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41화.
넓은 베란다에 허브 향이 가득했다. 제가 이곳에 오고 나서 생긴 미니 정원이다. 한동안 바빠서 분갈이도 못 해 줬는데 잘 자라고 있었다. 처음 무현의 집에 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미안했고 창피하기도 했다. 무현의 결정을 기다리며 집에만 머무는 시간. 어느 날 무현이 물었다.
「풀 좋아하지?」
「풀이 아니라 꽃을 좋아하는 거예요.」
집에 화단을 만들려고 했는데 바빠서 미뤘다며 부탁을 해 왔다. 다음 날 배달되어 온 허브와 꽃나무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저 많은 꽃들을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인부들이 움직이자 뚝딱 근사한 화단이 생겼다.
가만 보면 은근히 자상한 구석이 많은 무현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놀이터가 되었다. 초록을 보고 있으면 고향집에 와 있는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답답함도 조금은 사라지고.
향기는 바삐 움직였다. 분갈이를 해 주고 줄기가 너무 자란 애들은 가지치기를 해 주고. 율마와 로즈메리는 볕이 조금 더 잘 드는 곳으로 옮겨 주었다.
“은근 까다로운 녀석들이야.”
꽃나무는 키우기가 쉬운데 허브는 한눈을 팔면 바로 누런 잎이 생기고 축축 늘어진다. 물을 주자 축 늘어졌던 애들이 금방 생기를 머금고 잎이 빳빳해진다.
“여기 있었어?”
호스를 정리하던 향기는 무현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왔어요. 저녁은요?”
“먹었지. 몇 신데.”
무현이 손짓으로 부르고는 팔을 벌렸다.
“뭐예요?”
“한 번 안아 보자.”
무현이 피식 입가를 늘이더니 다가와 포옹을 해 온다.
“술 마셨어요?”
“조금.”
“나한텐 마시지 말라더니.”
“벌써부터 바가지 긁는 건가.”
아니거든요! 발끈하자 무현이 그녀의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그리고 데크가 깔린 바닥에 주저앉더니 자신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등 붙이고 앉아 봐.”
무현이 “빨리”라고 재촉하자 향기는 그가 시키는 대로 등을 붙이고 앉았다. 무현이 힘을 풀고 제 등에 온전히 기댔다.
“이렇게 기대니까 편하다.”
“오늘 힘들었어요?”
“어. 많이. 너도 해 봐.”
향기는 그가 시키는 대로 몸에 힘을 풀고 무현의 등에 기댔다. 웨딩 촬영 때는 긴장해서 몰랐었는데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래도 참 따뜻했었다. 베란다 창으로 높게 뜬 달이 보여 향기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서울 와서 하늘 보는 걸 잊고 살았다. 매일 보던 하늘인데.
“향기야, 편해?”
“네. 편해요.”
무현은 팔을 뒤로 돌려 향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보통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고들 말하잖아.”
“…….”
“참 바보 같은 말이야. 핑계고.”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걸까. 향기는 기울어져 가는 달을 눈에 담기 위해 머리까지 기댔다. 허브 향이 가득한 베란다 정원, 무현의 등이 그녀에게 휴식을 준다.
“다시 풀어서 끼우면 되거든.”
“치이. 줄줄이 잘못된다, 관용적인 표현 가지고 까칠하게 왜 그래요?”
“넌 단추 없는 옷만 입어. 평생 내가 사 주는 옷만.”
“아, 이 아저씨가 정말!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요!”
무현은 피식 입술을 늘렸다. 이렇게 말주변이 없었나. 첫 단추를 잘못 낀 그들이었다. 서로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이 시작했다. 그래서 향기에게 미안했다.
“지금 창피하죠?”
“그래. 창피해서 얼굴 뜨거워졌어.”
“그건 술 때문이죠.”
향기는 키득거리다 고개를 틀어 제 손을 덮은 무현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언제 봐도 예쁜 손이다. 처음 무현의 손을 보고 신기했었다. 남자 손이 너무 예뻐서. 무현이 떠나고도 이상하게 그의 손이 자주 떠올랐었다.
“아저씨가 부러웠어요.”
“왜?”
정확히는 아저씨네 가족이 부러웠다고 말했고 무현은 묵묵히 그녀의 얘기를 들어 줬다.
“처음엔 무서웠었거든요. 거짓말을 하고 그분들을 보는 게요. 그런데 반하고 말았어요.”
“왜.”
“사랑하는 방법이 성숙해서요. 자식의 말에 귀 기울여 주고, 존중해 주고.”
“좋은 것만 봤네. 실상은 아닌데.”
향기는 무현이 틀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현의 본가에서 지내면서 그를 엿보게 됐다. 과학고를 거쳐 대학까지, 그가 얼마나 우수했었는지 그 흔적이 서재에 남아 있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무현을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그런 아저씨가 연예인이 된다고 하는데도 허락해 줬잖아요.”
“내가 돈 잘 버는 거 모르나 보네?”
“알아요. 그래도 할아버님은 아저씨가 사업을 이어받길 바라셨대요.”
“결혼 강요하고 강제로 선보게 하고. 얼마나 볶으셨는데.”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냐고 눈을 흘기자 무현이 정색했다.
“그냥 얻어지는 게 있는 줄 알아? 네가 본 건 무혈 항쟁으로 얻은 결과물만 본 거야.”
“아닌데.”
“남편 말을 안 믿어? 우리 어머니 보통 분 아니셔.”
무현은 일부러 과장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일은 없었는데 말이다. 영특한 무현은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제 뜻을 관철시키는 방법을 일찍 터득했다.
“어떻게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와요? 닭살 돋아.”
향기는 남편이라는 말이 소름 돋는다면서 팔을 퍽퍽 문질렀다. 한참을 키득대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좋은 분들이세요.”
“근거는?”
“저를 데려가도 싫은 내색 한 번 안 하셨잖아요. 따로 불러서 야단도 안 치셨고요.”
“네가 어때서?”
“피이. 나도 알 거 다 알아요.”
경제력도 그렇고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집이었다. 무현은 그런 집안의 사대독자고. 그런데도 가족들은 그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시골 작은 동네에서도 자식들이 결혼하겠다고 하면 집안을 보고 수준을 따진다. 무현의 가족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물며 가족 관계도.
무현과 저는 진짜 결혼이 아니었기에 그런 것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니었다. 며느리로, 손부로 한참 모자라는 여잔데 싫은 소리 한 번 않고 받아들였다.
“우리 할머니는 엄마와 저를 무척 사랑했어요. 할머니 방식대로요.”
“……?”
“전 답답했거든요. 치마폭에 숨겨 주려고만 해서요.”
향기가 아는 사랑은 억압이었다. 딸의 전철을 밟을까 걱정됐던 걸까. 할머니는 향기가 자신이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했다.
“그렇다고 할머니를 싫어한 건 아니에요. 많이 사랑해요. 아저씨 가족들을 보고 문화 충격? 그런 걸 좀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처음 섞여 지내면서 생각이 많아지는 향기였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
“착하고 예뻤어요. 그리고 포장 전문가? 아니다. 몽상가에 더 가까워요. 웃기죠?”
평범한 가정을 만들어 주지 못해서 미안했던 것 같았다. 늘 웃어 주었고 좋은 얘기만 들려줬다. 거짓으로 사랑의 환상까지 심어 주면서.
“그래서 말인데요. 가짜가 진짜가 되면 내가 초라해지지 않을까요.”
무현이 몸을 돌려 향기를 마주 보았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우리 어머니. 잔소리가 심하시거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잔소리고.”
말을 맺은 무현이 향기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런데 무서워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다 바뀌었어.”
“누구로요?”
“너. 우리 어머니보다 네가 더 무서워.”
“왜요?”
향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무현은 슬쩍 입술을 늘렸다.
“어머니는 이길 수 있는데 넌 못 이기니까.”
“하. 말도 안 돼. 싫어하는 건요?”
“네가 ‘그런데요, 아저씨.’라고 하는 거.”
어이없는 얼굴을 하는 향기를 보고 무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 뒤에는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꼭 하더라. 네가.”
“정말요?”
“그래.”
무현은 그리고 지금부터 하는 말은 잊어버리지 말라고 말했다. 그의 눈빛이 너무 강렬해 향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이 널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
“나를 믿어서가 아니야. 꽃향기 네가 예쁘고 멋진 여자라서 흔쾌히 허락하신 거지.”
정말 그럴까요? 내가 아저씨를 욕심내도 될까요?
무현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틈을 보여 주기 시작한 향기가 마냥 예뻐 보여서.
“안고 싶은데 어떡하지?”
“어 어제 했, 아저씨 술도…….”
열 오른 사람의 것처럼 향기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는다. 무현은 향기를 안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 * *
무현의 옷과 향기의 옷이 침대 밑에 겹쳐져 쌓였다.
“힘들지 않아요? 술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여전히 그의 몸을 걱정하는 향기 때문에 무현의 한숨이 깊어진다. 레슨 선생을 붙여 줄 수도 없고 정말 큰일이다 싶어서.
“술 깬 지 오래고, 우리 신혼이야.”
이틀 연속이라 힘드냐고? 한숨만 나온다. 첫날밤에 한 번으로 관계를 끝내야 했던 그의 고충을 향기는 알까.
몸살 끝 무렵이었다. 불끈거리는 녀석을 구박하며 향기의 시중을 들었고 향기의 상태가 좀 나아지자 오후 스케줄이 빽빽하게 잡혀 있어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리고 무현은 색다른 하루를 경험하고 말았다.
일하는 중간중간 평소와 똑같이 향기가 떠올랐다. 그런데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급히 화장실을 찾는 사태가 발생했다. 얼마나 황당하던지. 하마터면 ‘변태 차무현’으로 포털 사이트를 뜨겁게 달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