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56화.
2.
“천천히 먹어. 체할라.”
“…….”
연선은 대꾸 없이 걸신들린 사람처럼 고기를 씹어 삼키는 무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다가 이게 무슨 짓인지.’
갑자기 들이닥쳐 숯불구이가 먹고 싶단다. 구워서 가져다준다는데도 마다하고 정원에서 이러고 있다. 그렇게 얼굴 보기를 소원하던 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들르고 있다. 그것도 밤낮 가리지 않고. 지금도 눈이 펑펑 쏟아지는 야심한 밤이다. 그런데 왜 아들을 보는 연선의 눈빛이 곱지 않은 걸까.
‘하다 하다 대리 입덧이라니, 쯧.’
연선의 시선이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향기에게 닿았다. 정확히는 동그랗게 모양이 잡히는 배에.
“향기야, 너 감기 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너라도 들어가.”
“가긴 어딜 가. 옆에 있어.”
고기를 입에 욱여넣던 무현이 향기의 손을 낚아채듯 잡는다. 삼키고나 말하든지. 향기가 삐죽 미소를 짓는다.
“안 들어갈 거예요. 어머니, 걱정 마세요. 시원하고 좋아요.”
퍽이나. 연선은 아들이 하는 짓을 보고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온실처럼 꾸며진 곳이니 걱정은 없지만 홀몸이 아니다. 연선은 다급히 잰 고기를 들고 나오는 아주머니를 물리고 그녀가 집게를 들었다.
새해 들어 향기가 집안에 큰 선물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한바탕 난리가 나고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때만 생각하면……. 연선은 고기를 구우면서 고개를 저었다.
본가에 와서 생전 안 그러던 향기가 늦잠을 자는 게 아닌가. 먹는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짚이는 게 있어서 물었더니 향기가 힘들게 입을 뗐다.
「임신한 거 같아요.」
「왜 말하지 않았니?」
무현이 때맞춰 촬영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임신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무현이 올라오면 얘기하려고 했단다.
「확실해지면 말씀 드리려고요.」
시어른들 몰래 향기를 데리고 병원에 들렀다.
임신 12주라는 의사의 말에 연선도 놀랐지만 향기가 더 크게 놀랐다. 평소 생리가 불규칙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거다. 두 달쯤 거르자 혹시 하는 마음에 테스트를 해 봤는데 12주나 됐다니. 그리고 이어지는 의사의 말에 연선은 쓰러질 뻔했다.
「두 녀석들 다 자리를 잘 잡았습니다.」
까만 점을 번갈아 짚어 보이며 벌써부터 존재감이 대단한 녀석들이라고 껄껄 웃는 게 아닌가. 집으로 돌아와 소식을 알리자 어른들이 기뻐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무현이었다. 제게 먼저 알리지 않은 게 서운했던지 겨우 만 하루지만 향기를 쳐다보지 않았다. 향기가 잠든 방 앞에서 밤새 보초 서듯 서성이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어찌나 눈꼴시던지.
다음 날부터는 아예 업고 다니지 그러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향기를 애지중지했다. 그러던 무현이 비실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집 안에 비린내가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비린내 나는 생선이 아니었다. 향기는 잘만 먹고 있는데 코를 막고 화장실로 뛰어가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시아버지 범석이 크게 웃었다.
「향기 대신 입덧하는구먼.」
시어머니가 무현의 아버지를 갖고 범석이 입덧을 대신했단다. 연선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향기라면 껌뻑 죽는 아들이 하다 하다 입덧도 대신하는 꼴이 황당해서.
“어머니, 제가 구울게요.”
향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들의 눈에 흰자위만 보인다. 연선이 한숨 끝에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먹어. 무현이 예민하다.”
“죄송해요, 밤늦게.”
안절부절못하며 겨우 입을 떼는 향기에게 연선이 물었다.
“뭐가?”
“집 앞에서 먹자고 했는데 식당에 가면 질릴 것 같다고 해서 왔어요.”
“당연히 와야지 뭐가 죄송해. 그런 말 마라.”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아, 해 봐. 이거 맛있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무현에게 향기가 눈치를 줬지만 소용없었다. 연선은 나란히 앉아 갈비를 뜯는 아들 내외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참 예쁘게도 온다. 문득 무현을 가졌을 때 밤마다 주전부리를 사다 나르던 남편이 떠올랐다. 자식 키워 봤자 소용없다던 시어른들의 말씀도.
3.
여름이 끝나 가고 있었다. 몇 장의 파파라치 컷이 뜨겁게 포털 사이트를 달궜다.
[시선 강탈 부부! 그들이 돌아왔다!]
제목의 주인공은 차무현과 꽃향기 커플.
출산 이후 1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그들의 주변을 배회하던 취재진들이 한 장의 사진도 건지지 못했었으니까.
향기가 임신을 하고 그녀는 물론 차무현도 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다. 제법 자란 쌍둥이 아들을 양팔에 안은 무현이 향기를 쳐다보며 웃는 모습에 여자들은 다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는 남자라니. 향기는 다소 마른 듯해 보였지만 물이 오른 듯 얼굴엔 광채가 났다. 그 모습에 남성 팬들은 몸살을 앓아야 했다. 무현을 바라보는 향기의 눈빛이 너무 예뻐서.
집 근처를 산책하던 중이었던지 무현은 영문이 프린팅된 하얀 티셔츠에 마 소재의 편안한 블랙 슬랙스 차림. 향기 또한 3부 정도의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두 사람 다 선글라스도 착용하지 않고 여름 슬리퍼인 조리를 커플로 맨발에 신고 있었다.
연예인 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톱스타들인데 너무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비주얼로 보면 절대 평범해 보이지 않지만. 다음 날로 그들이 신은 슬리퍼부터 티셔츠 바지까지 품절 사태가 벌어졌다.
그 사진이 공개되고 며칠이 지났다.
새로운 기타를 멘 향기가 팬미팅장을 빠져나와 수진과 함께 무현의 밴에 올랐다.
“언니 수고 많았어요. 너무 고마워요.”
“무슨! 그런 말 하지 말기!”
얼굴을 비치는 것도 아닌데 음원만 내고 있는 향기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더 두터운 팬덤이 형성됐다. 성원해 준 그들에게 향기는 감사한 마음에 굿즈를 제작해서 선물했다. 그 모든 것을 수진이 준비해 줬다. 수진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이번 달에도 또 HS 씨 기부가 들어왔어. 진짜 대단하지 않아? 완전 네 성덕이야.”
2년이 다 되도록 거의 매달 향기의 이름으로 선행을 기부하는 팬이 있었다. 흔적은 HS뿐. 수진에게 얘기를 전해 들은 향기는 시선을 창밖으로 두었다.
‘엄마…….’
기타에 새겨져 있던 이니셜. 하트만 빠져 있는 그 이니셜을 보고 처음엔 화가 났다. 누군지 빤히 알겠기에 찾아가서 하지 말라고 말할까도 싶었지만 부질없다는 생각에 모르는 척해 버렸다. 그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2년이 흘렀다.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 모르겠다. 다만, 다만…….
SJ는 한동안 주춤하더니 다시 언론에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좋은 쪽으로. 보컬 트레이닝을 해 줬던 정아와는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다. 정아는 통화를 할 때마다 천승언 대표가 많이 변했다고, 그가 원한 건 아니지만 같이 일을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묻곤 한다.
하지만 향기는 그럴 생각이 없다. 각자가 선택한 삶이 다르니까. 그것에 대한 책임 역시 선택한 사람이 짊어질 몫이니까.
집으로 들어선 향기는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후와 원이를 재우다 잠이 든 무현이 보인다. 향기는 살그머니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봐도 차무현 셋이 누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움찔해진다.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
하루가 다르게 개구쟁이 짓을 하는 아이들을 무현이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다. 무현은 딸 하나와 아들 둘을 키운다고 투덜대면서도 늘 웃는 얼굴이다.
‘너희들은 좋겠다, 이렇게 사랑해 주는 아빠가 있어서.’
무현뿐만 아니라 시댁 어른들, 성철에게까지도 아이들은 넘치게 사랑을 받고 있다. 더불어 그녀까지도.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가락을 향기는 조심스럽게 쥐어 본다. 자신이 엄마가 됐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천사들이 제게 온 것일까.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만들어 불러 줄 때면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도 이런 심정이었어?’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더 주고 싶어 찾게 되는 마음. 하지만 향기는 그 마음을 억제한다. 태동을 느끼며 다짐한 게 있었다. 너무 사랑하는 무현과 제 분신이지만 성숙하게 사랑하겠다는 다짐. 한 걸음 뒤에서 아이들이 버겁지 않게 바라봐 주겠다는 다짐.
어느새 눈을 뜬 무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힘들지 않았어?”
“전혀요.”
“누가 더 보고 싶었어? 나, 아니면 아이들.”
“당연히 아저씨죠. 나의 엘프인데. 보고 싶었어요. 무척 많이 엄청.”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자 무현이 그녀의 뒷목을 잡고 옅은 신음을 흘린다.
“그 말 안 했으면 삐질 뻔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무현이 향기를 안아 아이들 방을 빠져나왔다. 그들의 방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이 다급했다.
[The End]
작가 후기
마침표를 찍는 일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또 하나의 후회가 남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도 과감하게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부족한 작가를 응원해 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이에요. 어떻게 지내고들 계신가요? 너무 상투적인 인사지만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편집하느라 고생하신 동아 편집부님들에게도요. 내내 발전만 있으세요.
봉다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