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4화 (4/205)

소설 속 주인공 (1)

내 정신은 기묘한 부유감과 함께 서서히 깨어났다. 몽롱한 감각 속에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N 뉴스입니다. 2차 외곽 영역선 일대에 다량의 침식역류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세계침식의 징조가 아닌지 우려를······>

눈꺼풀이 무거웠다.

묵직해진 육체 너머로 어딘가 익숙한, 그러면서도 낯선 기분이 들었다.

<······등천회랑 원서접수 기간이······ 입학식 일자가 공지되었······ 또한 기원학회에서는······>

살랑거리는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약간의 소음, 그리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흡 사이로 들어오는 공기는 따스했고, 또 아늑한 느낌.

<······순례자의 길 도전자가 꾸준히 늘어나는 와중······>

어쩐지 일어나기 싫은 기분이 들었다.

나른한 오후의 늦잠과도 같이 늘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일과를 늦게 시작할수록 곤란해지는 건 나였기에 나는 천천히 생각을 건져 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방에서 수면을 취했었나?

아니, 그럴 여유는 없었을 텐데···.

지금 내 상황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이미 기울어진 힘의 균형은 터지기 직전의 화산과도 같았기에, 나는 그에 대비해야 했다. 그렇기에 나는 검혈마제를 상대로···.

아.

“···!”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순식간에 기감이 열리며 둔해진 감각 너머로 상황을 파악했다. 동시에 눈으로 기의 흐름을 관찰하며 위험요소를 탐지했다.

“···여긴?”

그러자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아늑한 흰색의 공간. 약간의 알코올 냄새와 함께 들려오는 백색소음. 창가를 타고 넘어오는 상앗빛 색채.

내 눈앞엔 굉장히 익숙한.

그러면서도 낯선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병원이라고?”

정확히는 1인용 병실로 추정되는 곳.

벽 한쪽에는 TV가 걸려있었고, 창틀에는 블라인드가 절반가량 처져 있었으며, 내 몸은 침대에 고이 뉘어져 있었다.

<연맹에서는 위 사안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표명했습니다. 갈수록 심화되는 침식현상에 걸맞는 공략자 양성 비전을 제시하였고, 이에 따른 지원사항으로······>

명료하게 들려오는 뉴스 소리.

TV에서 들려오는 정보를 차곡차곡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나는 천천히 상태를 점검했다.

팔을 내려다보니 링거가 꽂혀있었고, 몸 이곳저곳에 났던 상처는 모두 붕대와 거즈로 뒤덮인 상태.

나는 천천히 내기를 순환시켰다.

‘아무래도 치료를 해준 모양인데···.’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몸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떠오른 생각이었다.

기절 직전의 몸 상태는 꽤 심각했었다.

자연적으로 회복되려면 몇 달은 요양했어야 했고, 치료를 받더라도 꽤 긴 시간을 투자했어야 할 부상.

하지만 지금 운기를 하며 몸 상태를 점검해보았더니 대부분의 부상이 상당한 수준까지 치료된 상태였다.

아직 내상이나 혈도까지 온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기절하기 직전의 처참했던 상태를 떠올려보자면 큰 차이가 느껴졌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던 걸까.

조금 곤란한 심정을 느꼈다.

‘아니, 그것보다 여기는 도대체.’

어느새 광고로 전환된 TV를 바라보며 나는 빠르게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방금 전 TV에서 들려오던 이야기들과 기절 직전까지 파악했던 정보들.

만상세계, 총소리, 도시, 괴물, 각성자.

그리고 이제는 TV에 병원까지.

‘일단은··· 확실히 현대에 가까운 모습이야.’

큰 차이점이 있고, 신경 쓰이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만 기본적인 문명 수준은 전생 때 겪었던 현대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이 세계에 오게 된 후 듣게 된, 그리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들려왔던 목소리를 떠올려 보았다.

‘만상세계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만상세계의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만상에 유천하의 이름이 등록됩니다.’

만상세계- 왠지 모르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어감. 무언가 떠오를 것 같은 기분 속에 휩싸였지만 제대로 된 정보가 부족했다.

‘만상세계가 이곳을 말하는 거였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치료를 해준 거로 봐서는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자꾸만 익숙한 기분이 드는 건 현대에 가까운 배경이라 그런 걸까? 전생과 비슷한 분위기라 그런지 자꾸만 긴장이 풀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곳의 문화, 사상, 가치관 등. 아직까진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았고, 치료를 받긴 했다만 온전한 몸 상태도 아니었으니 긴장이 풀리는 건 조금 곤란했다.

‘상태가 나쁘진 않다만···.’

어느 정도 회복이 되긴 했지만, 아직 혈도와 내상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 상태로 총화기 같은 무장을 상대하는 건 무척 피곤한 일이었고, 흘려 들었던 ‘각성자’라는 개념도 경계되는 요소.

‘역시 정보가 필요해.’

그러던 와중, 병실 바깥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만일을 대비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곧이어 병실 문이 열렸다.

그러자 딸칵- 소리와 함께 들어오는 소녀.

“어?”

“······.”

“···일어나셨네요!”

작은 키에 어려 보이는 얼굴.

기절 직전 마주쳤던 소녀였다.

그녀가 나를 병원에 데리고 온 걸까?

“···이틀 동안 정신을 못 차리셔서 조금 걱정하고 있었어요!”

‘이틀인가.’

그 말을 새겨들으며 나는 천천히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소녀의 흑단처럼 검은 긴 머리카락은 다소 창백하게 보이는 백색의 피부와 대비되어 그 색을 주변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전체적인 느낌은 토끼 같은 인상. 순해 보이는 얼굴은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쓰러지셨을 때 상태가 좀 심각하셨거든요···.”

“······.”

조금 소심해 보이는 인상과는 대조적으로 등에 미어져 있는 기다란 장검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체격에 비해 다소 커 보이는 검이었지만 그녀의 손에 배겨있는 굳은살을 보면 그 검이 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도는 일류쯤인가.’

기감으로 파악되는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 그래도 순례자의 길 기한도 얼마 안 남아서 초조한 참이었는데 다행이에요!”

‘순례자의 길.’

새로운 단어가 들려왔다.

왜인지 그 단어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알고 있는 정보가 부족한 만큼 우선 머릿속으로 그 단어를 새겨넣었다.

“······어··· 그···.”

그렇게 그녀에 대해 파악하며 말없이 시선을 보내고 있었더니, 계속 혼자 말하는 게 민망했던 건지 그녀의 입이 서서히 오므라들었다.

“······.”

“······.”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내가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자 조금 주눅이 들었는지, 그녀가 내 눈치를 보며 쭈뼛거렸다.

“······혹시 아직 말하기 힘든 상태신가요? 드리고 싶은 말이 몇 가지 있어서 그런데···.”

“아. 실례했습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머리가 조금 멍했군요.”

우선은 평범하게 대응하자.

내 몸 상태와 소녀의 수준을 가늠한 결과 위험요소는 없다 판단되었기에 나는 그리 결정했다.

“그것보다 쓰러진 순간의 정신이 조금 혼미한데,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 어디까지 기억하세요?”

“괴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던 것까지는 기억납니다.”

마지막까지 검을 휘두르긴 했으나, 마지막의 기억과 그 당시 몸 상태를 생각해보면 결과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내가 어째서 이곳에 와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신원도 없는 이를 이렇게 치료해준 이유가 무엇일까.

“음···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마수는 처리했고, 얼마 안 가서 침식현상이 끝났어요. 지금은 그때로부터 이틀 정도 지났고요.”

“그럼 소저가 저를 구해주신 겁니까?”

“소저···? 음··· 구해줬다고 하기에는 좀 민망한데···.”

이하린은 조금 민망한 듯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구조대를 부른 건 맞아요. 그치만 상세가 워낙 심각해 보여서 그런 거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생각해요. 부상이 정말 심하셨으니까요······.”

“···그럼 마지막에 나타났던 괴물은 어떻게 된 건가요?”

“아···! 그건 제가 처리했어요.”

“그렇다면 구해주신 게 맞군요.”

상황은 대충 파악되었다.

마수를 격퇴하고, 기절한 나를 병원에 데려와 치료한 것도 눈앞의 소녀가 한 일.

“소저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기절해버린 이상 내 목숨이 위태로웠던 건 사실이다. 하물며 그런 몸 상태로 정신을 잃었던 이상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다면···.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결과는 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겠지.

내 목숨은 싸구려가 아니었기에, 은원을 입은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어··· 소저··· 음··· 이하린입니다···!”

그녀- 이하린의 반응이 조금 이상해 보였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포권을 취하며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날의 구명지은(救命之恩)에 이 유천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구··· 명지은?”

내게 적의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대화가 통하는 상대에게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건 당연한 일.

그렇게 감사인사를 건넨 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당혹스러운 기색을 띄우며 두 눈을 깜빡거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구명지은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내 목숨값에 대해 별생각을 안 하고 있던 걸까.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 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상세가 위독했던 만큼 충분히 구명지은이라 할만한 일입니다. 저는 망은배의(忘恩背義)한 자가 아니오니 언젠가는 반드시 결초함환(結草啣環)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

“······?”

“뭐랄까 조금··· 말이···.”

“말이?”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상대의 반응에 잠시 의아했으나,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도 지금 내가 하는 말. 그리고 그녀가 하는 말은 만상세계란 신비한 작용에 의해 치환되고 있을 터.

차원 이동 후 들렸던 ‘언어 동기화’라는 개념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말투의 차이도 언어의 영역에 속해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 혹시 천하씨는 사회, 아니 속세에 처음 내려오신 건가요···?”

과연 무림의 말투와 현대의 말투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나는 그 차이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해졌다.

“말투가 조금 독특하신 것 같아서······.”

“······아.”

전생과 중원.

두 세계의 삶을 모두 겪어본 나였기에 그녀가 느꼈을 괴리감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아···! 제가 괜한 소리를···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이 몸에 배어 있는 건 중원의 한어였지만, 그렇다고 전생의 언어들을 까먹은 건 아니었다.

즉-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언어들만 해도 몇백 년의 문화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

‘언어 동기화’가 어떤 식으로 치환되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이곳에선 내 말투가 몇백 년 전의 말투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말투를 신경 써야겠군.’

그렇게 중요하지만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런 나를 바라보며 이하린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예상이 맞았나 보네요.”

“···?”

예상? 무슨 소리일까.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이내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잠시 자신의 스마트워치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조금은 의심스러운, 그리고 조금은 신기한 기색을 띄운 채로 내게 질문을 건넸다.

“천하씨는··· 그러니까 은거 무류 출신인 거죠? 그, 숨겨진 곳에서 순수하게 무공을 추구하며 수행하는··· 신비 문파 그런 곳?”

“······?”

난데없이 웬 신비 문파?

나름대로 익숙한 단어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각성자와 괴물까지는 이해했으나 도대체 이 세계는 뭐하는 세계길래 저런 말까지 나온단 말인가?

“그······ 인적이 드문 비처에서 무공을 수련하시면서 무맥을 이어가는 분들도 꽤 많다고 들었거든요···!”

현대배경에 ‘마수’가 등장하고, ‘각성자’라는 게 존재하며, 이제는 ‘문파’와 ‘무공’의 개념까지 튀어나왔다.

도대체 얼마나 뒤섞여 있는 세계인가.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게 무슨 소설도 아니고······ 음?’

그 순간 무언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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