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46화.
“사람들이 왜 없어요?”
영화관에 안마 의자 같은 좌석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영화를 누워서 볼 수 있다는데 사용할 생각은 없지만 신기하긴 했다.
“골드 클래스라 그래.”
“그럼 크게 말해도 돼요?”
“떠들어도 돼.”
구두를 벗겨 주고 일회용 슬리퍼를 신겨 줬더니 향기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무현은 의자를 올려 주고 향기의 무릎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식사할래?”
“밥도 먹을 수 있어요?”
“음.”
“별일이네요. 밥은 집에 가서 먹을래요.”
영화가 시작되자 준비된 음료와 팝콘을 끌어안고 스크린 속으로 바로 빠져드는 향기였다. 그런 향기를 보고 있자니 정우에게 욕먹은 보람이 있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갑작스럽게 향기와 평범한 데이트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현도 경험이 없기에 떠오르는 게 영화밖에 없었다.
「돈이 얼만 줄 알아?」
「너더러 내랄까 봐.」
하긴 너한테 그게 돈이겠느냐고 코웃음을 치더니 용케 상영관 전관 임대를 해 놓았다. 좋은 시간 보내라고 하더니, 돌연 키득거렸다.
「이 영화에 몇백 들이기는 좀 그렇지 않아?」
향기의 취향은 판타지물이었다. 노트북에 다운받아 놓은 영화들이 전부 시공간을 넘나들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히어로물. 애니메이션이 아닌 게 어디냐며 정우가 끝까지 이죽거렸다.
연예인으로 살면서 대중의 시선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이었다. 특별히 이미지 관리를 한 게 아니라 여자와 술을 즐기지 않아서 불편한 줄 몰랐던 거다. 그런데 향기와 다니면서 처음 연예인이 된 것에 대한 회의가 든다. 손을 잡아도 영화에 정신이 팔린 향기를 보고 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키스를 한다면 팝콘 세례를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천 대표하고 자리 한번 만들어 봐.”
도시락을 먹던 정우는 무현의 말에 삼키는 것도 잊고 입을 벌리고 말았다.
“무슨 뜻이야?”
소속사가 있는 배우가 다른 소속사 대표를 만난다? 둥지를 다른 곳에 틀겠다는 의미거나 간을 보겠다는 것. 그렇지 않아도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들 무현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사 직함까지 달고 있지만 속사정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일단 잡아.”
“난 못 해. 기자들 냄새라도 맡으면 어떻게 수습하려고?”
더 좋은 조건도 마다하고 소속사와 의리를 지켜 온 무현이었다. 향기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정우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반대야.”
“옮기려는 거 아니야.”
“대표님이 알기라도 하면 여태껏 쌓은 이미지 날아가는 거잖아.”
“그걸 누가 몰라.”
생물학적 아버지라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천 대표가 막장 같은 짓을 벌인다면 향기가 받을 상처가 너무 클 것 같았다. 사람을 붙여 뒀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무현은 답답함이 느껴져 넥타이를 잡아 좌우로 흔들어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아버지잖아.”
“씨발. 좆같네.”
정우도 걱정하던 부분이었다. 성 접대, 유흥, 배우 끼워 팔기 등등, 다 없어진 줄 알지만 절대 아니다. 아직도 암암리에 관행처럼 행해지는 일들. SJ는 그쪽으로 이력이 화려했다. 무현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거기까진 안 가게 막아야지.”
“생각한 건 있고?”
무현과 결혼한 여자다. 둘도 없는 친구의 여자. 정우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표님께는 말해 뒀어. 언론에 흘려. 연애쯤으로 해서.”
“그리고?”
“향기랑 광고 찍으려고. 그걸 네가 알아봐. 굵직한 거로.”
“하, 미운 놈 돈으로 발라 주려고?”
무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향기가 아무리 노래를 잘한다고 해도 뜰 거라는 장담은 못 한다. 천 대표에게 향기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구미가 당기게 해 줄 생각이었다.
* * *
“뭐라고?”
“대표님의 하루 시간을 저한테 주세요.”
향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는 천승언을 덤덤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일인용 소파에 앉은 천승언은 시트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계약 때문에 부른 게 아니었다. 누군가와 겹쳐지는 저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 불렀던 건데. 맹랑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순진해 보였는데 잘못 본 건가. 천승언은 귀찮다는 듯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금 들이대는 거야?”
“네?”
“나한테 꼬리 치라고 누가 시켰어? 기자 새끼들이야? 아니면 우리 집사람?”
천승언의 말에 향기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저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새삼스럽게 혼자 출산을 결정한 엄마의 선택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
명백한 비웃음이 천승언의 입가에 실렸다.
“그렇다 치고. 네가 지금 조건 같은 거 내걸 처지야? 어디서 건방지게.”
“그래서 성공하면, 이라는 단서를 붙였어요.”
“들어나 보자. 내 하루 가지고 도대체 뭘 하고 싶은데?”
“부모님께 보여 드리게요.”
묘하게 비틀렸던 천승언의 입술이 제자리를 찾았다.
“집에서 가수하는 거 반대해? 그래서 나더러 설득해 달라는 거야?”
“비슷해요.”
“내가 연습생 부모나 만나러 다닐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닌데.”
이제 막 가수가 되겠다고 하는 연습생이다. 피처링 제의가 꾸준히 들어오고 예능 쪽에도 입질이 오고 있다. 재능은 확실히 있지만 그런 애들이 한둘도 아니고. ‘운칠기삼’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번거롭다는 생각에 선뜻 대답이 나가지 않아 천승언은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를 펜으로 툭툭 건드렸다.
“동영상 돌고, 언더에서 관객들이 꽥꽥대니까 벌써 연예인병 걸렸어?”
“아닌데요.”
“너 하나 가수로 키우는 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 뜬다는 보장도 없는데 받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해야지. 안 그래?”
동영상으로 대중의 관심 좀 끌었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다. 빼 줘야겠지. 하루 스타, 향기와 같은 애들이 하루에도 몇십 명씩 생겨나고 사라진다.
“연습이나 열심히 해.”
“그럼 계약할 생각 없어요.”
천승언은 향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강단 있네. 보통 이 정도 말하면 황송해하면서 고개를 숙여야 정상이다. 그런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보통 당찬 게 아니다. 얼굴엔 아무런 표정을 싣지 않고.
“너 꼴통이구나? 똘똘하게 생겨서는 쯧. 너희 부모님 속 꽤나 썩였겠는데?”
썩이다 못해 죽게 했어요. 저 낳느라 몸이 약해져 일찍 하늘나라 가셨거든요.
“계약금도 필요 없고 단서 조항도 달았으니까 대표님이 손해 보실 일은 없잖아요.”
하, 요것 봐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악하게 수익 배분을 따지는 것도 아니고, 다짜고짜 떼를 쓰는 것도 아니다. 성공하면 부모 한 번 만나 달라는 게 계약 조건. 깜냥이 될 것 같긴 한데, 어쩐다.
“너희 부모가 너 가수하면 안 보겠대?”
“시골 사람들은 그래요. 자식이 연예인 되겠다고 하면 반대부터 해요.”
“요즘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나.”
“대표님 말씀대로 성공한다는 보장 없잖아요. 실패하면 돌아갈 곳은 집밖에 없는데.”
피식 입술을 늘리는 천승언을 보고 향기는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몹쓸 꼴로 와서 동네 사람들한테 손가락질받을까 봐, 뭐 대충 그런 걱정들 때문에 반대하시는 거 같아요.”
“내가 가면 그런 걱정이 다 사라지신대?”
“아뇨. 걱정은 제 실력 유무에 따라 달라지겠죠. 대중이 평가해 줄 거고요.”
“하!”
“제가 큰 회사 소속이다, 하면 좋아하실 거 같아서요.”
당신이 생물학적 내 아버지다, 라고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사정사정해서 엄마에게 가 달라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부탁한다고 해서 들어 줄 사람이었다면 엄마를 그렇게 망가트리지는 않았을 거다.
“좋아,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하고 너 성공하면 실장 보내 줄게.”
“아니요. 대표님이어야 해요.”
그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실장이 들어왔다.
“대표님, 잠시만요.”
실장이 천승언만 듣게 수군거리더니 향기를 쓱 훑고는 나간다.
향기를 바라보는 천승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잡혔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천승언이 펜을 집어 들었다.
“가서 류향기가 잘하고 있다, 인사만 해 주면 된다는 거지?”
“네.”
“좋아. 계약하자고.”
감사하다는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까닥이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천승언이 향기를 불렀다.
“근데 그때 연주했던 기타 말이야.”
“네?”
가슴이 순간 두근거렸다. 알아봤을까.
“요즘도 그거 쓰는 사람이 있어? 너무 낡은 거 같은데, 바꾸지 그래?”
향기는 빙긋이 미소를 짓고 말했다.
“제 꺼 아니라 함부로 못 버려요. 빌린 거거든요.”
“혹시 말이야…….”
“네?”
“아니다. 나가 봐.”
향기의 파일을 들추던 천승언은 펜으로 그녀의 고향을 툭툭 두드렸다. 저 조그만 여자애가 신경을 깔짝인다.
* * *
룸으로 들어서자 천승언이 일어서서 무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차무현 씨를 다 만나고 영광입니다.”
“앉으시죠.”
무현은 천승언이 앉을 때까지 기다리다 그의 앞에 앉았다. 천승언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올해는 장마가 일찍 시작되려나 봅니다. 가만히 있어도 후덥지근해서…….”
“…….”
말끝을 흐리는 천승언을 무현은 덤덤한 시선으로 응시하다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6월 초인데 덥고 습했다. 불쾌지수는 연일 최고점을 찍고. 하필이면 이런 날 천승언과 마주하고 있는 거다. 고역스럽기 짝이 없게. 무현이 호응을 하지 않자 천승언은 멋쩍었다.
“연락 받고 좀 놀랐습니다.”
“식사하시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만남이 뜬금없다는 생각에 천승언의 입술이 묘하게 비틀렸다.
차무현을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소문대로 잘난 얼굴도 그렇고 저보다 한참은 어린놈인데 어디 한구석 틈이 보이지 않았다. 대표직을 맡고 있는 그가 말을 놓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포스가 남달랐다.
천승언이 먼저 운을 뗐다.
“계약이 끝나 가죠?”
“네.”
“이 자리, SJ도 차 배우와 함께하는 거, 기대해도 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