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5화.
“아저씨 엄청 운 좋은 사람인가 봐요.”
남자가 그녀의 집을 찾아온 건 기적이었다. 마을은 빠른 걸음으로도 삼십 분이 넘게 걸린다. 더구나 평지가 아니라 산 중턱에 위치해 있어서 곳곳이 낭떠러지다.
눈이 쌓여 완만해 보여도 잘못 디뎠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저승사자가 남자를 데려가려다 잘생긴 얼굴이 아까워 이곳으로 이끌어 준 건지도 모르겠다.
향기는 돌연 장난기 가득한 눈빛을 하고 테이블 위를 두리번거렸다. 여유가 생겨 그런지 뜬금없이 입에 사과를 물려 봐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백설 왕자? 훗.”
향기는 제 팔뚝을 주무르며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었다. 잘하면 저와 개들이 익어 버릴 판이다. 그래도 남자가 먼저였다. 문을 좁게 열고 개들을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너희라도 살아야지.”
그러나 고령인 강남이는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않고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늘어진다.
“역시, 강남이 넌 의리파야.”
주인을 지키겠다는 고집이 기특해 개껌을 물려 주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새벽까지 남자를 주물렀다. 몸은 좋은데 상식은 없는 남자를. 운동을 하는 사람인지 몸이 꽤 탄탄했다. 그 덕에 몇 시간 동안 산을 헤매고도 버틸 수 있었을 거다.
“이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지!”
자신이 뱉은 말을 털어 내듯 아이처럼 투레질을 하곤 미소를 짓는다.
“그냥 사람입니다. 남자가 아니고 그냥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희끄무레 회색빛을 띠자 남자의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잘생긴 얼굴도 벌겋게 익어 먹음직스러워 보이고. 숨을 고르게 쉬는 남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불을 꼼꼼히 여며 주던 향기의 눈이 커다래졌다.
멍하니 남자의 중심부를 쳐다보다 곧 얼굴을 붉히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저씨, 완전히 살아난 거 맞죠? 헤헤.”
본능이 이렇게 무서운 것일 줄이야. 이불도 들다니. 남자의 몸 상태를 보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향기는 새빨갛게 익은 얼굴을 하고 제 허리를 두드렸다. 문을 열자마자 쓰러지는 남자를 지탱하느라 허리에 무리가 온 것 같았다. 거기다 남자를 옮기느라 젖 먹던 힘까지 썼더니 온몸이 쑤셨다.
그래도 사람을 살렸다는 기쁨에 아드레날린이 솟는다.
“할아버지가 아시면 혼날 텐데. 강남아, 네가 편들어 줘야 해.”
* * *
얇은 살갗 위로 여름날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것처럼 어른거린다.
눈꺼풀이 이렇게 무거웠나.
가늘게 잡히는 시야로 카메라 앵글이 돌 듯 낯선 천장이 빙그르르 돈다. 곧 무게를 이기지 못한 그의 눈꺼풀이 다시 닫혔다.
어떻게 된 거지? 혹시 천국인가.
마치 노천 불가마에 알몸으로 들어앉은 것처럼 몸이 뜨거웠다. 무현은 기억을 떠올리려 미간을 찌푸렸다.
불빛을 보고 무작정 걸었고 이명처럼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었다. 벽 같은 곳을 두드렸던 것 같은데. 천국 문이 열리듯 환한 빛이 쏟아졌었다. 그리고…… 기억이 없다.
천천히 눈을 뜨자 차츰 시야가 넓어진다. 황토색 벽과 커다란 창. 불꽃이 활활 타는 벽난로. 제 옆에 앉아 새우처럼 등을 말고 졸고 있는 여자. 그를 노려보고 있는 산짐승만큼 커다란 개와 눈이 마주쳤다.
살았나?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고 개가 느릿하게 여자를 핥았다.
“왜애…….”
고개를 들고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인형처럼 눈만 깜박이던 여자가 정신을 차린 듯 그를 보고 얼굴이 환해진다. 마치 햇살처럼.
“정신이 들어요?”
하, 살았나 보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여자는 분명 사람의 말을 하고 있었다.
“정신이 든 거예요?”
그건 침까지 흘리며 졸다 일어난 그쪽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여자의 목소리가 마치 당신은 살았어요, 하는 선고 같아서 안도감에 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신기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인가였나.
그러나 무현의 안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의아해하는 목소리와 함께 거침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온 여자의 손이 그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많이 아파요? 뭐가 잘못됐나.”
거름망 없이 피부에 닿는 감촉이 무척 부드러웠다. 무현은 본능적으로 여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제 몸을 확인하듯 더듬었다.
샤워 후 물기를 닦는 행위 외에는 이렇게 자신의 맨몸을 만져 본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슬금슬금 손을 내리자 까슬까슬한 게 만져지고. 설마 했던 게 잡히자 무현은 숨을 삼켰다.
없다. 왜?
당혹스러움에 신음이 절로 새어 나오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컸다.
“어디가 불편한데요? 말을 해야 알죠!”
걱정이 잔뜩 담긴 향기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구르기 시작했다.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피부엔 긁힌 자국이나 멍울도 없었다. 그래서 내상이 없을 거라 안심했는데 경솔했던 걸까. 향기는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혹시 말할 줄 몰라요?”
내가? 무현은 울상을 하고 정신 사납게 눈동자를 굴리는 여자를 제대로 응시했다.
많이 봐 줘야 고등학생? 아니면 갓 졸업했거나. 이 어린 여자가 저를 구했다고? 그럴 리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제 사정이 궁금했다. 그의 몸을 마음대로 더듬는 어린 여자의 사정도. 그런데 목이 꽉 잠긴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현은 혀를 내어 까칠해진 입술을 핥았다. 왜 달짝지근하지? 그가 겨우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어떻게 된 거지?”
“헉! 말했다! 괜찮은 거예요?”
울 듯했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무현은 코앞까지 다가온 커다란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괜찮으니까, 좀 떨어져.”
향기는 남자의 대답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 쪽으로 움직인 그녀가 이불을 젖히고 남자의 발목을 덥석 잡았다.
“윽.”
“좀 참아 봐요. 보기엔 많이 가라앉았는데. 발목 움직여 볼래요?”
접질린 발목을 치료한 모양이었다. 여자가 시키는 대로 발목을 움직이던 그가 신음을 뱉었다.
“엄살은.”
향기는 다시 약초를 덧바르고 압박 붕대를 능숙하게 감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목소리가 까칠해서인지 눈을 감고 있던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서늘하다고 해야 하나. 눈을 감으나 뜨나 겁나 잘생긴 건 똑같지만. 오죽하면 정신을 잃은 사람에게 사과를 물려 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다 했을까. 사과가 있었다면 물려 봤을 테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향기는 컵에 빨대를 꽂아 남자의 입술에 대어 주었다.
“일어나는 건 아직 무릴 거예요.”
고개를 겨우 틀어 입술을 축인 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끙, 소리를 냈다. 몸이 무거워 일어날 수도 없지만 일어나면 안 되는 상황. 부산하게 움직이는 여자를 보니 골까지 흔들렸다.
“그런데요, 아저씨.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아저씨? 내가? 무현은 본능적으로 눈을 치켜떴다.
“제가 눈 올 거라고 말해 줬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산을 탔어요?”
그 여자가 너였어?
“등산 같은 거 한 번도 안 해 봤죠? 겨울에 야간 산행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알아요? 그것도 시원찮은 옷차림으로.”
그래. 그 옷 말인데, 내가 왜 이 꼴일까? 쉴 새 없이 잔소리를 쏟아 내는 여자 때문에 골이 더 흔들리는 것 같았다.
“정말 죽을 뻔했다고요.”
“길을…… 잃었어.”
뭐라도 던져 주지 않으면 입을 다물 것 같지 않아 무현이 겨우 입을 뗐다. 그런 줄 알았다며 멍청한 사람 보듯 여자가 혀를 찼다. 아니, 여자애가.
“그래도 운이 좋았어요. 여길 찾아오다니.”
자꾸만 바짝 다가오는 여자 때문에 무현은 난처했다. 혹시 속옷까지 벗고 있는 그의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누가 날 구해 줬지?”
“전데요.”
마치 출석 체크에 대답하듯 팔꿈치를 접어 손을 올리는 여자를 무현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네가…… 날 구했다고?”
“아저씨가 우리 집에 찾아왔잖아요?”
당연하다는 듯 황당한 눈빛을 하는 여자. 눈동자를 굴려 집 안을 훑는 무현.
“집에 다른 사람은 없어?”
“할아버지가 계신데 어제 친구네 가셨어요. 왜요?”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무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람의 기척이 없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제 옷을 벗긴 게 여자라는 얘기. 여자는 이불 속 그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내 옷은?”
“옷이요?”
“그래. 우선 옷부터…….”
무현은 말끝에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이 상황도 황당한데 더 당혹스러운 일이 이불 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건강한 남자라면 으레 아침마다 기지개를 켜는 원초적인 생리 현상. 하필이면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여자 앞에서 존재감을 세우다니. 몸에 이상이 없다는 신호라 반가우면서도 난감했다. 무현은 혹시라도 그녀의 손이 들어올까 이불을 꽉 움켜쥐고 말했다.
“떨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