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27화.
모든 상황이 그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마음조차. 무현은 복잡한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기념일이잖아. 부부된.”
“좋아요. 밥값은 제가 낼게요.”
뜬금없는 말에 무현이 미간을 좁혔다.
“여러모로 고마웠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
“……?”
“제가 한 말 잊지 않았죠?”
“무슨?”
“사랑하는 여자 생기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던 거.”
기억한다. 하도 어이없는 말이라서.
「이혼해 줄게요.」
혼인 신고서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이혼을 약속해 주는 신부라니. 무현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 나만 헷갈리는 건가.
“음식 다 식겠다, 우리 빨리 식사해요.”
“…….”
“와, 이거 예뻐서 어떻게 먹어요. 플레이팅이 정말 예쁘다.”
폭탄 발언을 해 놓고 음식이 눈에 들어오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무현은 시범을 보이듯 거칠게 스테이크를 썰어 보였다.
“썰고 찍어서, 입에 넣고, 씹어.”
사람 속을 홀라당 뒤집어 놓고 오물오물 잘도 먹는다. 다람쥐처럼.
한참 식사에 열중하던 향기가 무현의 얼굴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저 이제 바빠질 거예요. 그래서 아저씨 일 못 도와줘요.”
“왜?”
“아저씨네 집 가는 날 빼고는 제 일 하려고요.”
향기의 말에 무현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동안 방송국 다니면서 뭐 느낀 거 없어?”
“없는데요.”
“류향기.”
“잠깐만요. 또 도와준다는 말 하려면 안 들을래요.”
순박한 거야, 맹한 거야. 거기다 고집은 쇠심줄이다.
무현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향기가 걱정스러웠다. 방송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눈으로 확인하라고 일부러 촬영장이며 방송국에 데리고 다녔다. 대형 기획사 애들이나 명함을 내밀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그런 대형 기획사 애들도 숱하게 무시받는 게 이쪽 업계다. 그런데 자신의 도움도 안 받겠다느니, 취향 운운하며 소속사를 고르겠다니. 답답한 마음에 무현의 목소리에 짜증이 서렸다.
“세상 일이 마음먹는 대로 되는 줄 알아?”
스폰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사기당하는 일도 많다. 그것뿐이면. 목까지 차오르는 험한 말을 무현은 꿀꺽 삼켰다.
향기는 일부러 무현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의 도움을 받을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향기는 표정을 밝게 했다.
“아저씨, 이거 먹어 봐요. 향이 되게 독특해요.”
그냥 한 말이 아니라 게살에 송로 버섯이 들어간 캐주얼한 요리가 맛도 향도 일품이었다.
“너나 많이 먹어.”
어떤 음식을 삼켜도 입맛이 돌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길라잡이 정도는 해 줄 생각이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굳이. 무현은 물 잔을 깨끗이 비웠다.
* * *
무슨 일을 해도 집중이 안 되고 머리가 멍했다. 수면 부족 탓인가. 평소 즐기지 않는 쓰디쓴 블랙커피를 한 잔 다 비웠는데도 마찬가지. 향기는 애매한 이마만 쓱쓱 문질렀다.
“더워?”
“응?”
“왜 자꾸 이마를 닦아?”
은주의 말에 정신이 돌아온 향기는 어정쩡하게 미소를 끌어 모았다.
“잠을 좀 못 잤더니 멍해.”
“잘 자면 것도 이상하지.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속상한 나머지 은주는 불퉁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대학 동기 중에도 결혼한 친구가 있다. 고향 친구들 중에서도. 그들에겐 이른 결혼을 한 명분이 있었다. 과속을 했든 어쨌든. 하지만 향기는……. 은주는 머리를 잘게 흔들었다.
“좋은 기회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괜히 신세 지는 거 아닐까.”
“어차피 보컬이 필요해서 사람 구하는 건데, 뭘.”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향기가 마음 약한 소리를 하자 은주는 한껏 눈을 흘겼다.
“너답지 않아. 내가 걸그룹 한다고 난리치다 왜 접었는데?”
“머리 깎일까 봐?”
“웃기시네. 너 때문이거든.”
맹한 표정을 짓는 향기를 비웃었다. 소주병에 숟가락만 꽂으면 가수 뺨치게 노래 잘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향기는 차원이 달랐다. 어떤 노래든 향기의 목소리로 들으면 그림이 그려진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선생님들도 공부 잘하는 향기가 당연히 가수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였다.
“괜히 나 때문에 시간 뺏겨서 어떻게 해. 정말 수고 많았어.”
“우리가 인사 차릴 사이야? 너 가수되면 매니저나 하지 뭐.”
향기를 도울 생각에 아르바이트도 다 그만두었다. 학점 관리야 어느 정도 해 둬서 걱정 없지만, 펑크가 나도 상관은 없다. 그만큼 향기는 제게 소중한 친구다.
향기는 은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꼭 성공해야겠네. 내 친구 취직시켜 주려면.”
버스킹을 하겠다고 하자 은주가 혼자서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었다. 그러던 중 정진의 연락을 받았다.
「친구들이 피처링해 줄 여성 보컬 구하는데 오디션 한번 볼래요?」
서울 가이드를 해 주며 그냥 해 본 말 아니었나. 결혼 준비를 하던 중이었고 정진이 얘기하는 친구들의 정보도 없는 향기였다. 그래서 은주에게 물어봤던 거다.
「‘나디아’라고 들어 봤어?」
「언더에서 꽤 유명한 밴드야. 왜?」
설명을 하게 됐고 무조건 하라고 은주가 부추겼다. 그리고 바쁜 저를 대신해 은주가 정진을 만나서 일정을 잡아 주었다.
“약속 시간 다 됐다. 가자.”
향기는 은주와 카페를 나섰다.
협소한 계단을 올라가자 옥탑이 보이고 밖에 나와 있는 정진이 그녀들을 반겼다.
“오랜만이네요, 향기 씨. 여기 찾는 데 힘들지 않았어요?”
“은주 있잖아요.”
“왜 향기는 ‘향기 씨’고 나는 은준데요?”
은주가 놀리듯 말하자 정준의 얼굴이 뻘게졌다.
“넌 자주 만났잖아. 말도 텄고.”
쾌활하고 직선적인 은주는 ‘아싸’의 반대인 ‘인싸’ 스타일이라 만나는 순간부터 편했다. 향기는 무현의 지인이라 그런지 처음부터 왠지 어려웠다. 무엇보다 단 하루였지만 서울 가이드를 해 주며 받은 인상이 너무 강렬했다. 어떻게든 인연을 이어 가고 싶었다. 그래서 답장도 없는 카톡을 계속 남겼던 거고.
“인서가 좀 까칠해요. 성격이니까 기죽지 말고. 잘할 수 있죠?”
“잘해 볼게요.”
“오빠, 내가 걱정 말라고 했죠? 향기 노래 잘해요.”
정진은 은주의 말이 사실이길 바라며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쳤다. 향기의 실력에 대해 확신은 없다. 그녀의 노래를 직접 들어 본 적 없으니까. 그런데 왜 연락을 했냐고 물어본다면, 홍대에서 리듬을 타며 눈을 반짝이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 인서가 피처링해 줄 보컬을 구한다고 했을 때 향기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거다.
“고마워요, 오빠.”
“향기 씨한테 오빠 소리도 듣고, 소개한 보람이 있네.”
정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나디아 멤버인 창원과 인서를 소개받았다. 정진의 말대로 인서라는 남자는 까칠해 보였다.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키보드를 한 음, 한 음 누르고 있었다. 너 할 수 있겠어? 하는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향기는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 보는 장비들을 눈에 담았다.
인서가 기타를 들어 보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딱 봐도 우리랑 성향이 다를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무슨?”
“인디밴드거든요. 독립 음악. 어디에 소속될 생각 없이 음악이 좋아서 하는 거예요.”
“정진 오빠 말대로 기회만 주시면 돼요. 정말 감사해요.”
소음이 많은 거리에서 노래를 해 본 적 없는 향기였다. 앰프나 스피커도 필요하고, 은주가 반대했던 이유기도 하다.
“일렉 기타 연주해 봤어요?”
“아니요. 저는 이것밖에 다룰 줄 몰라요.”
향기가 기타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냈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평범한 어쿠스틱 기타를.
인서는 귀찮다는 생각에 정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말해 두는데 실력 안 되면 같이 버스킹 못 해요.”
“뭐가 그렇게 급해? 차나 마시고 얘기하지.”
노골적으로 귀찮아 하는 표정을 짓는 인서에게 정진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보다 못한 창원이 인서를 밀치고 건반 앞에 앉았다.
“무슨 노래 부를 거예요? 같이 부르다 중간에 빠져 줄게요.”
향기는 고개를 젓고 의자에 앉아 가볍게 줄을 튕겨 기타 조율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창원이 “올.” 하며 추임새를 넣고 향기의 키에 마이크를 맞춰 주었다.
향기가 허밍으로 음을 타기 시작했다.
뜻밖의 동요 전주에 창원과 인서, 정진까지 어이없다는 듯 황당한 얼굴을 했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알 수 없는 둘리…….〉
그러나 곧 향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들이 하나같이 믿기 어렵다는 듯 표정을 바꾸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은주는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작게 소곤댔다.
“저건, 향기 목 푸는 노래예요. 최애 곡.”
창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생긴 것처럼 목소리도 맑고 투명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듣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가 될 것 같은 목소리. 하지만 그런 음색은 처음 몇 번만 좋지 계속 듣다 보면 질린다. 그런데 향기의 목소리는 플러스 한 끗이 있었다. 맑으면서도 감정을 들쑤시는 소울이.
정진이 중얼거렸다.
“내 귀가 이상한 거야? 왜 둘리 노래에 소울이 느껴지냐?”
“아니, 정상이야. 나도 느꼈으니까.”
분명 비눗방울같이 퐁퐁 튀는 경쾌한 멜로디인데 아릿한 감정이 생겼다.
이 동요가 이렇게 슬픈 노래였나. 가사가 귀에 콕콕 박혀 와 엄마를 찾지 못하는 둘리의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해석 능력이 타고난 건지, 표현력이 남다른 건지.
동요가 끝나자 정식으로 노래가 시작됐다.
고(故)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창원이 인서에게 물었다.
“저 곡 리메이크했었나?”
“아니. 지금 바로 리메이크한 것 같은데.”
“아씨, 녹음, 아니 동영상!”
정진은 창원이 소란스럽게 떠드는데 향기의 노래만 들렸다.
비가 내리면, 하는 한 소절에 게임이 끝났다. 향기의 감성이 남달랐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가사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착각. 반짝이던 향기의 눈동자는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가사를 녹여 내듯, 그녀의 목소리에 공허한 쓸쓸함이 그대로 묻어나 듣는 사람이 다 가슴이 저릿저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