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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188화 (188/190)

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88화

* * *

크롬벨 제국의 위상은 이미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버렸다.

대륙군은 이미 수도의 근방까지 와 있었다. 크롬벨 제국의 역사상 이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그들의 요구대로 1황자의 시신을 넘기셔야 합니다, 폐하!”

“맞습니다, 하다못해 1황자의 죄를 인정하고 황실 계보에서 폐하시기라도 해야 합니다.”

참다못한 귀족들은 황제의 앞에서 언성을 높이며 강력히 주장하였다.

“사악한 흑마법사인 카제르 드 크롬벨을 감싸는 이상 그 누구도 크롬벨을 위해 전쟁터로 나가지 않을 겁니다.”

“저들의 명분이 저토록 무결하니 그 누가 명예롭지 않은 전쟁에서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전쟁은 명분과의 싸움이었다.

황제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제 아들을 감싸고 있었고, 그것은 저들의 명분에 더욱 힘을 더해 주었다.

“이렇게 크롬벨이 무너질 순 없습니다, 폐하. 양보하시지요!”

“어딜 감히 내 앞에서 내 아들을 내놓으라고 해!”

진노한 황제의 노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귀족들은 다 늙은 황제의 목청이 저리도 클 수 있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놀라며 인상을 구겼다.

“제국을 위해 경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응? 대륙군이 감히 이 크롬벨에 들어와 날뛸 동안 수도에서 얌전히 손가락만 빨던 경들이 아니었나!”

“그것은……!”

흑마법을 감싸기 위해 전쟁터로 향한 가문은 대륙의 모든 나라의 공격을 받아 역사 속에서조차 이름을 남기지도 못하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크롬벨 제국에서는 전쟁에 나서려는 자가 없었고, 이토록 허무하게 대륙군을 수도까지 진군하게 만들어 버렸다.

대륙군의 명분은 그토록 강력하였다.

“제국을 위해 용맹하게 나서는 이가 어떻게 이토록 없을 수 있냔 말이다!”

황제는 울분을 토해 냈지만 귀족들은 이제 반쯤은 질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국을 위해 용맹하게 나설 이들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이 전쟁만큼은 아니었다.

의미가 없었다. 그 어떠한 의미도 없는 전쟁이었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생각했다.

‘크롬벨의 수호를 자처하던 암브로시아가 사라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군.’

황실에는 더 이상 지켜야 할 크롬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틀렸음을, 제 자식이 틀렸음을 인정하기 싫은 늙은이의 고집만 그득하게 황궁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귀족들은 황제가 완전히 제대로 된 판단력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1황자 카제르가 시체가 되어 늙은 황제의 품에 안겼을 때부터 말이다.

“이 전쟁은 크롬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폐하.”

그때 황후가 예복을 갖추어 입은 채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황실의 중대한 행사 때나 입을 법한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올 때마다 기품이 흘러넘쳤다.

“황후 폐하!”

몇몇 귀족이 반색하며 그녀를 반겼다.

지금 황궁에서 유일하게 이성을 차린 채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는 것은 오직 황후 하나뿐이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비뚤어진 자식 사랑을 위한 것이지요.”

“황후…….”

“그 의미 없는 것에 크롬벨을 희생시키려 하십니까.”

얼굴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황후를 본 황제가 이를 악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비록 이성을 잃었다고는 하나 황후가 중립을 지키던 귀족들의 지지를 하나하나 이끌어 내고 있는 걸 황제도 알았다.

“중대한 회의 중이니 황후는 물러나세요.”

“그러니 더더욱 제가 가져온 소식이 달가우실 겁니다, 나의 폐하.”

“그게 무슨…….”

“강대한 군대가 지금 막 수도의 성문을 통과했습니다.”

“황후!”

황후의 말에 황제가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제가 성문을 열라 했습니다.”

“지금 제정신인가! 제국의 황후라는 자가 감히 적군에게 수도의 문을 열어 주었다, 지금 이리 말하고 있는 거요!?”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폐하. 저는 그저 폐하가 가시는 길을 그대로 따를 뿐인데도요.”

저 노쇠한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 황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황후의 멱살을 잡아 치켜올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늙고 기운 빠진 한낱 노인일 뿐이었다.

가볍게 쳐 내는 황후의 손길에 힘없이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황후를, 황후를 유폐하겠다. 어서 궁으로 끌고 가 가두어라!”

황제의 명에 귀족들이 일제히 웅성거리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중엔 황후의 손을 잡은 중립 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서!”

분노한 황제에게서 고함이 다시 한번 터져 나오자 이번엔 황실 기사단이 빠르게 움직였다.

“황후 폐하, 이리로…….”

“흥.”

황실 기사단은 최대한 예를 갖추어 황후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그녀는 심드렁하게 쳐 내었다.

그러곤 핏발 선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황제에게 웃어 보였다.

“제국어는 끝까지 들으셔야지요, 폐하. 제가 그 군이 대륙군이라고 한 적이 있나요?”

“……지금 나와 농담이라도 나누자는 게요, 황후?”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이 기쁜 소식을 폐하와 나누고 싶은 마음뿐이었답니다.”

황후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투구를 쓴 기사 하나가 바삐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크롬벨 제국의 갑옷을 입은 전쟁 기사였다. 그의 갑옷에는 섬뜩한 칼자국과 말라붙은 핏자국이 낭자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겪어 왔는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황후는 자애로운 얼굴로 그 기사를 반겨 주었다.

“자세한 것은 나의 기사가 폐하께 고할 겁니다.”

“…….”

황후의 말에 이곳에 자리한 모두가 그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황제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깊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께 보고 드립니다. 수도의 성문을 통과한 것은 3황자 일레온 드 크롬벨이 이끄는 군대입니다. 2황자님의 변고를 듣고 서둘러 수도로 입성하셨습니다.”

“……허!”

기사의 보고에 귀족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비록 황제에 의해 쫓겨난 3황자였지만, 실은 크롬벨의 의병이 되어 활약하고 있다는 것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황제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1황자의 시체를 넘겨주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3황자를 받아들일 수 없어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쓸 만한 패는 3황자 하나뿐이었다.

“어서 3황자님의 군을 황궁으로 들이셔야 합니다, 폐하.”

“대륙군이 수도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 3황자의 군이라면 충분히 상대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3황자님의 군은 대부분 평민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대륙군의 명분이 제아무리 강력하다고는 하나, 명예를 모르는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진 못할 겁니다.”

황제가 또 괜한 고집을 피울까 걱정한 귀족들이 다 같이 입을 모았다.

“……일단 3황자를 만나 결정하겠다. 만일 3황자가 제 형님을 끝까지 지킬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황위 계승권을 복권시켜 주는 것도 고려해 보도록 하지.”

황제는 마치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3황자의 입궁을 허락하였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카제르를 놓지 못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일단 3황자를 들이겠다는 말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후는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무릎을 꿇은 채 보고를 하던 기사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기사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나, 황제도 귀족들도 그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저 잠시 3황자로 인해 벌어 둘 시간 동안 또 무엇을 할지 고려하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하…….”

투구 사이로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단숨에 칼집에서 칼을 뽑아 황제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헉!”

“폐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챙, 챙, 챙! 황실 기사단이 일제히 달려와 칼을 뽑아 들었다.

장내는 놀란 귀족들과 황제를 보호하려는 황실 기사들로 인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구를 쓴 기사는 이를 악문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폐하.”

“무슨, 무슨 소리냐. 네놈이 감히……!”

분노한 황제가 다시 한번 노성을 터트리려는 찰나.

그가 투구를 벗었다.

“……!”

“……!”

투구를 벗은 기사의 얼굴을 확인한 황제가 새하얗게 질린 채 얼어붙었다.

그것은 귀족들은 물론이요, 기사의 목에 칼날을 들이대던 황실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일레온 드 크롬벨……!”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3황자, 일레온 드 크롬벨이었다.

방금 전까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 줄 것만 같았던 그가 지금 황제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이제 폐하께서 손에 쥐고 흔드는 그깟 황위 계승권 따위 필요 없어졌습니다.”

“일레온, 네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자각하고 있는 게냐! 이건…….”

“물론입니다, 폐하.”

일레온은 여태껏 얌전히 황제의 명을 착실히 따랐던 착한 아들의 얼굴을 하고선 환히 웃었다.

“이게 바로 반역이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일레온의 말에 황제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크롬벨에 지금보다 네가 더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으냐. 얌전히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네게 돌아갈 황위를 지금 이런 식으로 포기하겠다는…….”

“하하, 폐하.”

황제의 말을 끊으며 일레온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제르 드 크롬벨의 시체를 감싸실 때부터 판단력이 흐려지신 줄은 알았으나……,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태셨군요.”

“일레온 드 크롬벨!”

“오래전부터 이리 했어야 했던 것을…….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린 뒤에야 겨우 깨달았습니다.”

일레온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그는 천천히 황제를 겨누던 칼날을 거두었다.

그러곤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저는 폐하께서 적선처럼 내어 주시는 황위 계승권을 굳이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요.”

“……!”

“황위는 제가 받아 내야겠습니다, 폐하.”

일레온의 말에 황제가 두 눈을 부릅뜰 때였다.

콰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황궁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지? 대륙군인가!”

“폐, 폐하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일레온에게 칼을 겨누던 황실 기사단이 재빠르게 황제부터 보호하며 나섰다.

하지만 황제는 그들을 뿌리치며 일레온의 멱살을 잡았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냐, 일레온!”

“…….”

일레온은 늙고 힘이 없는 황제의 악력을 느끼며 참담히 눈을 감았다.

진정 이 크롬벨 제국을 이끌고 있는 자는 눈앞에 있는 황제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치 거대한 바다처럼, 산처럼 느껴지던 황제가 이토록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일레온을 지금 이 자리까지 이끈 남자에 비하면 황제는 그저 한낱 노망난 노인에 불과했다.

그는 그 사실을 이 시점에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늦었습니다, 폐하.”

그때 저 멀리서 황궁 경비대장과 수도 외곽을 지키는 근위대장이 이리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아주 사색이 되어 있었는데,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혼이 다 나가 있었다.

일레온은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직한 목소리로 무정한 아버지이자, 무능한 황제에게 이별을 고했다.

“크롬벨을 위해 물러나실 때입니다.”

일레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의 앞까지 달려온 황실경비대장과 근위대장이 동시에 비명처럼 소리쳤다.

“아, 암브로시아가 나타났습니다……!”

“수도 외각 허공에 마법사들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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