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17화 (17/56)

# 17

17화.

“술이요?”

“공연 보고 한잔할래요? 여기 홍대에 유명한 술집이 많아요. 술이 목적이 아니라 주류 문화를 보여 주고 싶어서요.”

“다음에요. 너무 늦을 거 같아서요.”

“술 땡기면 아무 때나 연락해요. 꼭요.”

“여긴 노래 부르는 사람들이 정말 많네요?”

“전국에서 버스커들이 다 이곳으로 모여요. 요즘은 아마추어 댄서들도 많이 모이고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있었다. 앰프에서 쿵쿵거리는 비트가 터지자 사람들이 열광하며 호응을 해 준다.

“오디션장이나 다름없어요. 잘하면 대형 기획사로 갈 수 있거든요.”

향기는 기획사에서 가능성 있는 사람들을 뽑아 간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정진은 공연에 빠져드는 향기를 눈에 담았다. 중학교 때까지 그도 시골에서 살았었기에 향기의 마음이 십분 이해됐다.

“버스킹하는 친구들 있는데, 소개해 줄까요?”

“정말요?”

“그럼요. 향기 씨 노래 잘하나 보다?”

“그냥, 조금요.”

향기의 대답이 의외라 정진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당연히 못한다고 뺄 줄 알았는데 들뜬 표정이다.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 여자였다.

“언더에서 꽤 유명한 친구들인데 소개해 줄게요.”

향기는 싱긋 웃고는 바로 버스커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 * *

강남 **타임스퀘어 홀에서의 드라마 제작 발표회.

입구부터 팬들이 화환 대신 보내 준 쌀과 라면이 배우들 포스터 아래 쌓여 있다. 그들 중 단연 글로벌한 차무현의 팬들이 기증한 물품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무현이 오랜만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드라마라 취재진 또한 쟁쟁했다.

포즈를 취하는데 여배우 손인이가 다가와 은근히 무현에게 팔짱을 껴 왔다.

“선배님 같이 사진 찍어요.”

무현은 그녀가 무안하지 않게 팔을 빼고 손짓으로 우일을 불렀다. 극중 손인이의 러브라인은 우일이기도 하고 스킨십이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손인이는 마지못해 우일과 포토 존에 섰고 그들을 렌즈에 담는 기자들은 '역시, 차무현-'이라고 입을 모았다. 거절하는 무현의 매너가 우아하고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철벽은 여전하네. 뭐가 있을 법도 한데. 신기하지?”

“저러다 한 방 터지면 크지.”

연예인의 연예인, 차무현. 데뷔 이후 지금까지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없었다. 오죽하면 게이설이 나돌았을까. 그의 매니저가 주는 간식거리 가십이 반가울 정도라면 말 다 한 거다. ‘차무현의 매니저 아무개 씨……….’ 그렇게라도 차무현의 이름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얼마 만이지?”

“좀 됐지. 오늘도 베스트 드레서다.”

누구나 입는 블랙 슈트인데 단연 돋보인다. 치아를 보이지 않는 미소도 그렇고 서 있는 자체만으로도 자체 발광이라 무현의 동선을 포착하려는 열기가 뜨거웠다.

기자들은 연신 셔터를 누르며 무현의 팬들이 보낸 조공도 기삿감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100퍼센트 사전 제작인데 흥행할까?”

한국에선 사전 제작을 한 드라마는 드라마의 늪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흥행이 어렵다.

“주인공이 차무현이잖아. 중국 심의도 통과했고. 90퍼센트는 먹고 들어가지.”

편당 몇 억씩 하는 중국 시장의 심의를 통과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작품성과 별개로 흥행 보증 수표였다. 완성도보다는 트렌드를 반영해야 하는 사전 제작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만큼 한류 스타 차무현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하여튼 작품도 기막히게 고른다며 기자들은 질문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포토타임 이후 취재진의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자 무현은 감독과 인사를 나누고 홀을 빠져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밴에 오르자 정우가 생수병을 건넨다.

“벌써 짤 도는데 반응 대박이다.”

미공개 티저 영상이 풀렸는데 반응이 뜨겁다며 정우의 목소리가 상기돼 있었다. 무현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뚜껑은 열어 봐야 알지.”

“작품 좋고 주연 배우가 무려 차무현인데 겸손은.”

“잘되면 좋지.”

몇 년 만에 선택한 드라마였다. 쪽대본에 시달리지 않는 사전 제작이라는 것도 끌렸고 워낙 대본이 탄탄했다. 드라마는 영화와 달리 호흡이 긴 편이다. 미완성 대본으로 스타트를 하면 시청자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들의 반응에 따라 자극적인 요소, 혹은 없던 에피소드가 만들어지고 연장도 불사한다. 그래서 막장, 산으로 가는 드라마라는 소릴 듣는다. 그게 무현이 드라마에 자주 얼굴을 비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대표님이 얼굴 좀 보자고 하시던데, 시간 괜찮아?”

“사옥에서?”

“왜, 약속 있어?”

“아니.”

소속사 사옥 방향으로 운전대를 트는 정우에게 무현이 물었다.

“집에 보내 준 친구.”

“정진이?”

“어떻게 아는 사이야?”

정우는 백미러로 무현을 살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말문을 열어 준 게 고마웠다.

“나도 좀 물어보자. 우리 배우님이 가이드를 붙인 여자가 누군지.”

“…….”

“집에 여자 들인 거 맞아?”

“집으로 사람 보내 놓고 뭘 물어.”

무현의 대답에 정우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어제 무현에게 전화가 왔다. 서울 시내를 가이드해 줄 사람을 구해서 집으로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알 것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런데 뒤에 덧붙인 말이 히트였다.

이십 대 초반 여자니까 편하게 어울릴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폭풍처럼 질문을 쏟아 냈지만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밤새 뒤척이며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 너도 인간이구나. 참을 만큼 참은 건가. 그런데 웬 서울 구경? 워낙 자기 관리가 철저한 녀석이라 믿으면서도 찜찜하다.

“말해 봐.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친구 누군지나 말해.”

“내 사촌 동생이야. 입 무겁고 우리 대학 후배고.”

스캔들이라도 나면 곤란하기에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뇌물까지 주면서 바쁘다는 사촌 동생을 섭외해서 보내 줬는데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잔뜩 얼굴을 구긴 무현이 의아하다.

“믿을 만한 녀석이니까 걱정 말고 무슨 일인지 말이나 해 봐.”

“나중에.”

무현의 목소리가 무거워 정우는 더 묻지 못했다.

“배우님, 내가 네 매니저라는 것만 잊지 마라.”

무현이 생각에 잠긴 듯 휴대폰 액정을 툭툭 두드리다 물었다.

“가수 오디션 보고 있어?”

“왜? 이사님 직함에 맞게 일 좀 하게?”

“장난 말고.”

“보긴 하지. 주로 아이돌이나 걸그룹 위주로.”

오늘따라 무현이 수상하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이 냄새의 정체가 뭘까.

소속사 사옥에 들어서서 후배들의 인사를 받고 정우와 엘리베이터 존으로 향하는데 낯익은 얼굴이 빠르게 다가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무현은 인사를 받아 주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 정우에게 물었다.

“저 친구가 걸그룹 출신인가?”

“누구? 예나?”

“몇 살이지?”

“스물넷. 지난번 너하고 영화 찍었는데, 기억 안 나?”

그래서 낯이 익었나 보다. 걸그룹이 해체되면서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친구라고 했다. 재능도 있고 노력하는 친구라고 꽂아 넣기를 부탁해 왔던 게 기억났다.

“꽂기 성공 케이스지. 너한테 도움받았다고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래서 떴어?”

“요즘 예능 대세야. 쟤 인터뷰 한 거 못 봤어?”

“무슨 인터뷰?”

“인터뷰마다 자기 이상형은 차무현 선배라고 하도 떠들어서 너 실검 1위 자주해.”

무현은 입술을 비틀었다. 일종의 마케팅. 대스타를 이상형으로 꼽고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게 그들 사이에선 비일비재한 일이다.

정우가 호기심 찬 눈을 하고 물었다.

“왜, 관심 있어? 만나 볼래?”

“넌 저 어린애가 여자로 보여?”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스물넷이 어려? 그리고 연애하는데 나이 차이가 무슨 상관이라고.”

“네 나이를 생각해.”

소속사에 들어서면서부터 여자 후배들에게 눈길이 갔다. 향기와 비슷한 또래들로 보이는 여자들에게.

엘리베이터가 서자 정우는 싱글거리며 내렸다.

“신기하단 말이야.”

“뭐가?”

“여자를 다 눈여겨보는 차무현이?”

욕심내 보라고 말을 보태는 정우를 무시하고 무현은 대표실로 향했다.

“쓸데없는 말은."

무현은 대표실로 향했다.

잠시 후 그의 사무실로 들어온 무현은 ‘이사 차무현’이라고 찍힌 명패를 툭 쳤다. 정우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무현은 혼잣말을 했다.

“번거롭게. 괜히 맡았나.”

“왜, 합병한대?”

“말은 전략적 투자라는데, 투자를 더 받고 싶은 거겠지.”

정우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무현이 이해돼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를 돕느라 이사 직함을 달고 있지만 무현의 집안 사업에 비하면 새 발의 피. 가업도 잇지 않겠다고 선언한 녀석이 기획사 몸집 부풀리기를 환영할 리 없었다.

“누굴 탓해? 대표님 빅 픽처에 걸려든 너를 탓해야지.”

과학고를 나와 한국대 입학. 무현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수재다. 고등학교 때 퀴즈 프로그램에 나온 무현을 우연히 보게 된 대표가 끈질기게 러브콜을 보냈다. 대표 표현을 빌리자면 보는 순간 딱 주연감이라는 감이 왔단다. 생긴 건 둘째 치고 분위기가 된다고. 끈질긴 회유에도 끄덕 않던 무현이 대학에 입학하고 일 년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제 발로 대표를 찾았다. 덩달아 정우 저까지. 그때만 해도 규모가 크지 않던 CN엔터테인먼트. 무현과 같이 성장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정우가 무현을 툭 쳤다.

“저녁 먹고 들어갈래? 술이나 한잔하든지.”

“……연락이 안 오네.”

“약속 있어?”

무현은 대답 없이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모호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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