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 (2)
지금까지의 정보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전장에서 들려왔던 소리 들을 조합했다.
‘Sir! 각성자 지원까지 5분 걸린답니다!’
‘재생속도를 못 따라가고 있습니다!’
‘각성자 올 때까지는 어떻게든 쪼아!!!’
‘···오러? 각성자다! 저 애 각성자였어!’
계속해서 재생하던 괴물을 떠올렸다.
검기에 베인 괴물의 반응을 목격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딘가 익숙한 단어.
오러Aura의 의미를 떠올렸다.
“···기氣!”
비록 각성자가 무엇인지,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괴물을 사살하는 데 기가 필요하다는 것!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우우우웅-!!
내면의 심상에서 매듭이 풀어져 나왔고, 남아있던 내력이 삽시간에 몰려들며 전신을 타고 휘몰아쳤다.
몇 번이나 더 휘두를 수 있을까?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이었고, 의념을 피워내기에도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격으로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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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은 괴물을 바라보았다.
색채를 빼앗긴 듯한 이형의 마수. 잿빛을 띤 부정형의 형상. 그 표면은 일렁거렸고 그림자처럼 일그러졌다.
검기에 베였던 절단면도 어느새 재생이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기氣가 재생을 방해한다는 건 이미 인지한 뒤.
-Trrrkkk···!!
그렇다면 어려울 것 없었다.
일격- 그 이상은 낭비.
-TrrRRRAAAA!!!
그렇게 괴물이 달려들었고.
스르릉-
한순간에 뻗어 나간 검은 그대로 괴물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섬전처럼 뻗어나간 검극. 그 궤적을 따라 내달리는 칠흑의 검기.
그 순간.
카륵- 퍼엉-!!!
괴물의 몸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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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
그 음성과 동시에 내 몸으로 미증유의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 양은 미약했지만 말도 안 되게 정순한 기운이 그대로 내 몸 구석구석으로 녹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방에서 내 몸으로 흘러들어온 따스한 기운은 혹사당한 혈도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이게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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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계속해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기운. 아까부터 귓가로 들려오는 음성.
그리고.
쾅-!!!
-KRRRRRRRAAAAAAKKK!!!!!
저 멀리서부터 포효소리를 외치며 뛰어오는 거대한 형상의 괴물까지.
-어, 어···!! 거, 거기!!!!
-마수가 그 쪽으로 간다!!! 조심해!!!
-기다려요!! 제가 갈게요···!!
모든 게 낯설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아무래도 가만히 상황이나 파악할 때는 아닌 것 같았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집채만 한 크기의 괴물. 이미 한번 괴물을 상대해봤기에 나는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좋지 않아.’
하나를 처치하니, 다시 하나 더.
끊임없이 일렁거리는 부정형의 그림자로 이루어진 몸체는 육중한 질량감을 토해내며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괴물과의 거리는 고작 30m.
속도를 생각한다면 앞으로 2초 후에 이곳에 도달하겠지.
괴물을 상대하지 않고 몸을 숨길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이미 괴물은 나를 인식한 상황.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번에도 일격으로 끝내야 해.’
내 정신은 그 즉시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피가 부족한 걸까, 아니면 한계인 걸까.
내력은 부족했고 검을 든 손마저 파르르 떨려온다.
‘한 번만 더 내력을 끌어올리면 정말 기절해버리겠군···.’
하지만 나는 이 상황에 내던져졌고, 나는 내 손으로 이 위기를 헤쳐나가야 했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저 괴물마저 베어버리면 그땐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만약 다시 또 괴물이 나타나는 걸까? 저 사람들은 무엇일까. 이곳은 어디인가. 그리고 이곳에서 정신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
이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저 녀석의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렇기에 기회는 단 한 번.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KRRRRAAAAA!!!
대기가 울리는 포효를 내뱉으며 달려오는 마수. 10m 남 찟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일격으로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
내 눈은 세계를 직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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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도 분명 재생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저 일렁이는 형체도 얼마든지 기이한 형상으로 변화하겠지.
아까 전 훔쳐본 전투에서나, 조금 전 상대한 괴물을 생각해서나 그건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본질이 물질과 벗어나 있더라도.
형상은 물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동물의 형상을 취했다면 그 움직임은 형체에서 파생된다. 육신이 존재하고, 관절이 존재하며, 형태가 존재한다.
그저 그 형태의 범용성이 넓어졌을 뿐.
경우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려울 거 없어.’
부정형의 움직임이라 한들 그 움직임의 규칙성은 무한이 아니었다. 한없이 무한에 가깝다 하더라도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은 분명 한정된다.
-KRrrrrk··· KRAAH!!
어느새 내 앞에 도달한 괴물.
달려드는 괴물의 육체를 바라보며 나는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내 눈은 괴물을 응시했다.
‘발의 위치, 형체의 유동성.’
나와 괴물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궤적.
수백 갈래로 나뉘어진 궤적 속에서 나는 최적의 경로를 찾아보았다.
내 몸이 가볍게 괴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내 모습이 짜증 났는지 괴물은 거친 하울링을 토해내며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KRAAAAH!!!
‘공격 직전의 행동, 시선의 방향.’
괴물의 움직임과 행동 양상부터 시작해.
소름 끼치는 악의로 가득한 기운.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의 근원까지.
내 눈은 그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머리에 있는 핵. 그걸 부숴야 해.’
다시 한 번 교차 돼가는 신형.
한순간에 느려진 세계 속에서 나는 쥐어짜 낼 수 있는 내력이란 내력은 모두 쥐어짜 검으로 흘려보냈다.
그 순간 심상의 매듭이 풀어져 나왔다.
아마도 이게 내가 뽑아낼 수 있는 마지막 내공일 테지. 날카롭게 정련된 의념의 칼날이 검극에 맺히자 시야가 조금 흐려졌다.
우우웅-!
검신을 따라 타오르는 흑색의 기화氣火
‘······.’
괴물과 가까워 짐과 동시에 의념이 타올랐다. 일격에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상황이었기에 실수는 용납할 수 없었다.
단 한 번.
한 번의 검격으로 저 거체를 베어내고, 머리 깊숙한 곳에 박혀있는 핵을 갈라내야 한다.
-KRRRRRRRRRRRAAAAAAAAA······
그렇기에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고.
그 순간.
천마신공 天魔神功
일천검결 一天劍結
제마검형 際魔劍形
‘섬혼마검 殲魂魔劍’
칠흑은 검극을 불태웠다.
퀴이잉-!!
***
휘둘러진 검에서 터져 나온 기의 불꽃.
뻗어진 검극을 중심으로 흩날리는 칠흑의 운무는 칠흑의 궤적을 자아냈다.
그 결과.
쿠우우우- 카륵!
마수의 거체가 한순간에 터져나갔다.
콰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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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으로 갈라진 마수의 핵.
그곳을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막대한 기운의 파동.
-오··· 신이시여.
-말도 안 돼···!! A급을 일격에 죽였다고?!!
-아니, 그것보다 부정형인데··· 장비도 없이 어떻게 핵을···?
-지금 그게 중요하냐 병신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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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들려오는 주변의 웅성거림도.
눈앞에 떠오르는 글자도.
그리고 다시 한번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미증유의 기운도.
모두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죽였······.’
그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비틀거렸다.
“큭··· 웁.”
우우욱- 순식간에 목구멍을 타고 역류한 핏덩이를 게워냈다. 내장에서부터 솟구친 메스꺼움은 짙은 혈향과 함께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했군.’
이젠 진짜로 한계였다.
하루 동안 검을 너무 많이 휘둘렀고, 혈도를 쥐어짰다. 무엇보다도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일반적인 내단법을 통해 수양을 쌓았더라면 이미 단전이 찢어졌을지도 모를 정도.
지금만큼은 천마의 후예라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콰아아앙!!
“···윽.”
멀리서 터져 나온 폭음에 다시 한 번 속이 울렁거린다. 귀에서부터 삐이- 이명이 들려왔다.
시야가 흐려진다.
‘······기절할 것 같군.”
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쓰러지면 안 되는 순간이었지만 이미 몸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저기요!! 괜찮으신가요?”
그 순간, 원래 마수를 상대하고 있던 소녀가 내게 다가왔다. 마수가 내게 달려들 때부터 뒤따라 뛰어온 모양이지만 마수는 이미 일격에 찢겨진 뒤.
아무래도 마수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늦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
흐릿해진 시야로 비치는 모습은 내 생각보다 더 어려 보였기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16? 아니 17?
잘해봐야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
이런 아이가 괴물을 상대하고 있던 건가?
문득 의아함이 머리 위로 떠올랐지만 그런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저기요!! 괜찮아요···?! 무슨 피가!”
“······.”
“······기요! 잠······ 으세요···?”
최대한 버티려고 해봤지만 무리였는지, 귀로 들려오는 소리마저 점점 뭉개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대로 쓰러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래도 괴물을 죽이는 걸 봤으니 함부로 대하지는 않겠지···.’
다소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자니 멍해진 귀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각성자··· 어! 저······!!!
-···잠깐··· 구해······!!
그 웅성거림에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앞.
소녀의 뒤에서 새로운 그림자가 몽글거리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
기껏 해치웠더니, 다시 한 마리가 더 나타나는 상황에 욕지거리가 올라올 것 같았다.
-kkkiiiilll···.
아까보다는 확연히 작은 크기로 형상을 갖춰가는 괴물을 보며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아니, 들어 올리려 했다.
‘······진짜 욕 나오는 군.’
하지만 더 이상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마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괴물은 어느새 완전한 형상으로 빚어지고 있었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제가······ 게요!
소녀가 뭐라 외치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자기가 상대하겠다는 걸까? 나를 구해 주려는 걸까? 도대체 왜? 그것보다 저 아이가 괴물을 이길 수 있을까?
그녀의 호의가 고맙긴 했어도 안심할 순 없었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처음 본 타인에게 내 목숨을 맡길 만큼 내가 지나쳐온 삶이 가볍진 않았으니 말이다.
‘······해보자.’
오늘 하루 동안 사지를 몇 번이나 지나쳐 온 걸까. 새롭게 찾아온 죽음의 형상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죽을 수 없지. 아직은···!’
내 의지와는 별개로 눈은 점점 감겨왔다.
하지만 피어오른 의념은 내 손을 움켜쥐고 검신을 들어 올렸다.
퀴이이잉-
그렇게 나는.
-KIAAAKKKKKKK!!!!!!
괴물이 내뱉는 증오 서린 외침을 들으며.
-···기! 조심······!
아득해지는 시야 속에서 검을 부여잡았고.
서걱!
그렇게 나는 검을 휘둘렀다.
-······!
***
[상황 종료! 상황 종료! 수호자 셧다운 확인! 침식역류 소멸현상 관측 완료. 잔류 마수 토벌을 그대로 진행하며, 연맹군은 규정대로 행동한다! 실시!]
황폐해진 도시로 울려 퍼지는 소식.
색채가 돌아오는 하늘 아래,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거리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전파사항을 들으며 소녀- 이하린은 구조대를 향해 거듭해서 요청하는 중이었다.
“이 분도 토벌에 참여한 각성자에요. 치유마법사를 동원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제대로 치료해주세요···!”
“예? 마법사까지요? 아, 혹시 이 분도 등천의 구도자 소속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치료비는 등천의 구도자 측에서 제공할 테니 다른 건 고려하지 말고 치료에만 전념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렇게 구조대에 남자- 유천하를 실어 보낸 뒤 이하린은 좀 전의 일을 되새겨보았다.
난데없이 골목에서 뛰쳐나왔던 순간부터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마수를 상대하던 모습까지. 그건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A급 마수를 일격에 토벌했어···.”
그 장면을 목격한 순간.
이하린은 숨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등급체계로 분류되는 급이라 한들 A급은 A급이었다. 당장 그녀만 해도 A급 하나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지 않았는가?
애초에 제대로 된 공략자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각성자의 실력으로는, 그리고 생도급인 그녀의 실력으로도 그건 불가능한 묘기였다.
“게다가 기절하는 순간까지···.”
유천하가 기절하고 나서, 마수를 베어 넘긴 이하린은 그 즉시 유천하의 몸 상태를 확인했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온몸에 자리한 자상과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피. 당장에라도 혈액 부족으로 쇼크사하기 딱 좋은 몸 상태에 이하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골목에서 뛰쳐나오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마수를 상대하고 있었던 걸까? 몸에 자리한 상처들은 결코 한 두 개체가 낼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허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소년은 그런 몸으로도 A급 마수를 일격에 베어냈으며, 기절하는 순간까지 마수를 향해 적의를 불태웠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외견에 그런 실력과 마음가짐. 그 정도면 분명 앞으로 이 세계에 큰 도움이 될만한 아이였다.
하지만.
“······.”
소년이 쓰러지던 순간 보여줬던 모습은 이하린의 뇌리에 깊은 화인으로 자리 잡았다.
도대체 이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도대체 어떤 아픔을 지니고 있길래 마수를 향해 그렇게까지 짙은 적의를 내비친 걸까.
“······.”
기절하는 순간까지 검을 휘둘렀던 유천하의 마지막 모습을 되새기며 이하린은 황폐해진 도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