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89화
“이게, 이게 무슨……!”
정신없이 이어지는 보고에 황제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법사들이 대륙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마탑이 나서 주었습니다,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폐하! 암브로시아의 기사들 전체가 무장을 한 채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소식이 정신없이 황제에게 쏟아졌다.
황제는 물론이고 귀족들 또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제대로 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유일하게 이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 자는 방금 전까지 황제에게 칼을 겨눴던 일레온과 황후, 둘뿐이었다.
일레온은 우왕좌왕하는 귀족들 앞에 나서서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진정으로 크롬벨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아라.”
일레온은 거두었던 칼을 서서히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오늘 나 일레온 드 크롬벨은 크롬벨을 대륙의 공적으로 만들어 제국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핏줄에 대한 사사로운 정 때문에 무수히 많은 제국민들을 희생시킨 황제, 카일로스 드 크롬벨을 황실의 이름으로 처단할 것이다.”
“……!”
“……!”
서릿발 같은 일레온의 선언에 장내에 있던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일레온의 칼은 서서히 다시 황제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를 보호해야 할 황실 기사단은 물론이고, 방금 전 보고를 한 황실 경비대장과 근위대장 또한 경악한 채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따를 자는 누구인가.”
좌중을 향해 일레온은 물었다.
“…….”
하지만 감히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일레온은 개의치 않고 다시 한번 더 물었다.
“나를 따라 크롬벨을 구할 자가 누구인가.”
아무도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하물며 황제 또한 경악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끔찍하게 무거운 침묵이 그들을 묵직하게 눌렀다.
누군들 3황자가 하고자 하는 일이 옳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누군들 아들 사랑에 미쳐 나라까지 팔아넘길 기세인 황제를 따르고 싶겠는가.
하지만 이건 반역이었다. 3황자는 반역을 선포한 것과 다름없었다.
“…….”
“…….”
그렇게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 채 침묵하고 있을 때.
나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이 끔찍한 정적을 깼다.
“암브로시아는 기쁜 마음으로 3황자님을 따르겠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귀족들과 황제는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에단 암브로시아 공작!”
“……허억!”
크롬벨 제국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에단 암브로시아가 그의 가신들을 이끌고 이리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에단의 뒤로 암브로시아의 기사단은 피로 물든 칼날을 빛내고 있었고, 그 뒤로는 이미 제압당한 황실 근위대와 경비대들이 줄줄이 끌려오고 있었다.
에단 암브로시아는 마치 피에 젖은 사신처럼 다가와 섬찟하게 웃었다.
“크롬벨 제국의 영광을 위해.”
조용히 크롬벨을 손바닥 위에 올려 두고 휘두르던 그가, 드디어 그 손바닥을 뒤집었다.
“썩은 것을 도려낼 때가 왔지요.”
에단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매우 아름다웠고, 황제는 그 미소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 갈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하였다.
* * *
수도의 외곽에서는 크롬벨을 삼키려는 대륙군과 크롬벨을 지키려는 제국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사악한 흑마법을 숭배하는 자들을 결코 살려 두지 말거라!”
대륙군은 기세 좋게 크롬벨의 군대를 밀어붙였다.
“아아악!”
“살려 줘!”
크롬벨의 병사들은 그들을 이끌어 줄 변변찮은 기사 하나 없이 힘겹게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하나같이 자신의 터전을 지키려는 제국민들이었다.
크롬벨을, 제국을 지키겠다는 정의도 명예를 위해 싸우려는 마음도 없었다.
그저 살고 싶었고, 자신들의 가족을 지키고 싶은 자들이었다.
“제발, 제발…….”
가장 최근까지 그들을 이끌던 2황자는 이미 대륙군이 휩쓴 영지에 포위되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3황자가 이끄는 의병대들은 좀 더 넓은 범위로 움직이며 제국민들을 지키느라 이렇게 최전선에 보낼 군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희망은 차츰차츰 꺾여 결국 이곳, 수도의 외곽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다들 정신 차려라!”
“크롬벨은 절대 약하지 않다. 근위대는 앞으로!”
그래도 그나마 수도의 외곽은 방위대가 포진하고 있어 상황이 나았다.
변두리의 영지를 쉽게 함락시켰던 대륙군들을 상대로 그들은 꽤 오랫동안 버텨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곧 한계였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저렇게 무차별적일 수 있는 거야……!”
“제아무리 황제가 흑마법사를 감싸고 있다고는 해도, 어떻게 이리 잔인하게 학살을 할 수가 있어!”
게다가 대륙군은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괴력을 보이며 잔혹하게 제국군을 도륙하고 있었다.
대륙군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수도마저 뚫리면…….”
제국군의 머릿속에는 이제 가장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크롬벨의 인구 대부분이 수도에 밀집되어 있었다.
이곳이 뚫리게 된다면 이제 그들의 심장이 위협받게 될 것이다.
“막아야 해.”
“내 가족들이 수도에 있어.”
제국군은 두려움을 애써 밀어내며 다시 칼을 잡고 방패를 들었다.
그렇게 제국군이 죽음을 각오할 때였다.
“……저게 뭐지?”
“하늘에 왜 빛이…….”
전쟁터 한가운데서 갑자기 환한 빛과 함께 하늘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륙군과 제국군은 서로에게 달려들던 것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신이 강림이라도 하는 것처럼 화려한 빛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이곳이 전쟁터라는 것을 순간 잊을 정도로, 그 광경은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그때,
“……허억!”
그 빛을 가르며 하나둘씩,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끝에는 화려한 색으로 빛나는, 룬어로 이루어진 마법진들이 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일 년 전, 알톤으로 향하던 암브로시아의 행렬에서 마법사를 보았던 크롬벨의 제국민들은 바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마, 마법사들이다!”
“마법사들이 나타났어!”
평생을 살아도 한 번 보기도 힘들다는 마법사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모두가 칼을 늘어뜨린 채 넋을 놓았다.
“신이시여.”
황실 경비대 소속 황궁 기사인 제롬 루크리버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황실 성문을 지키는 업무를 38년째 맡고 있는 노련한 노기사인 그는 반강제로 이번 전쟁에 차출되었다.
명예롭지 못한 전쟁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수도 외곽 쪽에 전 재산을 털어 저택을 구입한 그로서는 선택권도 없었다.
“마법사들은 대륙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째서 이 전장에 마법사들이…….”
그의 목소리는 이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흑마법사를 혐오한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마법사들이 크롬벨의 손을 들어 줄 것이라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하물며 그들은 알톤 영지에서 그들의 마탑주를 잃지 않았던가. 황제와 협조했던 마탑은 그 뒤로 크롬벨에게서 등을 돌렸다.
마치 천사의 강림처럼 빛을 뿌리며 등장하는 마법사들이 신의 이름 아래 크롬벨을 처단할 것만 같았다.
제롬은 한낱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거대한 힘의 차이를 느끼고 모든 의지를 상실해 버렸다.
“크롬벨은 망했어…….”
칼을 늘어뜨리며 망연자실해 있는 제롬에의 귓가에 웃음기 어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그런 서운한 소리 마세요.”
“헉!”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롬은 헛숨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
전쟁터에는 있어선 안 될 레이디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실 경비대 소속이며 황실의 문을 지킨 그는 단번에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사라 밀런 소백작……?”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뜬 눈과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사라는 정답이라는 듯 자상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경. 지난번엔 우리 클로드 님과 함께 보았었죠? 이렇게 우연히 또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파르르 떨리는 제롬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사라는 맑게 웃었다.
그녀는 제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에 클로드에게 황궁 구경을 시켜 주려고 에단에게서 황궁 출입증을 훔쳤, 아니, 살짝 빌렸을 때 곤혹을 치렀던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별 마찰 없이 클로드가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에 사라는 그에게 약간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었다.
“왜, 왜 여기 계십니까? 이곳은 지금 전장입니다, 레이디께서 오시기에 위험……. 아니, 그보다 밀런 소백작님은 죽었, 알톤 영지에서 죽었다고…….”
제롬은 세간의 소문을 언급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차갑게 얼어 있었다.
“제가 죽었다고요?”
사라는 난생처음 들어 본다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제롬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톤에서 죽은 마탑주가 실은 밀런 소백작이라고…….”
그날 알톤에서 암브로시아 공작이 죽은 마탑주의 시체를 안고 수도로 왔는데, 그것이 바로 사라 밀런이라더라.
제국민들 사이에서 은은히 돌던 소문은 사라 밀런과 암브로시아 공작이 동시에 사라지면서 한때 사교계를 휩쓸었었다.
사라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제롬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 소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환하게 웃는 그녀의 뒤로 후광이 비추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마주한 레이디의 아름다운 미소는 가히 천사의 미소라 불려도 될 것 같았지만, 그런 의미의 후광이 아닌 진짜 빛이 났다.
제롬은 사라의 뒤에서 빛나는 것이 마법진임을 알 수 있었다.
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마법사들이 등을 지고 있는 그 마법진 말이다.
“……헉!”
마법진에서 서서히 두 사람의 인영이 이리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롬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일단 칼을 들어 그쪽을 겨누며 말했다.
“일단 제 뒤로 물러서십시오, 밀런 소백작님. 마법사들은 크롬벨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을 테니 위험…….”
“괜찮아요, 경. 소문은 반은 틀리지만 반은 맞다고 그랬잖아요.”
“……?”
혼란스러워하는 제롬을 뒤로하고 사라는 마법진에서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두 사람은 곧장 사라에게로 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스승님, 2황자 일리오르 드 크롬벨의 신병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3장로님께서 이리로 모셔 올 겁니다.”
“저런. 그동안 고립되어서 힘드실 텐데 쉬지도 않고…….”
“이곳 상황을 보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고집을 부리시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 고마워 벨루나. 그리고 벤야민, 황궁 소식은 아직이니?”
“암브로시아 공작님께서 황궁은 정리가 끝났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싱거울 정도였으니 맘 편하게 일 보시랍니다.”
“세상에……. 그리고 더 전하는 말은 없었니? 그게 다야?”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렴.”
“……뭐, 보고 싶다 비슷한 그런 말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것까지 전해야 합니까?”
“귀엽긴.”
사라는 마법사들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는 제롬은 부릅뜬 눈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밀런 소백작님, 이게 대체…….”
사라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몰라 불안해하는 제롬을 위해 친절한 목소리로 현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아, 제가 경께 설명을 드리지 않았군요. 사라 밀런이 죽었다는 소문은 거짓이었지만, 제가 마탑주라는 소문은 맞답니다.”
“……그럼 정말 밀런 소백작님이 마법사라는 겁니까?”
“네, 맞아요. 저는 오늘 제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러 왔답니다.”
사라의 두 손에서 푸른 마력이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은 순식간에 부풀어 온 전장에 파도처럼 물결치며 뻗어 나갔다.
그러자 대륙군 쪽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큰 소란이 일었다.
“알톤 영지에서 도망친 흑마법사들이 있어요. 그리고 이런 전쟁은 흑마법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무대죠. 대륙군들 사이에 숨어 제 욕망을 채우고 있을 거예요.”
“……!”
“그러니 제 손으로 치워야죠. 거짓 명분을 내세워 애꿎은 제국민을 학살한 대륙 동맹에 대한 응징도 우리가 합니다.”
경악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제롬의 두 눈에 새파랗게 빛나는 사라의 눈동자가 보였다.
“시작하세요.”
사라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처럼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허공을 메우던 마법사들의 손에서 일제히 현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전쟁터에 커다란 굉음과 함께 물과 불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땅이 뒤집히고 폭풍이 울부짖었다.
“사, 살려……!”
그리고 그것은 대륙군들 전부를 휩쓰는 것이 아닌 몇몇 병사와 기사들에게 더욱 매섭게 날아갔다.
제국군들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법사들이 대륙군으로부터 크롬벨 제국을 지키고 있었다.
분명 자신들을 지켜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압도적인 힘 앞에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같은 인간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았다.
“이제부터―.”
사라의 입술이 서서히 열리고, 한겨울의 서릿발처럼 서늘하고도 무감각한 목소리가 전쟁터의 한가운데에 울려 퍼졌다.
“마탑의 청소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