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 (1)
삽시간에 휘몰아친 오색의 빛무리.
그 찬란한 눈부심은 영원과도 같은 찰나를 지나 사그라들었고, 그 순간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새로운 세상이었다.
색채가 빠져나간 잿빛의 하늘.
허공에 흩날리는 흰색의 눈송이.
그 사이로 보이는 회색빛 석재 숲.
그리고.
-KRRRRRAAAAAAHHHH!!!
-으, 으아아악!!!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만상에 유천하의 이름이 등록됩니다.]
[인과율의 특이점이 확인되었습니다.]
[대상자의 특성은 잠재되어 있습니다.]
[언어 동기화······ 18% 진행 중.]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공기가 차갑다- 몽롱한 감각 속으로 조금씩 싸늘함이 스며들어왔다.
“······여기는?”
이 선택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이미 환생이라는 기적을 경험한 뒤였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고, 미래를 기약할 방법이 없었기에 뛰어든 길.
하지만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
-What the fuck! hurry up!! where is Hunter! Where is Waker!
-Short on Hunter···! This··· fuck!
콰아앙!!!
“···윽!”
난데없이 터져 나온 폭음.
안 그래도 진탕돼있던 속이 울렁거린다.
얼얼했던 속이 흔들림과 동시에 싸늘한 한기가 폐부에 스며들면서 짜릿한 통증이 몸을 휩쓸었다.
‘···이러다 죽겠군.’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더니 정신이 혼미했다. 혈도는 한계 너머까지 혹사당했으며,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언어 동기화······ 87% 진행 중.]
-탄창! 탄창!! get me some ammo!!
-Sir! 각성자 지원까지 5분 걸린답니다!
-Shit! 좆같네 씨발!!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
귀로 들려오는 거친 욕설과 폭음.
거기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둔탁한 총소리.
무자비한 폭음이 위로 쌓이는 거친 화음은 내 귓가를 아리게 만들었다.
쾅-! 콰앙-!!
투두두두두!!!
···아니 그보다 잠깐. 총소리?
[언어 동기화······ 100% 진행 완료.]
[언어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차가운 음성.
무기질적인 안내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귓가로 들려오던 모든 소리는 익숙한 언어로 치환되었다.
-아니 시발!! 접경지에 각성자가 부족하다는 건 무슨 말이야!!
-헌터새끼들 의무태만이 하루 이틀입니까!! 하필 등천자가 공략하러 온 날 침식역류가··· 씨발!!!
-그 새끼들이야 떡고물이나 주워 먹으러 갔을 게 뻔하지! 개새끼들!!
콰아아앙!!
쉴 틈 없이 터져 나오는 포화 소리와 함께 눈에 보이는 이질적인 글자. 거기에 귀로 들려오는 익숙한 언어까지.
‘이게 대체···.’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 난데없는 상황.
나는 이 상황이 심히 당황스러웠다.
투두두두두!!!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지 이제 막 1분이나 지났을까. 나는 지끈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일단··· 환각은 아니야.’
환각이라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오감.
‘눈’에 들어오는 기의 흐름도 지극히 멀쩡했다. 하물며 검혈마제와 싸우며 만신창이가 된 몸도 그대로였고, 통증은 지독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생각하자.’
주어진 단서가 적더라도 나는 최대한 머리를 회전시켜 이 상황을 해석해내야 했다. 이렇게 계속 멋모르고 있다가 상황에 휩쓸려 죽을 순 없었으니 말이다.
‘만상세계···?’
나는 내 눈앞에 떠 있는 희미한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껏 계속 들려왔던 소리 들을 떠올렸다.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 두뇌가 도출해 낼 수 있는 수많은 가정 속에서, 나는 이 상황에 가장 적합한 이야기가 떠올렸다.
“······.”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내 이성은 한가지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차원 이동!’
일반적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이미 환생도 경험했던 마당. 그렇다면 차원 이동이라고 불가능할 건 없지 않은가?
콰아아앙!!!
“···큭.”
이 상황의 근본적인 원리인 ‘어떻게’를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조금 전’ ‘이 상황’을 ‘선택’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만상세계의 초대에 대답했다.
그리고 이곳에 도달했다.
-소대장님! 재생속도를 못 따라가고 있습니다!! 화력 부족입니다!!
-닥치고 다른 각성자들 올 때까지는 어떻게든 쪼아 이 새끼야!!!
그렇다면 지금 중요한 건.
이곳이 어디인가, 그런 게 아니었다.
-거기 아가씨!! 버틸 수 있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시발!!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연락 넣은 지 벌써 한참이나 지났습니다!!
투두두두두두!!!
콰앙-!!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터져 나오는 폭음과 총탄소리는 내게 메스꺼운 긴장감을 선사했다.
‘상황이··· 안전해 보이지 않아.’
이런 상황에선 차원 이동이고 뭐고 우선은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그게 중요했다.
‘무엇보다 몸 상태가 너무 최악이야.’
하물며 지금 내 육체는 이미 한계까지 혹사당해 처참해진 상태.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판국에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일신의 무력뿐이었다만, 지금의 내 전력은 정상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수많은 적들을 상대로 홀로 분투하고 있었던 터라 어쩔 수 없는 노릇.
“······.”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차원 이동한 지점은 전장과 조금 떨어진 으슥한 골목이라는 것이었다.
‘우선은 상황을 파악하자.’
나는 그사이에 몸을 숨긴 채 시가지를 내다봤다. 그러자 시가지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Krrrukk··· KRAAAA!!
투두두두두!!
쏟아지는 눈과 어우러진 잿빛의 도시.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올라간 건물들 사이에서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뱉는 칠흑빛의 그림자들.
그리고 작은 건물만 한 몸체를 꿈틀거리며 그 거대한 팔로 사람을 잡아다 찢어발기는 칠흑의 마수!
-끄··· 끄아아악-!!!
콰륵!
저 멀리서부터 붉은 안개가 터져 나왔다.
“···뭐야 저건.”
5m? 그쯤 되는 걸까.
조금 떨어진 거리였지만 나는 괴물의 크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KRRRRAAAAAAA!!!
저건 사람의 형상과 비슷했지만 절대 평범한 생물체가 아니었다. 온몸은 색채가 빠져나간 듯 시커먼 모습이었고 끊임없이 일렁거리는 표면은 불길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시끄러워.
-Krrrrrukk!!!
그런 괴물에 맞서고 있는 건 양손으로 칼을 그러쥔 작은 여인.
본인의 체구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는 소녀를 일련의 무리가 화기를 쏘아대며 지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침식 파동 분석 결과 떴습니다!! 등급은 황혼! 수호자급은 연맹에서 대처 중!!
-시발 황혼? A급이 왜 이리 많이 튀어나왔나 했더니!!
-3초 뒤 터트립니다! 아가씨! 거리 벌리세요!!
-네!!
쏟아지는 총탄세례에 파괴되면서도 끊임없이 재생되는 괴물을 바라보면서 나는 천천히 내기를 다스렸다.
그리고, 우선 대략적인 상황을 판단했다.
슉- 콰아앙-!!!
‘문명 수준은 최소 현대.’
시멘트와 아스팔트, 거리에 꽂혀있는 가로등. 거기에 기관총과 수류탄까지 목격했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저 괴물은 무엇이고, 그런 괴물과 칼 한 자루로 맞서고 있는 상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문명의 분위기는 현대.
그것도 전생의 삶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어이가 없군.”
설마 환생 전에 살았던 세계로 온 것일까? 아니, 내가 살았던 세계는 평범했다.
이곳에서는 이게 평범할지 몰라도 내가 알던 현대는 저런 괴물 같은 것도 없었고, 시가지에서 폭탄이 터져 나오지도 않았다.
“이래서야 명백히 이세···”
-TRrrrrhH···!
그 순간 느껴진 소름 끼치는 기운.
나는 즉각적으로 지면을 박찼다.
퓨슈슈슉!!
그러자 솟구치는 이형의 검은 가시들!
내가 서 있던 지면에서 튀어 올라 사방을 난자하는 그림자의 형상에 나는 섬 찟한 기분을 느꼈다.
“···!”
은신을 포기하고 즉각적으로 뛰쳐나가지 않았더라면 위험했을 상황. 계속해서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기에 즉시 반응할 수 있었다.
그러자 솟구친 가시들이 한데 뭉쳐지더니 그림자는 이내 일렁거리는 괴물의 형상이 되어 나를 노려 보았다.
-TRHhhhAKKKKK!!!
“······.”
괴물의 시야에서 전해져오는 들끓는 악의.
나는 곧바로 내력을 활성화했다.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이미 혹사당할 대로 당한 혈도에 미약한 진기가 흘러들어갔고, 본격적으로 내기가 돌아가면서 혈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
‘좋지 않아.’
이 상태로 천마신공을 얼마나 유지 할 수 있을까. 이대로 전투에 임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TRRrrraaaAAAAA!!!
내게 달려드는 잿빛의 마수를 바라보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 안 그래도 적아를 구분할 수 없고, 이 세계에 대해 파악하기도 전이었기에 함부로 행동하기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피해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지금의 내겐 그런 걸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일단은··· 눈앞의 상황부터 해결하자.’
그렇기에 검을 뽑아 들었고.
스르릉-
나는 마수를 향해 발을 박찼다.
***
시가지로 뛰쳐나오니 상황은 더 면밀하게 파악되었다. 건물의 형태, 거리의 모습, 육안으로 식별되는 수많은 구조물.
문명의 수준은 최소 21세기였다.
아니, 전생의 지구와 거의 흡사했다.
그렇다면.
-TRrrrrhhhh!!
피슈슉!!
21세기의 현대에서.
난데없이 골목에서 뛰쳐나와, 총탄이 난무하는 전장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기묘한 복장의 소년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보이게 될까.
-골목에 한 마리 더!
-씨발!! 하필 부정형 마수! 어서 사···! 응?
-잠깐! 10시는 사격 유지! 12시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저건?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칼을 손에 쥐고 살벌한 폭음이 난무하는 곳으로 뛰어든 사람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보이는 걸까.
“···후.”
여러 선택지가 존재했다면 나도 조심했겠으나, 그런 건 지금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맹렬한 살의를 내뿜으며 덮쳐오는 마수를 향해 나는 검을 휘둘렀다.
-Trrrrruk!!
퀴이이잉!!
서걱-! 거친 파육음이 터져 나오며 괴물의 다리가 베어졌다. 검을 타고 전해지는 감각으로는 일반적인 생물체와 큰 차이가 없었다.
조금 더 질기고, 탄력 있는 질감.
하지만 피해는 미미했다.
-T··· TRAAAAAA!!!!
‘일반적인 생물은 확실히 아니야.’
내 눈이 마수를 응시했다.
사족보행의 형상- 하지만 그 어떤 동물과도 닮지 않았다. 쭉 찢어진 입과 날카로운 이빨이 칠흑의 형상으로 뭉클거린다.
다시 한 번 놈이 달려들었다.
철걱!
‘재생···?’
한순간에 잘려나간 괴물의 앞발은 그 즉시 재생되며 그대로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공격을 피해냈고, 그 순간 부풀어 오른 괴물의 몸체가 포탄처럼 내게 쏘아졌다.
쿵-!!!
“큭!”
검신으로 받아 낸 동시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진다. 드드드- 떨려오는 검신. 막대한 질량감이 검신을 타고 내게 넘어온다.
울렁거리는 기운을 가다듬으며 괴물의 몸체를 팍-! 튕겨내자, 또다시 기이하게 변형되는 괴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상변화···? 성가셔.’
괴물은 형태가 존재하되, 액체로 이루어진 것처럼 몸의 일부를 자유자재로 변형시켰다.
-TRRrrraAAAAHH!!
괴물의 포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내 눈이 괴물을 응시했다.
“······.”
솔직히 말해서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낯선 세계, 낯선 상황, 낯선 적.
쓰러지기 직전의 몸 상태.
‘하지만.’
고작 이런 일로 고전할 만큼.
나는 나약하지 않았다.
-Trrrkkk··· TRAAA!!!
괴물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괴물의 신체는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다.
괴물의 형체는 거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 줌의 내기가 팔을 타고 내달렸다.
퀴이잉!!
일천검결 一天劍結
제마검형 際魔劍形
서걱!
찰나에 그어지는 검로 劍路.
-TRRRRRAAAAAAAAAAH!!!!
그러자 터져나오는 살벌한 외침.
괴물의 몸체가 한순간에 베어져 나갔다!
허공에 흩날리는 괴물의 몸체는 달려오던 그대로 베어져, 떨어져 나간 절단면에선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났다.
“······재생이 느려졌어?”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러? 각성자다! 저 애 각성자였어!
-어쩐지 왜 칼을 들고 다니나 했더니만! 근데 왜 저렇게 어려!
-닥치고 저쪽이나 쏴 병신새끼들아!! 무련출신이겠지!
“오러?”
상당히 익숙한 단어.
나는 그 즉시 사고를 가속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