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54화 (54/56)

# 54

54화.

Epilogue

빛이 들어오는 게 신경 쓰였다. 그의 품에서 늦잠 자는 향기가 깨어날 것 같아서. 무현은 향기를 안은 채 닿을락말락하는 커튼을 잡아 겨우 여몄다.

움직임이 느껴졌는지 잠투정을 하는 아이처럼 미간을 모은다. 무현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가을로 들어서는 길목인데 이곳은 벌써 아침저녁으로 쌀쌀했다.

그의 품을 찾는 게 난로 대용은 아니겠지? 사랑한다는 수줍은 향기의 고백이 그를 얼마나 들뜨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 덕에 향기는 초주검이 됐지만 무현은 오랜만에 최상의 컨디션이다.

마을에 들어서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성철의 거처에 먼저 들렀다. 향기는 보이지 않고 할아버지만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같이 올라가자 청했는데 빙긋이 웃고는 손을 내저으셨다.

「휴가다 생각하고 둘이 푹 쉬어.」

간신히 기쁜 내색을 숨겼다. 속으로 얼마나 좋던지 주먹을 불끈 쥐고 말이다.

무현은 제 온기를 찾아 파고드는 향기의 몸을 다독여 주며 색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까지 몇 번이나 안았는데 중심부가 다시 뻐근해진다. 하긴 사랑하는 여자와 살을 비비고 있는데 서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거겠지.

하루 종일 향기를 물고 빨라고 해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의 입술이 삐딱해진다.

어디서 그런 걸 배운 건지 흥분한 녀석을 무는데 바로 사정할 뻔했다. 향기의 도발에 아예 정신 줄을 놓아 버렸으니까. 그동안 섹스를 하면서 수동적인 향기의 몸짓에 조바심이 났었다.

그런데 쾌락에 젖어 더 안아 달라고 보채는데 젖 먹던 힘까지 쏟았던 것 같다.

무현은 저도 모르게 잘록한 허리를 감은 팔을 조이고 다리로 그녀의 몸을 감았다.

“힝, 그만요.”

“아무 짓도 안 해.”

지분대는 무현의 손길에 향기는 눈도 뜨지 못하고 칭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품을 파고든다. 복부를 누르는 부드럽고 단단한 무현의 것이 야릇한 열기를 전하는데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는다.

무현의 나이면 남자로서 한창 때인가? 저를 원하는 무현을 보면서 설레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향기는 본능적으로 무현에게 몸을 밀착했다.

무현은 곤란하다는 듯 향기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엉덩이를 당겨 안았다.

“으응.”

투정하듯 콧소리를 내는 것까지 예쁘게 느껴져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잘 거야?”

사람의 살 냄새가 이렇게 좋았나. 가뜩이나 잠이 덜 깨 비몽사몽인데 무현의 몸에 짙게 배인 스킨 향에 취해 정신이 더 몽롱해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무현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자기야 해 봐.”

무현은 제 가슴에 닿은 향기의 입술이 소리 없이 오물거리자 “안고 싶어.”라고 속삭였다.

향기가 잠이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무현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몸을 겹치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렇게 향기를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무현은 중얼거리며 입술을 겹쳤다. 눈을 동그랗게 뜬 향기가 고개가 잘게 젓는다. 무현은 무시한 채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바로 질척해지는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등허리 아래로 팔을 넣어 교차해 몸을 밀착하자 옅은 신음을 흘린다.

“느껴져?”

“안에서 숨 쉬는 것 같아요.”

향기가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였다.

“하, 좋아요.”

“느린 게?”

“하흣, 더…….”

무현은 고개를 젖히고 저를 원하는 꽃밭에 물을 흠뻑 주었다. 그러고도 오래도록 비밀의 정원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부드럽게 젖은 땅에 쿡쿡 발 도장을 힘껏 새겼다.

* * *

성철은 주방에서 재게 움직이는 무현을 한숨을 쉬며 바라보았다. 점심을 차려 준다며 고기도 볶고 찌개도 끓이고, 맛은 어떨지 몰라도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영 못마땅하다.

이틀 만에 집에 올라왔더니 몸살에 걸렸는지 손녀는 핼쑥한 낯을 하고 자고 있었다. 생전 낮잠 한 번 자지 않던 향기였는데 말이다. 반면에 무현은 보양식이라도 먹은 양 활기차 보여 입맛이 쓰다. 성철은 “어지간히 좀 하지.”라는 타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겨우 삼킨다.

도둑놈 같으니라고. 제 몸 반이나 될까 싶은 아이를, 쯧.

돗자리를 깔아 준 자신을 탓할밖에. 무현은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을 퍼서 성철의 앞에 놓아 주었다.

“식사하세요.”

“향기는?”

“죽, 따로 준비했습니다.”

“밥 먹여. 죽은 무슨 죽.”

보약을 먹여도 시원찮을 것 같은데 희멀건 죽이라니. 성철은 뒷말을 삼키고 국적 불명의 찌개를 맛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와 낙지가 들어간 김치찌개는 간은 맞았다.

“집에 들어앉히려고?”

“네?”

“향기가 노랠 잘했어. 할멈이 워낙 유별나서 막았던 거지.”

“원하면 하고 싶은 거 하게 할 생각입니다.”

무현은 향기가 하듯 얼른 성철의 숟가락 위에 소고기를 올렸다. 이런 저를 가족들이 본다면 눈을 치켜뜨겠지만 잘못한 게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

고삐 풀린 성욕이 문제였다. 향기가 마다하지 않고 받아 준 것도 있지만 이틀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때 되면 밥을 먹고 욕실에서 침대에서 거실에서 아담과 이브처럼 최소한의 천 조각만 걸치고 사랑을 나눴다.

“배부르면 못 할 거 아니야.”

“아직 향기 나이 어려서 충분합니다.”

‘아이 낳고도’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아 무현이 대충 얼버무리자 성철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아이가 급한 건 알지만, 흠.”

“절대 고생 안 시키겠습니다.”

“마음고생만 시키지 마. 거절할 줄 모르는 애니까 알아서 헤아려 주고.”

“정말 예쁩니다. 식구들도 다 예뻐하고요.”

무뚝뚝하던 인사는 어디 갔는지 향기의 얘기만 나오면 입이 벌어지는 무현을 보고 성철은 웃고 말았다.

“이렇게 오래 쉬어도 돼?”

“잔치 끝나고도 좀 머물 생각입니다.”

“그럼 나야 고맙지.”

성철은 마을에 내려가 있을 생각이다. 그저 한 동네에 향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고 위안이 되니까.

툭툭 던지듯 살갑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이젠 정말 가을인가 보다. 햇빛을 가려 준 숲이 뿜어내는 청량한 공기, 푹신한 땅의 기운이 그들의 걸음을 편안하게 했다. 무현은 향기가 이끄는 대로 그녀를 따라 걸었다. 엄마와 자주 왔었다는 은행나무가 빽빽한 길이 향기의 말대로 숲 속 정원처럼 아름다웠다.

“집에만 있으니까 답답하죠?”

“지금 나 잘못했다고 돌려 말하는 거지?”

“알면 됐어요.”

정말 몸살이 나 버렸다. 성철이 하도 무현에게 눈치를 줘서 향기는 그를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춥지 않지?”

“이 날씨에요?”

“몸살 끝이잖아.”

향기는 병 주고 약 주는 거냐고 말하려다 꼴깍 삼켰다. 무현이 아무리 힘들게 해도 점점 더 좋아지니 큰일이다.

풀독이 오른다고 셔츠로 싸매고 긴바지를 입게 하고 장화까지 신게 했다. 매일 내 집 마당처럼 돌아다니던 산길인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그런데도 무현의 세심한 보살핌이 싫지 않다.

무현은 혼자 킥킥거리는 향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향기야, 노래 계속하고 싶어?”

“실은 그냥 그래요. 잘 모르겠어요.”

“학교에 다녀 보는 건 여전히 싫고?”

“네.”

향기는 제 손을 꼭 잡고 걷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무현의 등만 봐도 왠지 든든해 마음이 놓인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어. 그런데 아이도 욕심나고.”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그런데 나 나쁜 짓 했다. 미안해.”

무현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너무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을 담아 향기를 꼭 끌어안았다. 피임을 하지 않고 며칠 동안 향기를 안았다.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향기에게 길을 열어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욕심을 먼저 채웠다.

향기는 무현의 목소리가 무겁게 느껴져 그의 허리를 감았다.

“뭐가 미안해요?”

“기다려 줘야 하는데 성급했어. 아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나 애 아닌데. 내 결정이에요.”

향기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생각 없이 피임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할머니에게 몸가짐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말을 지겹도록 듣고 자랐다.

“외롭게 커서 그런지 가족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나도 아기 갖고 싶어요.”

“사대독자라 아이 갖기 원하는 거 아니야. 나 그렇게 착하지 않거든.”

“내가 좋아서요?”

“큰일이다. 점점 여우 돼서. 이러면 더 욕심나는데.”

무현은 향기의 볼을 쓰다듬었다. 얼마나 저를 더 홀릴지 감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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