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30화.
본가에 얼마나 있었다고 무현의 집이 너무 조용하게 느껴졌다. 향기는 기타를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처음엔 반기지 않던 인서까지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통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습을 했다. 절대 가수는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고 외면했는데, 설렘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향기는 라면 물을 올리고 김치를 꺼내 식탁에 올렸다.
“저녁 안 먹었어?”
언제 나왔는지 무현이 주방 입구에 서 있었다. 향기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깜빡했어요. 아저씨 것도 끓일까요?”
“아저씨?”
무현의 물음에 향기는 어리둥절했다. 매번 부르던 호칭이었는데, 뭐가 잘못된 건가? 생각하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이름을 부르든지 아저씨라고 하든지, 하나로 통일해.”
“그건, 본가에 갈 때만 부르면 되는 거 아니었어요?”
“연습이 돼야 실수를 안 하지.”
“계속 ‘무현 씨’라고 부르라고요? 쑥스러운데.”
무현은 대답 대신 입술을 삐딱하게 하고는 끓는 물에 라면을 넣었다.
“밥 먹는 것도 잊을 만큼 바쁜 일이 뭐야?”
“버스킹하려고요.”
“버스킹? 어디서 할 건데?”
나디아의 보컬을 하게 됐다는 말은 향기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본가에 가는 날을 조정해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말한 거지만.
“우선은 휴일엔 홍대, 평일엔 클럽에서요.”
향기는 짧게 대답하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앉는 건 아니겠지? 예정대로라면 오늘 안 들어와야 정상인데.
며칠 전 무현의 옆구리에 얼굴을 파묻고 깨어난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얼굴에 열이 오르고. 이마에 뽀뽀를 받은 것만으로도 한동안 힘들었는데 꽤 오래가게 생겼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무현이 식탁에 앉는다.
“언제 들려줄래, 네 노래. 클럽 가서 들을까?”
“싫어요. 절대 싫어요.”
“왜?”
“창피하니까.”
입술을 삐죽 내민다. 창피하다? 길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건 괜찮고 내게만 창피한 거면, 좋은 신호인가.
Chapter. 7
제법 규모가 되는 호텔 이벤트 홀을 하객들이 가득 메웠다. 대부분 낯익은 사람들. 마흔이 넘은 선배 연기자, 김진관의 탈 총각 결혼식이니 당연했다.
조연을 맡고 있는 색깔 있는 배우인 김진관과는 여러 작품을 함께 출연하면서 인연이 깊어졌다. 동료 배우, 감독들도 온 터라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무현은 원형 테이블에 정우와 함께 앉았다. 식이 끝나고 피로연에서 뭉치자는데 그럴 생각은 없고 예식만 보고 갈 생각이다.
무현은 버진로드를 걸어 들어오는 신부를 보고 취재진을 철저하게 막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신부의 배가 눈에 띄게 불러 있었다. 임신설이 나돌자 사실무근이라고 딱 잡아떼던 김진관이었다. 저 정도면 인정하고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게 나았을 텐데. 대중들도 연예인도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 주는 세상인데 말이다. 정우의 혀 차는 소리에 무현이 고개를 돌렸다.
“애가 혼수라더니.”
입바른 소리를 할 처지가 아닌 정우였다. 무현은 빙긋 미소를 짓자 제 발 저린 정우가 말했다.
“속으로 내 흉 봤지?”
“알면 됐어.”
“신부가 어린 티를 낸다. 웨딩드레스라도 다른 거로 입지.”
정우의 말대로 신부의 웨딩드레스 선택은 미스였다. 차라리 배를 가릴 수 있는 에이라인이나, 프린세스 라인 드레스였다면 나았을 텐데. 신부는 골반과 허리 라인을 강조하는 머메이드라인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무현이 지나가듯 말했다.
“어린 건 아니지.”
신랑 김진관의 나이 마흔 셋, 신부는 스물여덟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거지 신부가 어린 건 아니었다.
“철이 없다는 소리지. 저 몸에 저 드레스가 말이 돼?”
“관심 꺼.”
“관심 아닙니다. 집에 있는 여자 챙기기도 벅차거든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 결혼하고 철이 든 정우가 무현은 반가웠다.
“신부가 과하게 화려하네. 뮤지컬 한다고 했나?”
“진관 선배랑 작품 하다 만났다지. 저 여자 보니까 향기 씨가 다시 보인다. 진짜 신부 같던데.”
“그걸 네가 왜 기억하는데.”
서늘하게 말하는 무현을 보고 정우는 “그거 내 작품이다, 내 공 잊지 마.” 말하고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그날 보니까 아깝더라고. 안쓰럽기도 하고. 겪어 보니까 착하던데.”
“제수씨한테 고마웠다고 전해.”
웨딩 촬영 때 향기는 작은 손에 어울리는 한 줌 들꽃을 부케로 들었다. 두 번 갈아입은 드레스도 무척 잘 어울렸고. 정작 본인은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무현은 그 모습조차 귀여웠었다. 그래서 그의 침실에 걸려 있는 사진은 볼 때마다 웃음이 났다. 아담한 향기가 무현과 등을 맞대기 위해 쿠션을 깔고 앉아 찍은 사진. 얼마나 떨던지 무현의 등으로 향기의 떨림이 전달될 정도였다.
무현은 한숨 섞인 정우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부럽다. 도대체 몇 살 차이야?”
“열다섯 살.”
가뜩이나 동안인 향기와 무현은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 무현이 엉뚱한 생각을 하는데 정우가 물었다.
“결혼식 와 본 소감이 어때?”
“뭐가 궁금한데?”
애경사에는 빠지지 않는 무현이었다. 뻔히 알면서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건 속마음을 알고 싶은 거겠지.
무현이 입을 열지 않자, 정우가 다시 말했다.
“계약 결혼 생활은 할 만한가 해서.”
“난 네 뇌가 궁금해.”
뭐가, 라고 묻는 정우를 무현은 조소했다. 듣는 귀가 많은 오픈된 공간에서 제 배우의 사생활을 까발리는 매니저를 어떻게 할까.
“이참에 매니저를 갈아 봐?”
“우리 쌍둥이들 크려면 아직도 멀었어.”
“입이 그렇게 가벼워서 잘 키울 수 있겠어?”
“내 배우님 속이 얼마나 깊은데. 난 너 믿어.”
“친구만 아니면…….”
태연한 얼굴을 하는 정우를 보고 무현이 입술을 삐딱하게 했다. 면박을 주면서도 정우가 저에게 얼마나 잘 맞는 매니저인지 알기 때문이다.
무현은 의미 없는 시선으로 예식 홀을 둘러보았다. 주례 앞에 선 신랑 신부, 버진로드를 따라 장식한 화사한 꽃과 드라이아이스, 관현악단, 하객들까지 전형적인 예식장 풍경이다.
그리고 무현이 두 달 전에 다녀왔던 결혼식과도 똑같은 풍경이다.
정우의 얘기 때문이었을까.
무현은 저도 모르게 신랑 신부 자리에 향기와 저를 세워 보고 있었다. 아니, 웨딩드레스를 입은 향기가 하객들 앞에서 저를 바라보는 모습을.
젠장. 무현이 한숨을 내쉬는데 신랑이 신부에게 반지를 껴 주는 식순이 진행되고 있었다.
무현은 시선을 신랑 신부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
“내가 반지를 끼고 다니면 어떨까.”
“너 요즘 액세서리 관심 있어? 협찬 필요해?”
“가끔 말이야. 우리가 같은 대학을 나왔다는 게 의심스러워.”
“아이큐는 내가 더 높다.”
정우는 피식거렸다. 무현이 변하고 있었다. 기다려 줄밖에. 정우가 열없이 말했다.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겠지. 차무현 여자가 누군지 알아내려고.”
“…….”
무현은 술이나 한잔하자며 일어섰다.
이른 시간이기도 하고 일요일이라 바는 한산했다. 예식 홀로 들어오지 못한 취재진들에게 잡혀 무현이 인터뷰를 했다. 민폐 하객, 타이틀을 달고 그의 사진이 포털 사이트에 올랐지만, 매번 있는 일이라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차무현 씨는 언제 결혼 하시나요?’ 리포터의 질문에 무현은 답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좋은 사람이 생기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하던 녀석이. 정우는 꽤 여러 잔을 비운 무현을 바라보았다.
“친구 찬스 좀 쓰자.”
“써.”
“고민이 뭐야?”
“결혼.”
짧고 확실한 무현의 대답에 정우의 입이 벙긋 열렸다.
“끝내려고? 아니면 들통났어?”
“아니.”
“그럼. 내가 생각한 게 맞아?”
네 생각이 뭐냐고 무현은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이 든 거야? 아니면 이왕 한 결혼 그냥 살자 싶은 거야.”
무현의 서늘한 미소가 말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너, 날 그렇게 몰라? 하는. 내가 내 인생을 그렇게 버릴 것 같아? 하는. 정우가 피식거렸다.
“이상하다 싶었다. 여자한테 곁도 안 주던 놈이 여자를 집에 들여서.”
“나도 이상했다.”
처음부터였던 것 같다.
목숨을 구해 줬으니 호감을 갖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놀라는 척해 줬다. 까르르 웃으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향기와 결혼 얘기가 오가는 남자를 이진의 신랑보다 더 면밀히 살폈었다. 어떻게든 흠을 찾으려고 했다. 향기를 주기 싫다는 생각을 하면서. 상견례가 있을 거라는 얘기를 듣고 밤잠을 설쳤었다.
모든 일이 어그러졌을 때 서울로 오면서 몇 번이나 갓길에 차를 세웠다. 눈물 가득 담고 저를 보던 향기의 눈동자가 떠올라서.
서울에 오고도 마찬가지였다. 맞선은 더 무료해지고 향기와 보냈던 열흘이 영상처럼 그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서울에 왔다는 그녀의 전화를 받고 겉옷도 챙기지 못하고 눈길을 달렸다. 마음을 열지 않는 게 화가 났다.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말에 서운했었다.
정우는 처음 보는 무현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차무현이 사랑앓이 하는 것을 보다니. 아, 진심 고소하다.”
남자라는 동물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몸 섞고 마음 주는 부류. 몸만 섞는 부류. 마음 주고 몸 섞는 부류. 요즘은 여자도 비슷하지만.
무현은 철저히 세 번째 부류였다. 웨딩 촬영 전에는 무현의 마음을 몰랐었다. 향기가 신인 배우인 줄 아는 포토그래퍼가 하대하는 건 당연했다. 심한 막말도 아니었건만 무현이 심하다 싶게 서늘하게 굴었다. 그리고 어미가 새끼를 보듬듯 재킷을 어깨에 걸쳐 주고.
무현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향기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사진을 포토그래퍼가 작품으로 전시하고 싶다고 욕심을 냈다. 그 정도로 무현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정우 저도 그때 그냥 한 결혼이 아니구나, 감이 왔다. 그래서 기다렸다. 무현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챌 때까지.
“여자로 보이디? 본가 가서 합방은 했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하는 무현의 말에 정우가 키득거렸다.
“단독 기사로 팔면 돈 좀 되겠는데, 우정을 버려?”
“마음대로.”
향기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건 오래됐다. 제 마음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시작이 잘못됐으니까. 결혼 생각도 없었고 여자들의 끊임없는 대시와 애정 공세에 질려 있었다.
내가 여자에게 관심을? 그것도 열 살이나 어린 여자를?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오만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먼저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없으니까.
“너 어떻게 하냐? 향기 씨가 안 받아 주면?”
“그러게.”
둘은 한동안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