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주인공 (2)
문득 머리 한구석이 간지러워졌다.
갑자기 떠오른 의구심에 전생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고, 아까 흘려들었던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조합되기 시작했다.
‘등천회랑 입학 원서접수 기간이······ 기원학회에서는···’
‘갈수록 심화되는 침식현상에 걸맞는 공략자양성 비전을···’
거기에 이 세계에 도착하고부터 보고 들었던 정보들까지 같이 얽혀 들어갔다.
‘각성자, 만상세계, 마수, 등천회랑.’
어딘가 익숙했던 어감.
낯설지 않은 배경.
‘아.’
그러면서도 무언가 익숙했던 요소들.
“사실 신원조회가 전혀 안 되시길래 저희 측에서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긴 했어요. 이 근처에선 그런 분들이 종종 나타나니까요.”
오래전, 지금에 와서는 정말 오래전 일이 되어버린 옛날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마치 벼락을 맞은 느낌.
“역시 중국지역에는 아직 그런 곳이 많나 보네요. 은거한 채 수련하는 무인들도 많다 설, 아니 얘기 듣긴 했는데···”
그건 정말 오래전의 기억이었다.
죽기 전에 읽고 있었던 어떤 이야기.
하지만.
“잠시만요.”
“···네?”
확실하게 기억나는 한 이야기.
“······이름이··· 이하린이라 하셨습니까?”
“네. 저는 이하린입니다··· 만 갑자기 왜 그러세요···?”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그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당황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만 봐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표정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황급히 되새겨보았다. 내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린씨는 혹시 등천회랑··· 이란 곳에 가실 생각이십니까?”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아···! 하긴 이 시기에 순례자의 길에 도전한다면 그것밖에 없겠네요.”
“······.”
······이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수많은 기억과 정보가 휘몰아치며 가라앉았다 떠올랐다를 반복했다.
‘만상세계.’
나는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 환생자였다.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던 중 급작스럽게 죽었던 ‘나’는 중원 무림의 천마신교 소교주 ‘유천하’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한번 죽음을 겪었고,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얻었다.
그랬다.
나는 새로운 세계에 환생한 것이었다.
‘······아니.’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에는 어떤 기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만상세계, 등천회랑, 각성자···.
그리고 이하린.
‘······이거 그거잖아.’
전생에서 유행했던 소설의 내용.
죽기 직전까지 즐겨 읽었던 한 이야기.
완결을 기다리다 몇 번이나 다시 읽었던, 정말 말 그대로 죽기 전까지 읽고 있었던 한 소설. 그렇기에 머릿속에 똑똑히 남아있던 이야기.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명칭들.
‘······설마.’
그 모든 건 한가지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반대로 너무나 정확히 들어맞는 상황. 그렇기에 내 머릿속에는 한가지 가설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하.’
새로운 세계에 태어나는 걸 환생이라 한다면, 소설 속 세계에 들어오게 된 이 상황은 도대체 뭐라 불러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내가 겪었던 건.
‘소설 속 주인공.’
환생이 아닌 빙의였나보다.
***
<소설 속 주인공>
전생의 내가 죽기 직전까지 읽고 있던 한 소설의 제목이자 장르문학계에 빙의물을 유행시켰던 작품.
지금에 와서도 번뜩 떠오를 정도로 소설의 내용은 간단했다.
한 소설을 집필했던 작가가 ‘어떤 메시지’를 받고 얼떨결에 자기가 썼던 소설 속으로 들어와 활약하게 되는 이야기.
“···저기요? 천하씨?”
소설 속 엑스트라에 빙의된 작가 ‘이하린’이 ‘주인공’이 되어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성장하고, ‘원작’을 따라가며 다양한 사건을 겪는- 그런 이야기.
그렇다.
“괜찮으세요? 상태가 아직 안 좋아 보이시네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금 내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하린씨?”
“네. 혹시 머리가 아프신 건가요?”
“아··· 예. 조금··· 그렇군요.”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진심으로 머리가 깨져버릴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환생도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내게 중원은 새로운 세상이었고, 그렇게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나는 ‘유천하’로 자라왔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 내 삶의 장르가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걸 체감했다.
“이제 막 깨어나셨으니 무리하지는 마세요. 조금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예.”
아니, 아직 검증해야 할게 남아있었다.
내 기억 속 내용과 이 세계의 정보가 매우 높은 일치율을 보이고 있었지만, 아직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으니까.
조금 더 제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
“······?”
이걸 정말 말해야 되는 걸까.
결심이 무색하게도 그런 고민이 들었다.
“······.”
물론, 이것보다 확실한 확인사항은 없겠지만··· 솔직히 입 밖으로 ‘그 단어’를 꺼낸다는 게 너무나 낯설고 불쾌했다.
그렇게 잠깐 이성과 감성이 격렬하게 사투를 벌였고 언제나 그러했듯, 이성은 승리했다.
확인은 빠를수록 좋았으니까.
그런 이유였다.
“사··· 상태창.”
“어?”
[유천하 踰天遐]
특성 : 無
등급 : 각성자
칭호 : 無
가호 : 無
업륜 : 無
*특성이 개화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외쳐본 말.
아니나 다를까 떠오른 글자를 바라보며 나는 매우, 매우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정말 여러 이유로 복잡했다.
“지금 혹시···? 각성자 등록이 돼 있으셨던 건가요?”
“······예. 그랬네요.”
“······네?”
사실 이 모든 게 환상은 아닐까?
검혈마제의 비열한 수작에 당해 사악한 마공에 농락당하며 비참한 환상을 경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죽어가는 도중 마지막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원통하게 죽어가는 와중, 내 정신이 만들어낸 도피처는 아니었을까?
내 인지를 넘어선 일에 온갖 부정적인 가정이 휘몰아치며 수많은 상념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건 아니야.’
내가 연마해온 무공이.
내가 갈고닦았던 감각이.
그간 쌓아왔던 수많은 경험이.
이 모든 게 현실임을 가리켜주고 있었다.
적어도 눈앞에 떠오른 이 반투명한 창만큼은 너무나 확실한 증거였다. 나는 내 ‘눈’을 충분히 신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아까부터 다소 초점이 엇나간듯한 내 모습에 이하린의 얼굴 위론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이 사람은 아까부터 왜 이러는 거지?-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
그 순진무구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목구멍 까치 솟구치는 말을 초인적으로 집어삼켰을 따름이다.
‘주인공.’
이게 현실이라면, 그리고 내 기억이 맞았다면 눈앞의 이하린은 이 세계에 빙의한 ‘작가’이자 ‘주인공’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주 무대는 ‘등천회랑’이라 불리는 국제 초인 교육기관. 그리고 원작의 프롤로그가 시작된 시점은 이하린이 이 세계에 빙의한 순간이었다.
그게 아마 등천회랑 입학 2년 전쯤이었고, 작중의 이하린은 등천회랑 입학 직전에 가서야 ‘순례자의 길’에 도전했었다.
그리고 아까 전, 이하린은 이제 곧 ‘순례자의 길’에 도전한다 말했었다.
그렇게 방금의 대화와 내 기억을 교차함으로써 나는 원작과 지금의 시기를 대략적으로나마 예상해볼 수 있었다.
그 말은 즉.
‘지금은 원작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그녀가 이 세계에 빙의한 지 벌써 2년이 지났다는 소리였다.
“하린씨는.”
“네?”
“······.”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당장 이 세계에 대해서, 빙의라는 현상에 대해서, 차원의 벽을 넘는 방법에 대해서.
너무 많은 말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정신 차려.’
하지만 삼켰다.
내가 아는 건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었지, 현실의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다른 누군가를 신뢰하여 비밀을 털어놓기에는 내가 지나쳐온 세월이 그리 평온하지도 않았고, 환생과 빙의는 그렇게 쉽게 털어놓을 만큼 가벼운 비밀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어려운 문제였고, 대답은 간단했다.
“······하린씨는 이제 곧 순례자의 길에 도전하실 예정이라 하셨나요?”
이 상황이 환상이 아닌 실제라면.
눈앞의 그녀가 내가 기억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면.
“음.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서 바로는 아니고··· 그래도 곧 가지 않을까요? 뭐 그 할 일도 이제 곧 해결될 거 같기는 한데···.”
내가 해야 할, 그리고 달성해야 할 앞으로의 목표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순례자의 길에 도전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어? 정말요···?”
“예. 그래서 말인데···.”
소설 속 빙의자 이하린.
그녀의 목표는 원래 세계로 귀환하는 것.
그리고 천마신교 소교주 유천하.
내 목표 또한 원래 세계로 귀환하는 것.
서로가 생각하는 세계가 비록 다른 세계 선에 위치해 있을지언정, 원작에서 묘사된 내용대로라면 그 방법은 동일할 것이다.
그리고.
“저도 하린씨와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이 세계에서 그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
‘···그, 그 부분은 한번 고민해볼게요!’
몹시 당황스러워하며 바깥으로 뛰쳐나가던 이하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내 제안이 생각보다 의외였던 모양.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시답잖은 궁금증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내 관심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다시 한 번 확인해보자.’
우선- 한 번 더 확인해봐야 할 건 이곳이 정말 <소설 속 주인공>의 세계가 맞는가. 그것이었다.
다행히 내가 있는 병실은 상당히 좋은 곳이어서 그런지 태블릿 디바이스가 따로 구비되어 있었고, 그걸 통해 나는 웹에 접속할 수 있었다.
그렇고 몇 가지를 검색해 본 후.
“···더는 부정할 수도 없네.”
나는 마지막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기억 속 내용과 일치하는 정보를 찾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등천회랑, 승천자, 심연의 탑.
그리고 몇몇 주요 인물들까지.
대략적으로 떠오른 정보들을 그대로 검색해봤고, 그 모든 게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이제는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속··· 이라니.’
애초에 의아하긴 했었다.
무림이라니. 그런 이야기에나 존재할법한 세계가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무림에 환생하는 것도 일종의 소설의 클리세중 하나였던 만큼 의아함을 느끼지 못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죽었다는 것도,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 그렇기에 나는 새롭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그에 맞춰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젠 새로운 선택지가 나타났다.
‘무림의 삶도 소설 속 세계관에 포함된 건가? 아니면 만상세계에 넘어오면서 새롭게 소설 속으로 빙의한 걸까···?’
이 부분은 내가 확언할 수 없는 요소였다.
원작의 내용을 고려해보면 차라리 무림과 이곳 모두 소설에 나오는 ‘만상세계’에 속해 있다 가정하는 게 더 알맞아 보였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없는 부분.
그렇다면.
혹시 내가 겪어온 삶도 어떠한 소설 속에 포함돼있는 이야기였던 걸까?
‘···소설, 소설, 소설.’
지나온 기억들을 차근히 되짚어 보았다.
내 삶은 거짓되었던가?
그건 결코 아니었다.
‘무인의 삶은 투쟁이다.’
‘천하야··· 나아가거라.’
‘대주님. 시간이 없습니다.’
새로 쌓아가던 시간들은, 그 기쁨과 슬픔 들은 온전한 나의 것이었다.
‘이제는··· 내가 천마다!!’
복수를 향한 원망과 분노 또한 나의 것이었다.
중요한 건 이 세계가 소설 속인가, 내 삶이 소설에 적힌 글 줄기에 불과한가,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내 의지대로 삶을 살아왔고, 또한 행동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중요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걸 고민해봐야 했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천하야.’
시간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야한다.
이제껏 항상 부족했던 게 시간 아니던가.
내 목표는 간단했다.
강해지는 것과 돌아가는 것.
그리고 두 개의 길 끝엔 필연적으로 복수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
그러므로 나는 그걸 위해서 오래전 기억들을 최대한 끄집어내야 했다.
이곳이 소설 속, 아니 <소설 속 주인공>의 세계라는 건 확실히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원작의 요소들과 주인공이 존재하는 이상 미래 또한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터.
‘원작의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 떠올리자.’
나는 조각난 정보들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주인공 ‘이하린’이 겪게 되는 일들.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주요 사건들.
그리고 그걸 통해 얻을 수 있는 요소들.
전생에서 죽기 전까지 몇 번이나 읽었던 소설이었기에 대략적인 정보는 쉽게 떠올랐다.
“······쯧.”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필 결말까지는 보지 못했어.’
참고로 <소설 속 주인공>은 한창 인기를 끌던 중 후반부의 클라이맥스에서 연중을 선언한 소설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하루아침에 멈춰 섰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생의 나는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결말까지의 이야기는 알지 못했고, 이하린이 결국 원래 세계로 돌아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
하지만 확실히 기억나는 건- 작중작의 집필자였던 이하린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위해 ‘원작’을 따라갔다는 것이었다.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원작의 이하린은 차원의 벽을 넘어서기 위해 어떤 조건을 클리어하며 수많은 사건을 겪었고, 해결했다.
그렇다면 내게 중요한 건 이하린이 알고 있는 방법과 조건들. 그걸 알아내는 것.
‘일단 우선은···.’
그 사실을 상기하며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하나씩 짜 맞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