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18화 (18/56)

# 18

18화.

Chapter. 4

드레스 룸에서 옷을 갈아입던 무현은 피식 입술을 늘렸다. 한쪽에 비스듬히 세워진 그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여튼 있으나 없으나 웃게 만드는 덴 재주가 있는 여자다.

향기가 서울 나들이를 나가고 며칠 쉬게 했던 도우미 아주머니를 불렀다. 앞으로는 두 사람분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말하고 청소를 부탁했다.

‘잠깐 들어와 보시겠어요.’

마침 그도 향기가 쓰고 있는 방에 볼일이 있던 참이었다. 갑작스럽게 방을 내주고 미처 챙겨 나오지 못한 물건을 가지고 나와야 했다. 욕실에서 면도기를 챙겨 나오는데 아주머니가 ‘저건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가리킨 곳을 보곤 무현은 실소하고 말았다.

침대 위에 걸린 그의 사진이 가려져 있었다. 핑크색 하트로 도배된 무릎 담요로. 향기가 물어보던 게 생각났다.

「방 바꿔 주면 안 돼요?」

그의 사진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는 향기의 말이 무현은 저의 방을 차지하고 미안해서 하는 말인 줄 알았던 거다. 무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착각은 자유라더니…….”

사진을 떼 내면서 얼마나 황당하던지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브로마이드 하나 받으려고 난리 치는 팬들이 얼마나 많은데 보기 싫다고 가려? 순간 유치한 마음이 생겼다. 방안을 온통 팬들이 보내 준 그의 사진이 프린트된 침구로 도배를 해 줄까, 하는. 은근히 사람을 자극하는 맹랑한 구석이 있는 향기였다.

드레스 룸을 나서던 무현은 시간을 확인하고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첫 외출이 꽤 길다. 조금 늦을 거라는 연락을 받긴 했지만 향기가 아니라 정진한테서였다. 휴대폰을 구입한 카드 명세서가 휴대폰에 찍힌 걸 보면 개통을 한 모양인데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용도를 모르는 건가. 하여튼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하는 여자다.

“공범이라.”

어떤 범죄에 가담하는지는 알까 궁금하다. 또 어머니 연선이 향기를 보면 뭐라고 할지도.

‘어디서 저런 젖비린내 나는 애를…….’

잘하면 꿈나무 하나 키우게 생겼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무현은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하고 욕실로 향했다.

* * *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무슨?”

“결혼.”

서늘한 무현의 목소리에 움츠러들었던 향기의 눈이 커다래졌다.

“결정했어요?”

“그래.”

“안 해요. 절대.”

제법 단호한 목소리를 내는 향기를 무현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향기에겐 기회를, 그에겐 집안 독촉으로부터의 자유를. 더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 허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자, 결혼.”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향기를 보고 무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결혼이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던가. 이왕 마음먹은 거, 최대한 빨리 해치울 생각이다. 무현은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얘기하고 말을 이었다.

“작품 들어가면 늘 바빠. 못 들어오는 날도 많고.”

“아, 괜찮아요.”

“그러니까 음악하고 싶으면 대학 가는 거 생각해 봐. 전문적으로 배우는 게 낫겠지. 친구 사귈 수 있는 기회도 되고.”

실용 음악을 전공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전과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보컬 트레이닝 받는 것도 좋을 거라고. 향기는 그럴 생각은 없지만 무현의 성의를 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무현이 서울 구경은 재미있었냐고 물었고 향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폰은 개통했고?”

“네. 최신형으로.”

정진이 신기한 어플을 많이 깔아 줬다며 자랑을 한다. 전화 본질의 기능은 까맣게 잊어버린 여자가.

“번호 내 폰으로 보내 놔.”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대폰을 조물락거리더니 그의 휴대폰에 띠링, 문자 알림이 울렸다.

[ㅜㅜ:;]

이건 무슨 의민데? 무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향기를 바라보았다.

“휴대폰 사 줘서 고맙다고요. 그런데요, 아저씨.”

무현은 향기의 입에서 나오는 ‘그런데요’에 미간을 찌푸렸다. 저렇게 토를 달면 그의 속을 뒤집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카드를 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고민하지 말고 늦으면 늦는다, 연락이나 해.”

“정진 오빠가 연락하지 않았어요?”

“정진이 너야?”

스케줄 때문에 바쁠 거라고 했던 무현이었다. 방해가 될 것 같아 망설이는 사이에 정진이 연락을 했던 거다.

“명심해. 서울에선 내가 보호자니까.”

“그래서 밥만 먹고 왔는데…….”

“밥만 먹지 그럼 또 뭘 하려고?”

“홍대에 갔었거든요.”

향기는 정진에게 들은 대로 말했고 무현의 얼굴은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하, 이 녀석 봐라. 어디서 작업을…….

“술 마시고 싶어?”

“것보다 친구들과 주점이나 포차, 그런 데 가는 거 해 보고 싶었어요.”

방학이 돼서 고향을 찾아온 친구들을 만나면 술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진이 술 얘기를 했을 때 귀가 솔깃했었다.

무현은 향기의 말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겨우 대학가 주변에서 친구들과 노는 게 부러웠다는 여자와 결혼이라니. 결혼을 한다면 언론에 노출되고 주목받을 게 뻔하다. 많은 제약이 따를 텐데 향기가 감당할 수 있을는지 걱정이 앞선다.

* * *

“그러니까 네 방을 내줬다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무심한 얼굴로 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루 만에 가이드가 더는 필요 없다는 연락이 왔다. 전화를 끊고 바로 정진에게 연락을 넣었다.

“가이드 더 안 해도 돼.”

-왜? 향기 씨 벌써 내려간 거야?

일을 부탁할 때만 해도 시큰둥해하던 녀석이 실망스런 목소리를 내는 게 수상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여자에 대해 묻자 한마디로 차무현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다.

“네가 어떻게 알아?”

-퓨어해. 전혀 다른 부류.

확신에 찬 목소리라 안심했었다. 그리고 오늘 갑작스럽게 광고 촬영 일정이 변경돼 아침 일찍 무현을 데리러 왔다. 그런데 낯선 여자와 식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더 황당한 건 여자가 무현의 방으로 들어가며 자리를 피해 준 거다.

“이번엔 그냥 못 넘어가겠다. 설명해. 어떻게 된 일인지.”

“결혼할 여자.”

그렇지 않아도 정우에게는 사정을 얘기할 생각이었다. 지금이 아니라서 그렇지.

정우는 무현의 말에 입을 벌린 채 잠시 멍했다. 그리고 다급히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찾다가 고개를 붕붕 젓고 물었다.

“차무현, 이거 혹시 몰카야?”

요즘 방송사마다 과거에 영광을 누렸던 예능을 재조명하고 있다. 무현이 혹시 저 모르게 몰래카메라를 찍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정우는 곧 떠오르는 생각에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이 만우절인 줄 알아? 장난 그만해.”

“장난?”

“너 선보는 거 내일로 미뤄졌잖아. 어머니한테 연락받았어. 너 내일 스케줄 꼭 비우라고.”

“…….”

무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맞선을 안 보겠다고 하자 연선이 임의대로 약속을 미뤘다. 그렇지 않아도 오전에 본가에 들러 향기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스케줄이 잡혀 일이 꼬여 버린 거다. 늦은 저녁이나 돼야 본가에 갈 수 있을 텐데 그 밤에 일어날 소란을 예상하니 벌써부터 골이 지끈거린다.

“하, 그런 놈이 결혼을 한다고? 나 놀리니까 재미있어?”

“나중에 얘기하자.”

웃음기 없는 목소리가 불길해 정우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진심 마지막으로 물을게. 진짜야?”

무현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래.”라고 말하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안녕히 가세요.”

“그…… 이름이.”

“류향기에요.”

정우는 화장기 없는 솜털 뽀송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늘씬하다, 예쁘다, 섹시하다, 외적 모습을 평가하기 전에 그냥 어린 여자다. 발목이 보이게 접어 입은 청바지, 흰 티셔츠에 체크무늬 셔츠를 겹쳐 입은 모습이 정진의 말대로 무현과 엮어 보려고 해도 각이 나오지 않는.

어떻게 만난 걸까. 무현의 팬 층이 다양한데, 팬인가. 혹시 실수라도 해서 약점을 잡힌 걸까. 이래저래 고개가 저어진다. 주량도 되거니와 자기 관리가 허술한 녀석이 아니기에. 액면가, 아무리 잘 봐 줘야 스무 살? 무현과 결혼 얘기가 나올 만한 접점이 없는 여자였다.

질문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데 옷을 갈아입고 나온 무현이 제 어깨를 툭 쳤다.

“가자.”

떠밀리다시피 현관을 나서는데 “아저씨?”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정우는 또 한 번 놀랐다. 아저씨라고? 차무현이?

“저 오늘 집에 있어요?”

누가 드라이브를 시켜 달라고 했나. 늦은 밤에 새카맣게 선팅된 차를 타고 나가 성곽을 돌다 들어왔다. 그러고는 오늘은 집에서 쉬란다.

“답답해도 집에 있어.”

“그러니까 집! 지키라는 거네요? 우리 강남이처럼?”

향기는 대답 없는 무현의 등에다 대고 “정말 나쁜 아저씨야!”라고 종알거렸고 무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정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멍해졌다. 투정부리듯 불퉁한 목소리를 내는 여자는 그렇다 쳐도 일일이 대꾸하며 미소 짓는 무현이 신기했다. 카메라도 없는데, 통장에 돈이 입금된 것도 아닌데, 이 인간이 감정 실린 미소를 짓다니. 저런 미소는 조카들 한정 미소였다. 정우는 뭔가에 홀린 듯 현관을 나섰다.

무현이 나가자 향기는 기타를 갖고 나와 거실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땅콩같이 생긴 기타 바디를 끌어안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오랜만이야, 엄마.”

가볍게 줄을 튕겨 보던 향기가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다. 서울 와서는 처음 잡는 기타였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굳은살 박인 손끝이 저릿하다. 하지만 곧 능숙하게 줄을 풀고 감아 튜닝을 한다.

“아, 아!”

발성을 해 보고 줄을 또로롱 튕기자 동요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멜로디에 맞춰 허밍하던 입술이 벙긋벙긋 벌어진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알 수 없는 둘리 빙하 타고 내려와 친구를 만났지만 일억 년 전 옛날이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엄마 찾아…….〉

맑으면서도 특색 있는 음색이 거실을 가득 메우며 향기의 눈동자가 밝게 빛을 낸다. 자장가처럼 엄마가 불러 주던 만화 주제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