렇게 적당히 지어낸 과거는,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흘러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