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9화 (9/56)

# 9

9화.

침대에 누운 향기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강남이를 보며 종알거렸다.

“강남아, 넌 아저씨가 어때?”

밖에 무현이 있기 때문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향기는 아예 몸을 뒤집어 침대에 엎어졌다. 손을 내린 그녀가 강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뚝뚝해도 괜찮은 사람 같지 않아? 말해 봐.”

할아버지보다도 더 과묵한 사람은 처음 본다. 열 번을 부르면 한 번 쳐다봐 줄까? 그러면서도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해 준다. 성철이 아니고는 남자와 이렇게 오래 같이 있어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무현은 불편해 보였지만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해.”

문을 열고 무현이 괴물처럼 저를 덮쳤을 땐 기절하는 줄 알았다. 할아버지도 안 계신데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집에 들이지 않았을 거다. 우선은 사람을 살리고 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가 깨어나고 잔뜩 날을 세웠지만 곧 느슨해졌다. 죽다 살아난 사람이 설마 하는 마음도 있었고 대책 없는 아이를 야단치듯 저를 바라보는 눈빛 때문에. 시골에 산다고 눈치까지 없는 건 아니다. 커 가면서 마을 아재들의 음흉한 시선이 닿을 때마다 곤혹스러웠다. 할아버지가 그녀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하지만 무현의 눈빛은 아재들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불이 치마인 줄 알았다니까.”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되도록 이불을 움켜쥐던 모습이 떠올라 향기는 숨죽여 키득댔다. 저를 경계하는 모습 때문에 더 믿음이 갔나. 할아버지가 못 온다는 말에 거처를 옮기겠다고 하는 것도 플러스 요인이 됐던 것 같다.

향기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람 무안하게.”

뭐든 해 줄 것처럼 굴기에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너 제정신 아니지? 하는 무현의 시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미 뱉어 낸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향기는 강남이의 털을 마구 흩뜨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실은 있잖아. 그건 교통사고 같은 거였어.”

길을 건너다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하는 것처럼. 왜 그랬는지 정말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미쳤었나 봐. 아니면 엘프라? 무현은 뭐든지 부드러웠다. 가슴이 콩닥콩닥 뛸 만큼. 진한 갈색빛 도는 머리카락도, 탄탄한 몸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살짝 찡그리는 얼굴도 전혀 밉지 않았다. 거기다 매끈한 서울 말씨를 쓰는 목소리까지 듣기 좋았다.

향기는 팔목을 쓱쓱 문지르며 눈을 치켜떴다.

“손은 왜 잡아?”

얼마나 세게 잡혔었는지 팔찌를 두른 것처럼 아직도 그녀의 손목이 빨갛다. 그런데 얼굴이 왜 이리 화끈거리는지.

“잘생기긴 했어. 그래도 아닌데…….”

무현만큼은 아니지만 현수도 서울말을 쓰고 키 크고 잘생겼다. 읍내에서 휴대폰 매장을 하는 우식이도 봐 줄 만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호기심도 눈길도 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무현은 보고만 있어도 흐뭇해진다.

“그래도 그렇지 뭘 그렇게 놀라?”

생각할수록 민망하고 속상하다. 그딴 건 왜 물어봐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향기는 머리맡에 둔 앨범을 펼쳤다. 달빛에 의지해서 그림을 그리듯 사진 속 얼굴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엄마 소원 들어주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어떻게 하지…….”

달빛이 어두운 방을 은은히 밝히고 깜빡깜빡, 느릿하게 향기의 눈이 감긴다.

* * *

“그래서 몸은 괜찮은 거요?”

“네. 손녀 따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무현은 향기를 향한 어르신의 걱정 어린 시선이 제 탓인 것만 같아 머리를 조아렸다.

동이 트기도 전에 향기의 할아버지가 돌아왔다. 제 딴에는 방에서 자는 향기를 보호한답시고 거실에서 잠이 들었다. 평소엔 예민한 편인데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었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컴컴한 새벽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꼼짝 못 하고 엎어져서 어른의 화를 감당하는데 향기가 뛰어 나와 설명을 했다. 어른과 방으로 들어간 향기는 한참을 꾸중 듣고 나온 눈치였다.

“제 불찰입니다.”

“됐어요.”

“말씀 놓으십시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성철은 굳은 얼굴을 풀지 못한 채 묵직한 한숨을 뱉었다. 꿈자리가 뒤숭숭해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거실에서 자고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는 건 알겠는데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노기가 담겼던 성철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졌다.

“아래 펜션 예약했다고요?”

“네. 날 밝는 대로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그 다리론 무릴 거요.”

무현은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 같아 얼른 일어서고 싶었지만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어르신, 제가 너무 고마워서 그럽니다.”

“그래서요?”

“어떻게든 성의 표시를 하고 싶습니다. 뭐든 하게 해 주십시오.”

성철은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았다. 놀라서 불한당 대하듯 했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몇 번을 머리를 조아리니 마음이 누그러진다. 자세히 뜯어보니 번듯하게 생긴 게 흔한 인물이 아니었다. 말하는 거나 행동거지도 막돼먹은 인사 같진 않고.

“젊은 양반이 돈이 많은가 봅니다, 그려.”

성철의 말에 향기는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다. 불벼락이 떨어질 게 빤하기 때문이었다. 성철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고 일어섰다.

“그런 건 됐으니 따라 들어와요.”

“……?”

“절뚝거리던데 그 다리로는 못 내려갈 거요.”

무현은 어르신의 날카로운 눈빛에 기가 눌려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향기도 얼른 침통을 꺼내 와 할아버지 앞에 가져다 놓았다.

“향기 넌 나가 있고. 댁은 여기 누워요.”

무현은 주춤거리다가 어르신이 가리킨 곳에 길게 누웠다.

향기만 봤을 때는 밝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동정하는 마음도 있었다. 한창 또래와 어울릴 나이에 이런 산골에서 노인과 둘만 사는 처지가 안돼 보였던 거다. 방치하는 건 아닌지, 혹시 학대를 당하는 건 아닌지. 오죽하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결혼을 해 달라고 했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손녀를 바라보는 애지중지하는 눈빛, 할아버지를 대하는 향기도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아끼는 손녀인데 무현이 도둑놈처럼 보이는 건 당연했다. 멀뚱히 천장만 보고 있는데 어르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울 사는 사람이오?”

“네. 어르신.”

“며칠 무리만 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요.”

“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사례 얘기는 다시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한 이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라며 무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무현에게 침을 놔주고 나온 성철이 주방 식탁에 앉았다.

“겁도 없이…… 쯧.”

“그래도 사람은 살렸잖아요.”

“한 번만 더 그래 봐. 혼날 줄 알아.”

성철은 향기에게 주의를 주면서도 속으로 자책했다. 향기 혼자 집에 둔 자신을 탓해야지 정 많고 순한 손녀를 야단칠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친 건 그였다. 괜스레 아픈 제 벗까지 원망스러워 성철의 한숨이 깊어졌다.

“곧 시집갈 처녀가 흠 되면 어쩌려고.”

“그럴 사람으로 안 보였어요.”

“네가 사람 속을 어찌 알아?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성철은 가슴을 쓸어내려도 놀란 속이 가라앉지 않아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도 온몸이 떨려 온다. 이러니 불안한 거다. 언제까지 향기를 지키고 있을 수 없기에 더 빨리 짝을 찾으려는 거다.

“아무 일 없었어요. 강남이가 딱 지키고 있었는데요, 뭐.”

“그래 봤자 짐승이지.”

“잘못했어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역정을 내는 걸 본 적 없기에 향기는 가슴이 콩알만 해졌다.

“뭘 잘했다고 눈물 바람이야?”

“안, 울어요.”

무현이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집에 들이지 않았을 거라는 말은 사실이지만 반나절 만에 경계를 풀어 버렸다. 거기다 무현이 거실에서 보초를 서 준다는 생각에 오히려 편히 잠들었다. 제가 생각해도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다. ‘이상한 아저씨야’라는 말은 어쩌면 향기 자신이 들어야 하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향기는 어느새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저녁에 오리구이 해 먹어요.”

“먹고 싶어?”

“네.”

그녀가 잘 먹으면 흐뭇해하는 할아버지였다. 화를 풀어 주는 덴 이만한 방법이 없다.

“먼저 아침 식사 하실래요?”

“기다려. 30분이면 될 거야.”

성철이 대답을 하면서 방 쪽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녀석이 향기의 짝이면 딱 좋을 텐데. 훤칠하니 시원하게 생긴 것도 마음에 들고 듬직하니 진중해 보였다.

잠시 후, 세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향기가 할아버지 밥 위에 반찬을 올려 주고 헤헤, 웃었다.

“됐어. 너나 먹어.”

“에이, 좋으면서.”

“댁은 서울에서는 뭘 하는 사람이요.”

“……미디어 쪽 일 하고 있습니다.”

무현은 배우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느 집에나 있는 TV도 없는 집이었다. 어르신께 설명하기도 그렇고 향기에게 괜한 바람을 넣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며칠 후면 내려가는 데 지장 없을 거요. 빈방이 있으니 머물러요.”

“감사합니다.”

식사를 끝낸 성철이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향기가 빙긋이 웃었다.

“아저씨, 완전 쫄았죠? 이제 숨 쉬어도 돼요.”

“많이 혼났어?”

그새 눈이 퉁퉁 부었다. 코도 빨갛고. 그걸 보는 무현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웃는 낯이다.

“아니요. 우리 할아버지는 저한테 약해요.”

어릴 때는 옷이나 신발, 커서는 건강 보조 식품부터 시작해서 전자 제품까지. 향기에게 필요한 거면 바로바로 사들이는 할아버지였다. 살림도 향기가 고집을 부려 맡게 됐다. 무현은 집안을 한 번 쓱 훑고는 말했다.

“TV나 컴퓨터 필요하지 않아? 노트북도.”

“……그런 건 됐어요.”

향기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무현은 알아채지 못했다.

향기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무현이 설거지를 맡았다. 향기가 미덥지 않은지 흘끔거렸다.

무리도 아니지. 무현이 입술을 늘였다. 집에 사람 들이는 걸 싫어해서 작품을 쉴 때면 혼자 끼니를 해결하던 무현이었다. 늘 하던 일이었는데 어제는 정말 이상했다.

“세제를 너무 많이 풀었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