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20화 (20/56)

# 20

20화.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연선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너 혹시…… 사, 사고 쳤니?”

애라도 가졌다면 어쩔 수 없지만 연선도 보는 눈이 있다. 되바라져 보이는 여자라면 아들을 홀렸겠구나, 할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교복을 입은 애들도 화장을 하는 시대에 별세계에서 온 듯 말간 얼굴이다. 오죽하면 낯선 여자가 아들의 집에 있는데 의심 없이 스타일리스트 막내가 바뀌었나 생각했을까. 그 정도로 앳되고 아들의 취향과는 동떨어진 타입이었다. 도대체 뭘 보고?

“아가씨가 말해 봐요. 우리 아들과 결혼할 거예요?”

“……네.”

“하, 집에서 허락은 받았어요? 아가씨가 이러고 다니는 거 아냐고요?”

“어머니!”

무현이 말을 자르자 연선이 멈칫했다. 무현은 가족들을 찬찬한 시선으로 쭉 둘러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잊으셨어요? 결혼만 하면 된다고, 제 뜻대로 하라고 다들 말씀하셨잖아요.”

연선은 단호한 무현의 목소리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매달릴 곳이라곤 여자밖에 없었다.

“아가씨, 보상해 줄게요. 형편이 어려우면 무조건 도와주고. 굳이 결혼 같은 거 안 해도 돼요.”

무현이 목소리를 낮춰 연선을 다시 부르자 향기는 그를 바라보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저씨, 제가 대답할게요.”

여자의 말에 연선과 이진의 놀라 커다래진 눈이 마주쳤다.

엄마, 오빠더러 아저씨래?

어머, 쟤 무현이 다루는 것 좀 봐.

스물셋이라고 했던가. 결혼하자면 못할 나이는 아니다. 무현과 나이 차가 나지만 띠동갑도 훨씬 넘는 결혼을 하는 남자들도 허다한 세상. 하지만 연하에도 급이 있다. 연선은 불을 뿜듯 아들을 노려보았다.

“그래요. 아가씨가 대답해요. 아가씨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목숨을 구해 줬다고 결혼이라니. 그리고 아가씨도 결혼하기엔 일러 보이고.”

연선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향기는 고개를 끄덕이곤 제 집안 사정을 얘기했다.

“보상은 필요 없어요. 그게, 제가 사정이 있어서요.”

무현의 가족들은 향기가 하는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했고 연선은 뒷목을 잡았다. 저런 애를 며느리로 삼으라고? 잘 배우고 집안 좋은 여자를 다 마다하더니 하필이면 저런 여자를 데려와? 정치하는 집 여식은 안 된다는 시아버지의 뜻만 아니었다면 장차관 딸도 넘치는데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선을 보고 있었거든요. 죄송해요.”

“누구든 상관없는데, 마침 우리 무현이가 청혼을 해서 결심을 했다, 그 말이에요?”

“음, 누구든은 아니고……. 아저씨가 잘생겼잖아요.”

어머나, 얘 봐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속없이 웃는 걸 보자니 연선의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무현은 잘했다는 듯 향기에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리고 안쓰럽다는 생각에 잡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그의 손에 축축함이 느껴질 정도로 향기의 손에 땀에 흥건했다.

“제 결혼 원하셨잖아요? 혼인신고부터 하겠습니다.”

전부터 결혼을 한다면 양가 가족만 모아 놓고 약소하게 하겠다고 말했던 무현이었다. 매스컴에 노출되는 걸 꺼려 하는 조부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일이었다.

연선이 나섰다.

“그건 안 돼. 네가 뭐가 부족해서.”

“약속하셨잖아요.”

“그건 그때 얘기지. 결혼식은 올려야 해.”

“어멈아, 그만했으면 됐다.”

조부가 보다 못해 나섰다. 쯧, 단순한 인사 같으니라고. 무현이 결혼식 운운하며 제 어미를 한 번에 넘겨 버렸는데 연선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게 한심했다.

결혼하기 싫다는 녀석을 아내와 며느리가 지나치게 볶아 댄다 싶었다. 집안 사정이 그러니 아녀자들 편을 들어 주면서도 걱정했었다. 모든 게 미심쩍지만 속아 줄밖에.

“아들이 죽는 것보다 낫잖은가. 결혼한다는데. 더는 욕심 부리지 마시게.”

무현은 조부의 말에 안도하면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말하기보다는 듣는 걸 중시하는 분이라 속을 알기가 어려웠다. 조부가 부드럽게 눈매를 풀었다.

“무현아, 아무리 사정이 급해도 동거는 보기가 그래.”

“곧 향기 할아버님 모셔 오겠습니다.”

“그건 알아서 진행하고, 네 뜻대로만 하고 살 순 없지?”

무현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슬쩍 미간을 좁혔다.

“어멈도 서운할 거고 집안이 적적해서 하는 말인데, 합가해라.”

“못 합니다.”

무현의 대답이 단호한데 조부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그럼 결혼식은 어멈 뜻대로 해 주든지.”

“할아버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무현을 끈질기게 기다려 주던 조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건 어떠냐. 일주일에 이틀은 집에 와서 지내는 거.”

어쩐지 쉽게 풀린다 생각했다. 무현은 부처님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힘이 없다는 신호였다.

“대신 언론 쪽은 내가 막으마. 흠. 손부라고 불러야 하나. 아가, 넌 어때?”

“네?”

“네가 같이 지내는 게 싫다면 내 강요 안 하마.”

“저, 저는 괜찮아요. 좋아요.”

해맑게 미소 짓는 향기를 보고 조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고 그녀를 바라보는 무현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 * *

무현은 방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쳤다. 가족들이 돌아간 후 저를 좇는 향기의 시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다른 때 같으면 볼일이 끝나기 무섭게 방으로 들어가더니 오늘은 잔뜩 풀이 죽어 그의 주변을 서성인다.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나란히 소파에 앉는 영광까지 주고. 너무 놀라서 그런가. 어머니의 반대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의 오해로 일이 너무 쉽게 풀려 버렸다. 오해를 받은 향기는 억울하겠지만 무현은 솔직히 홀가분했다.

이 결혼을 진행해야 할지 말지 고심했는데 숙제를 해치운 기분. 무현은 기어이 책을 내려놓고 TV에 시선을 고정한 향기를 바라봤다.

“뭐 할 말 있어?”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뭘 물어볼까.”

향기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무현이 물었다.

“술 마실 줄 알아?”

“……네.”

“한잔하자.”

피곤할 땐 알코올이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괜찮겠지. 미니바로 향하던 무현은 방향을 틀어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위스키보다는 무난한 술이 나을 것 같았다. 소주와 맥주를 꺼내 놓고 간단한 안주를 준비해 식탁에 앉았다.

“주량은 어떻게 돼?”

“잘 몰라요.”

할아버지만큼은 마신다는 뒷말에 무현이 할아버지 주량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취하시는 거 한 번도 못 봤어요.”

“알아서 적당히 마셔.”

이제야 향기 같다는 생각을 하며 무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멀뚱히 허공을 향해 심각한 얼굴을 하다 눈을 반짝이는 게 향기다웠다. 무현은 향기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오늘 수고했어.”

“아저씨 엄마인 줄 몰랐어요.”

“많이 놀랐어?”

주량이 좀 되는지 고개를 젓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게요. 집사람이라고 해서 오해를 하셨던 것 같아요.”

궁금하긴 했다. 집사람이라는 말이 왜 나왔고 어떻게 동거로까지 연결됐는지. 그 덕에 일이 쉽게 풀렸지만.

“집.지.키.는.사.람의 줄임말이었거든요.”

무현은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삼켰다. 향기와 지내면 웃을 일은 많을 것 같았다.

“요즘 제가 스마트폰에 미쳐 있었어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

한 달에 두어 번 읍내에 나갈 때나 PC방에 가는 향기였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갖게 되어 친구들과 SNS을 연결하고 대화를 하다 보니 못 알아듣는 말이 많았다. 제 나이 또래 애들이 즐겨 찾는다는 웹에 들어가 봐도 마찬가지. 마치 그들만의 통신어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정진과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다시 물어봐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신종어도 익히고 말도 줄여 쓰고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미안해요.”

“그러니까 ‘집사람’이 집지키는 사람의 줄임말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무현은 크게 웃었고 향기는 더욱 시무룩해졌다.

“거기다 아저씨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더 오해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게, 그 원피스는 뭐냐고 묻고 싶은 걸 무현은 간신히 참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발목까지 오게 접어 신은 양말과 세련된 원피스는 누가 봐도 부조화였다.

“결혼 무르고 싶어?”

“……아니요.”

동거하고 있냐고 묻는데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 동거는 동거니까. 그러나 막상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자 창피하고 가슴이 콕콕 쑤셨다.

“그럼 됐어.”

무현은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궁금한 게 있었다.

“왜 집에 들어가서 지내겠다고 한 거야?”

“아저씨 가족한테 미안했어요.”

계약 결혼. 향기에겐 소설 속에서나 있는 얘기였다. 막연히 두렵고 옳지 않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무현의 가족을 만나자 그 무게가 달랐다. 죄인이 된 것 같아 어른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화를 내는 어머니가 이해가 되고 저를 손부라 불러 주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죄송했다. 그래서 원하시는 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너희 할아버지한테는 죄송하지 않고?”

“저는 할아버지 한 분이지만 아저씨는 식구가 많잖아요.”

미안한 것만 생각하고 곤란해질 일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향기의 단순함에 한숨만 나온다.

“그런데요, 아저씨.”

“또 뭐?”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왜 결혼하자고 했어요?”

“…….”

“아저씨가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러게 왜 그랬을까. 가족들의 성화 때문에? 하루 이틀 겪은 일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무현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향기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