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82화
“…….”
사라는 떠나기 전, 올리븐의 흑마법을 봉인해 둔 봉인구를 바라보았다.
이것 덕분에 그녀는 기억을 온전히 간직한 채로 총 세 번, 사라 밀런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비록 아주 찰나의 시간만 머무를 수 있었고, 그 대가로 박혜연의 몸으로 1년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지만.
에단과 제자들에게 작은 힌트를 남기기엔 충분했다.
이제 올리븐의 봉인구에는 희미한 힘만이 겨우겨우 남아 있었다.
‘다행히 기억을 유지하게 만들 정도는 돼.’
이것을 이용하면 아마 박혜연의 몸에 간직하고 있었던 지난 기억들을 전부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영혼이 바뀌는 수준이 아닌, 이쪽 영혼을 부수어 버릴 테니까.
“내 이름은 박혜연. 그리고, 다른 이름은 사라 밀런.”
그녀의 입술 사이로 절대 입 밖에 내어선 안 될 금기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촤르르륵 하고 맹약의 사슬이 박혜연의 몸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
눈앞이 빨개지고 그녀의 안에 깊숙한 무언가가 찢겨져 가는 느낌에 사라는 고통 어린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서서히 숨통을 조여 오던 맹약의 사슬이 이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금기를 범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의 영혼으로……, 두 개의 삶을, 오갔던 존재다.”
철컥.
맹약의 처형자가 고귀하고도 신성한 약속을 저버린 변절자를 찾았다.
눈앞에 푸른빛이 도는 투명한 총구가 겨누어졌다.
‘마법사의 맹약을 어기면 단두대가 눈앞에 보인다던데……. 이곳에서는 총구인가.’
박혜연은 그것을 보며 고통을 인내하는 와중에도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곤 천천히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이제 곧 에단과 클로드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드디어.
* * *
아주 익숙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사라는 그녀의 영혼이 깊은 바다에서 단숨에 끌어 올려지는 기분과 함께 눈을 번쩍 떴다.
“허억!”
폐와 가슴이 확 조여들며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세차게 뛰는 심장과 함께 피가 빠르게 돌며 온몸이 다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두 눈에 저절로 고인 눈물에 시야는 단숨에 뿌옇게 변했다.
하지만 사라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흘려보냈다.
그녀에게는 이 두 눈으로 꼭 보고 싶은 이가 있었다.
“……공작님.”
에단 암브로시아.
엉망이 된 방 안에서 홀로 우뚝 선 남자와 사라는 눈을 마주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두 눈이 세차게 흔들리는 에단에게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저 돌아왔어요.”
다정히 웃으며 다가오라 손짓하는 사라를 보던 에단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 에단의 손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주 잡은 손을 동해 사라의 따스한 온기가 차갑게 식은 그의 온도를 감쌌다.
에단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고, 그 사이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서서히 그의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아…….”
사라의 앞에서 두 무릎을 꿇은 채 따스한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그렇게 에단은 사라의 앞에 무너져 내렸다.
“사라, 사라…….”
“보고 싶었어요, 공작님. 정말…….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곤 에단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뺨을 감싸곤 힘을 주어 고개를 들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니 얼굴 좀 보여 주세요.”
“……!”
고개를 든 에단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가와 사정없이 떨리는 눈동자.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따라 투둑투둑 하고 떨어져 내리는 투명한 눈물.
축축하게 젖은 뺨과 덜덜 떨리는 입매.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냐고 묻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너무나 잘난 외모였다.
저 얼굴을 한 미남이 애처롭게 울고 있는 모습은 단숨에 사라의 심장을 조여들게 만들었다.
“농담으로도 그렇게 못 하겠다.”
사라는 사르르 웃으며 흐르는 에단의 눈물을 훔치고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손바닥이 온통 젖어 들 만큼 에단은 서럽게 울었다.
“사라, 사라, 사라…….”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에단의 모습은 여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강하고 단단하며 아름다운 암브로시아 공작이 고작 그녀의 앞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것처럼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울지 마세요. 제가 돌아왔잖아요.”
“아아, 사라…….”
“공작님이 절 불러와 주신 거예요. 그렇죠?”
사라의 물음에 에단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는 그대로 손을 아래로 내려 에단의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눈을 감았다.
세차게 뛰는 심장 아래 울컥울컥하고 차오르는 암브로시아의 힘이 느껴졌다.
“아직도 나를 부르고 있어요……. 너무나 간절하게, 애틋하게.”
에단을 평생에 걸쳐서 괴롭혔던 그 힘이 변화하였다.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원하며 갈구하는 암브로시아의 힘은 이제 한쪽의 영혼이 죽어 불완전해진 사라를 단단히 붙들어 줄 것이다.
혹시라도 다시 저쪽으로 날아가 버리지 못하게,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해 줄 것이다.
“고마워요, 공작님. 저를 원해 줘서,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줘서.”
사라의 눈에서도 결국 참아 내지 못한 눈물이 쏟아졌다.
“사실 무서웠어요. 공작님이 실은 나를 그리 원하지 않을까 봐, 필요로 하지 않을까 봐 나는…….”
“사라.”
이번에는 에단이 두 손으로 사라의 뺨을 감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뜨겁게 열이 오른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그녀를 보며 에단은 깨달았다.
사라 역시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무수히 많은 발버둥을 쳤다는 것을 말이다.
사라 역시 그와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공유했다는 것 또한 말이다.
“……보고 싶었습니다, 사라. 당신이 그립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제야 더듬거리며 오래 묵은 그리움을 토해 낼 수 있었다.
“혹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까 봐……,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않을 당신의 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신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공작님.”
에단의 나직한 목소리는 간절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사라가 돌아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저도 그랬어요. 저도 공작님과 같은 마음이었어요.”
사라는 감았던 눈을 뜨고 에단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절절하게 그녀를 원하는 에단의 표정과,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같았다.
“우리는 같은 마음이에요.”
“……!”
“저 이제 제 고백에 대한 공작님의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사라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 젖은 뺨으로 환히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에단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러다가 이내 그 역시 사라와 마주 웃어 보이며 말했다.
“사랑합니다, 사라. 아주 오랫동안……, 그대를 사랑해 왔습니다.”
“공작님…….”
“나도 사라를 짝사랑한 지 꽤 되었습니다.”
에단의 말에 사라는 살포시 웃어 보였다.
‘사실 저, 공작님을 짝사랑한 지 꽤 됐거든요.’
그녀가 했던 고백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에단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곱씹고 또 곱씹고.
그의 시간은 온통 그때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건 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가 좋아한다고 한 다음엔 사랑한다고 말할 거라고 했잖아요. 기억하세요?”
“잊었을 리가.”
“사랑해요.”
사라는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너무나 오래 기다렸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와 행복해지지 못했다.
그렇기에 한날한시가 아까웠고 귀했다.
“공작님이 기억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도, 나는 에단 암브로시아, 당신을 사랑했어.”
“……!”
사라의 말에 에단의 두 눈에서 다시 한번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받고 나누는 것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사라는 그에게 많은 것을 새로 경험하게 해 주었다.
이제 평생에 걸쳐 갈구했던, 아니, 차마 넘볼 수도 없었던 그 사랑이라는 것까지 주었다.
사라로 인해 에단은 충만해졌다.
“……사라.”
“네.”
“사라.”
“네.”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다정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 사실에 에단의 심장이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돌아왔다. 정말 그녀가 돌아왔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고 벅차올랐고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사라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입을 맞추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사라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사르르 웃었다.
그러곤 웃음기가 잔뜩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그런 거 허락받지 말고 해 주세요.”
“……!”
“저도 그럴 거니까.”
먼저 입을 맞춘 것은 누구였을까.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고 서로의 숨이 얽혔다.
사라는 두 팔을 들어 에단의 목에 둘렀고, 에단은 한쪽 무릎을 침대 위로 올리며 상체를 기울였다.
에단의 커다란 손이 사라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하아…….”
사라가 모자란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조급한 에단의 입술에 삼켜졌다.
“조금만 더.”
모자라고 또 모자랐다.
그가 그녀를 갈구하는 만큼 집어삼키려면,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