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화.
범석은 속으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집안이 꽤 시끄러워질 줄 알았는데 그동안 향기가 점수를 많이 딴 모양이었다. 싫은 내색을 할 줄 알았던 며느리가 용케 참는 눈치였다.
연선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이는 어떻게 할 거니?”
“네?”
“어머니 그 문젠.”
“넌 조용히 해. 향기가 먼저 약속한 거니까.”
연선이 무현의 말을 막자 가족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렸다.
“얘, 말해 봐. 향기 네가 노력한다고 했잖니. 아들 낳을 때까지 아이 가질 거라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가, 네가 정말 그랬어?”라며 동시에 물어 오자 꼭 다물렸던 향기의 입이 열렸다.
“……네.”
향기의 대답에 순식간에 집안은 잔치 분위기가 됐다. 향기가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족들을 보고 무현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본인이 얼마나 큰 사고를 친지 모르는 향기는 덩달아 해맑게 웃는다. 이걸 어떻게 해결한다, 무현의 한숨이 깊어질 때였다. 조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흠, 무현아?”
“네.”
“뭐 하고 있어? 어서 올라가 봐.”
조부가 갑자기 가깝게 다가와 흠칫 몸을 물리는데 생전 않던 귓속말을 하신다.
“노력은 네가 해야지. 향기는 몸도 약한데.”
“할아버지.”
“네가 얼마나 시원찮으면 향기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
제 평생에 조부와 19금을 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현은 그저 향기만 바라보았다.
“어멈아?”
“네, 아버님.”
“내일 아침은 호랑이 기운이 솟는다는 미국식으로 먹자.”
“시리얼이요?”
조부가 고개를 끄덕이자 연선이 시원스럽게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향기와 무현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내일 아침에 내려올 거 없으니까 푹 자.”
“뭣들 해? 늦었는데 어서 들어가 쉬어.”
조부가 말을 끝내고는 벌떡 일어섰다. 벽시계는 겨우 여덟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들 군말 없이 일어나 쫓기듯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인사도 할 새 없이 사라지는 가족들을 보고 향기가 눈을 깜빡였다.
“왜들 저러세요?”
“노력을 어떻게 할 건데?”
“아이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향기에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어쩔 생각이냐고. 무현은 멍하니 서 있는 향기의 어깨를 감싸 걸음을 옮겼다.
메일을 확인하던 무현은 실없이 웃음이 나와 어깨를 들썩였다.
향기가 한 번씩 사고를 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순진한 것도 정도껏이지 본인이 사대독자에게 시집온 건 인지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가뜩이나 증손자를 기다리는 조부모였다. 그리고 연선 또한 다르지 않다. 어린 향기에게 너무 빠른 것 같아서 철통 방어를 하고 있는 무현이었다. 그런 수고도 모르고 자폭한 향기 때문에 무현은 미칠 노릇이다.
이참에 사고 한번 쳐 봐? 향기와 합방한 지가 언젠지 가물가물하다. SJ에 들어간 후 향기는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 놓고 노력을 해? 노트북을 덮고 나른한 미소를 짓는데 욕실 문이 열렸다.
음? 무슨 패션이지?
걸을 때마다 무릎이 살짝살짝 보이는 하늘하늘한 잠옷에 체크 남방. 수면 바지를 벗은 건 환영할 일인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패션이다. 대충 짐작되는 바가 있어 무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향기는 무현의 시선을 느끼고 얼른 화장대에 앉았다.
“옷 안 챙겨 왔어?”
“그게 지난주에 두고 갔는데 하나도 없어요.”
평상복으로 입는 옷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행거에 잠자리 날개 같은 잠옷들이 쫙 걸려 있었다. 개중에 제일 무난한 걸 골라 입은 거다.
“셔츠는 왜 입었어?”
“어깨가…… 없어요.”
슬립을 처음 입어 보는 향기였다. 무현의 앞에 설 용기가 나지 않아 셔츠를 걸쳐 입었다.
무현은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어깨를 들썩였다. 예쁘긴 예쁜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무현이 팔을 벌렸다.
“셔츠 벗고 이리 와.”
“벗고요?”
“입고 잘래?”
머뭇대던 향기가 셔츠를 벗자 무현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왜 셔츠를 덧입었는지 이해가 됐다.
신기하네.
가슴골이 깊이 파인 캐미솔을 입었는데 섹시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부끄러워하는 사슴 한 마리가 그의 품에 파고드는 느낌이랄까.
침대에 올라오는 향기를 낚아채 그의 가슴에 등을 대게 하고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빗질해 주고 뺨에 입을 맞췄다. 이름처럼 온통 그녀의 몸에서 꽃향기가 난다.
무현의 열기를 느낀 향기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영, 영화 볼래요?”
“노력 안 하면 할아버지가 가만 안 두실걸?”
탄탄한 허벅지 사이에 향기를 가두고 무현이 제 티셔츠를 벗었다. 맨살을 스치는 매끄러운 감촉이 그를 자극한다.
“……여기선……. 집에 가서.”
“쉿.”
본가에서는 질색하는 바람에 매번 그냥 넘어갔었는데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다.
무현은 캐미솔 끈에서 향기의 팔을 빼냈다.
“이거 집에 가져가자.”
“집에도 있어요.”
고개를 숙여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고 입술을 겹쳤다. 벙긋 벌어지는 입안으로 혀를 넣어 작은 살덩이를 빨고 입천장을 긁어내리자 향기가 옅은 신음을 흘린다.
긴 목선을 타고 푸릇한 힘줄이 하얀 피부에 얼비치는 모습이 예뻤다. 무현은 그곳에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고 향기를 어루만졌다. 그의 목구멍 속으로 쏟아 내는 향기의 신음이 날카로워졌다.
짙은 키스를 하며 나신으로 만들었다.
고개를 틀어 그를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동자가 어쩔 줄 모르고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무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꿀처럼 단 타액을 삼키고 넘겨 주었다.
향기는 가슴을 헐떡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반짝이던 눈동자에 열기가 차오르고 원망하듯 저를 바라본다. 무현은 귓불을 물고 소곤댔다.
“노력하는 거잖아. 네 말대로.”
“흐읏, 노 놀리지 말아요. 그건…….”
향기는 무현의 진한 애무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무현이 만지는 대로 그가 이끄는 대로 빠르게 변하는 자신이 당혹스럽다. 이를 악물어도 신음을 참기 힘들어 결국 향기는 흐느끼고 말았다.
“흐흑……!”
“쉿, 괜찮아.”
자극이 너무 심했나? 무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제발. 아읏……. 그만.”
밭은 신음을 뱉으며 몸을 굳히는 향기를 보며 무현의 입술이 삐딱해진다. 힘들어하는 향기를 보는 게 왜 이렇게 좋은 건지.
기어이 가벼운 절정에 달하게 한 뒤에 향기를 놓아 주었다. 힘 잃은 향기를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몸에 흔적을 새기며 내려갔다.
무현은 몸을 일으켜 향기의 뺨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피임을 준비하자 초점 잃은 향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직은 안 돼.”
“그래도.”
애가 애를 낳는 꼴을 어떻게 보라고. 무현은 향기의 몸을 안았다.
“아흣,”
“후우.”
무현이 저릿한 통증에 미간을 좁혔다. 충분히 사랑해 줬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버겁다.
무현은 몽롱한 눈을 한 향기를 보고 욕정이 치솟아 이를 악물었다.
“사랑해.”
“흣, 처 천천히.”
“후, 어쩌지. 오늘은 힘들 거 같은데.”
무현의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향기는 야릇하게 꼬이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이를 악물었다. 다른 날보다도 더 무현이 강하고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무 좋다. 어떻게 하지?”
물어보지 말아요! 마음대로 할 거면서.
“너 화내면 더 흥분돼. 빨리 좋다고 해 봐.”
“으응, 조 좋아요.”
향기의 목소리에 무현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까지 속아 주려나.
“조, 좋다고 화 안 났다고…….”
읏, 말했잖아요. 향기는 무너지면서도 고개를 돌려 무현을 바라보았다. 제발 멈춰 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신음을 참기 힘들었다. 정말 아래층으로 그들의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더할지도 몰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향기가 눈을 홉뜨면 너무 사랑스러웠다. 무현은 몇 번이나 무너지는 향기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시트를 쥔 손에 하얗게 뼈마디가 드러난다.
“우리 향기, 후. 꼭 잡아 줘야겠다.”
“응, 으응.”
향기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떨어지는 것 같아요, 흐흑.」
절정에 오를 때면 흥분을 감당 못 하고 무섭다는 향기였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었다.
무현은 향기를 깊게 안았다.
향기의 몸이 크게 떨린다. 향기가 어디론가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후, 이런 노력이라면 얼마든지. 무현은 작은 몸이 으스러지도록 꼭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