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46화
올리븐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심상치 않았다.
심기가 배배 꼬였을 때나 나오는 미소였다.
그것을 느낀 흑마법사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쁜 생각.”
올리븐의 두 뺨에 혈색이 돌았다. 달달 떨리던 그의 손끝도 어느샌가 진동을 멈추었다.
손톱 안쪽까지 물어뜯어 붉은 피가 배어 나오던 손가락을 이내 주먹을 꽉 쥐어 갈무리하며 그는 입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거슬렸어. 아니, 훨씬 그전부터 존재 자체가 거슬렸지.”
스승의 품에 안겨 있던 자그마한 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앞에서 스승의 옷자락을 쥐던 한 뼘도 안 될 것 같은 손.
스승이 제 것인 양 과시하던 건방진 눈빛.
한마디도 지지 않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던 당돌한 목소리.
“스승님께서 그렇게 아끼시니 나도 한 번은 이뻐해 줘야지.”
“……너 대장로님 건드릴 생각 하지 마. 지금 이리로 오고 계시는 것만 생각하면 살 떨리니까.”
“그러니 도망쳐야지. 스승님이 안 계신 곳으로.”
“너 설마?”
“저 장막도 스승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야.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결국은 뚫려. 그러니 살길은 만들어야지.”
올리븐의 말에 흑마법사의 얼굴이 대번 복잡하게 물들었다.
클로드 암브로시아. 마탑의 대장로인 사라가 끔찍하게 아끼는 꼬맹이.
굳이 그녀가 암브로시아 대저택에 남는 모습을 보여 주고, 제자들만 이곳에 보낸 척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괜한 자극은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왜?”
“왜라니……. 넌 네 스승이 무섭지도 않냐?”
그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떨었다.
모든 것을 터트리고 마탑을 떠났을 때부터 그는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얼굴을 가린 대장로가 가벼운 손짓 하나로 그의 숨을 거두어 가는 상상을 했다.
“무서워.”
“근데?”
“근데 그만큼 짜릿해. 지금 내게 얼마나 분노하고 계실까? 그 머릿속에 내 생각이 얼마나 가득할까?”
올리븐은 희게 웃었다. 그의 두 눈은 마치 황홀경을 걷는 것처럼 몽롱하게 풀렸다.
그저 스승의 온 신경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그러니 대장로의 제자이면서 흑마법에 손댈 생각을 했겠지만.’
마탑에서 올리븐의 유혹에 넘어가서, 혹은 그의 교묘한 술수에 넘어가서 흑마법을 익히게 된 마법사들은 꽤 됐다.
그 파괴적이고 압도적인 힘은 마법사들에겐 마약과도 같았다.
올리븐이 언제부터 흑마법을 연구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엄청난 수준의 흑마법을 구사했다.
분명 꽤 오랫동안 연구를 한 흔적이 보이는 실력이었다.
대장로의 눈을 가리면서 익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 대장로님 손에 곱게는 못 죽을 거다.”
“그렇게 곱게는 못 죽어 줘. 나는 오래오래 스승님께 어리광 부리며 살고 싶단 말이야.”
“지금 이게 어리광이라는 거야?”
“응.”
지금 이 순간만큼은 흑마법사도 올리븐을 향해 질린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네 어리광에 우리까지 죽는 일은 없게 해 줘. 아직 난 하고 싶은 게 많거든.”
“걱정하지 마. 안타깝게도 자비롭기 그지없는 나의 스승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들은 아주 많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올리븐은 기분 좋게 웃었다.
스승의 발목을 잡는 것들을 하나하나 치워 내고야 말리라.
최후에 스승에게 남은 것이 올리븐 하나밖에 없다면, 은근히 정에 약한 스승의 마음이 누그러질 테니까.
“내게 기회를 세 번 주신다고 했으니 아주 크게 써먹어야지.”
올리븐의 손에서 마력이 일렁이며 뿜어져 나왔다.
초록빛 마력이 허공에 복잡한 수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동그랗게 회전하며 점차 그 범위를 넓혀 가고 있었다.
“지금 암브로시아를 친다.”
“지금?”
“스승님께서 날 속였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방심할 때야. 그러니 애들 전부 데려와.”
올리븐의 단호한 말에 흑마법사는 한숨을 내쉬며 알톤 영지 전체에 퍼져 있는 다른 흑마법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영주 집무실의 공기가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멀지 않는 곳에 있는 흑마법사들이 하나둘씩 이쪽으로 좌표를 찍고 이동하려 하고 있었다.
아마 오래 지나지 않아 이곳은 알톤에 있는 흑마법사들로 꽉 차게 될 것이다.
“꼬맹이만 데려오면 돼. 그 과정에서 방해되는 것들은 어떻게 되어도 좋아.”
“저택에 네 친구들이 있을 텐데.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우린 숫자가 더 많잖아. 걔들은 지켜야 할 것들이 많고.”
암브로시아 저택에는 남아 있는 기사들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용인들이 있었다.
원래 무언가를 지키면서 싸우는 것이 더 어려운 법.
그 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저택에 작은 금이라도 간다면 스승님이 얼마나 크게 화를 낼까.
벤야민도 벨루나도 스승이 그곳을 아낀다는 것을 아니 필사적으로 지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올리븐은 그 틈을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을 만큼 교활했다.
“이번 일만 잘 끝난다면 네게 또 다른 흑마법을 알려 줄게.”
“……!”
“이건 아주 매력적일 거야.”
올리븐은 눈빛이 바뀌는 흑마법사를 보며 작게 키득였다.
정말 아주 매력적인 흑마법이 될 것이다. 암브로시아에겐 흔해 빠졌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들의 주인이 가지고 있는 힘과 아주 흡사할 테니.
누군가가 본다면 암브로시아 공작이 흑마법을 구사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무지한 것들은 비슷하기만 하면 다 같다고 믿으니까.
“자아, 가 볼까? 내 목숨줄이 되어 줄 꼬맹이를 데리러.”
* * *
“……그런데 벤야민 님.”
“왜.”
“저희 이제 슬슬 빨래도 해야 하고요.”
“근데.”
“정원도 가꿔야 하고요.”
“근데.”
“청소도 해야 하는데요.”
“근데.”
“…….”
암브로시아 사용인들은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서로 시선만 교환했다.
그들이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벤야민의 얼굴에서는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의사소통이라는 것이 전혀 되지 않는 벤야민을 보며 벨루나는 조용히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불편하신 것은 잘 알겠습니다만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정말 밀런 소백작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네. 스승님께서 당부하고 또 당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게 며칠째입니까. 이대로 가다간 저택 꼴이…….”
사용인들은 걱정스럽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저택을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수많은 사용인들이 매일같이 구역을 나누어 혼신의 힘을 다해 관리해도 유지가 될까 말까였다.
그런데 그들은 벌써 며칠째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보여지는 곳은 깨끗하지 않습니까.”
“원래 보이지 않는 곳을 더 열심히 관리해야 하는 법입니다. 여긴 암브로시아니까요.”
“저희가 나중에 마법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예? 하지만 귀한 마법사분들을 어떻게 그런…….”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니 괜찮습니다. 스승님께서도 분명 그렇게 하라고 하실 겁니다.”
벨루나의 설득에 사용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제 자리로 돌아갔다.
“……하.”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벨루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택의 방 다섯 개 정도 되는 넓은 공간에 벽을 뚫어 사용인들의 침대를 빼곡하게 늘어놓았다.
사용인들은 각자 침대에 눕거나 모여 앉아 미련이 남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승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는 버텨 주어야 하는데.”
암브로시아의 사용인들은 그들의 주인이 사라와 함께 알톤으로 향함과 동시에 모두 이곳으로 거취를 옮겼다.
클로드와 페넬로아 모자를 모시는 사용인들을 제외하면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적지 않은 인원을 수용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내부에서 나오는 말들까지 전부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스승님이 다 생각이 있으시니 이렇게 조치를 취한 것인데 아주 말들이 많아.”
“저들이 우리에게 협조할 이유가 없는데도 이렇게 도와주는 것에 감사하도록 해, 벤야민.”
“흥.”
벤야민은 불퉁한 심경을 숨기지 않으며 몸을 휙 돌렸다.
“어디 가?”
“꼬맹이한테 간다.”
“가는 길에 청소 좀 하면서 가.”
“싫어. 스승님이 잠시라도 꼬맹이에게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는데, 네가 우는소리를 하니까 한번 와 본 거 아니야. 낭비할 시간 없다.”
“도움도 안 됐으면서 큰 소리는.”
그나마 사용인들이 벤야민을 어려워하니 도움이 될까해서 불렀지만 역시나 도움은 하나도 되지 않았다.
모든 사용인들의 말에 ‘근데?’로 일관하니 말이다.
“애초에 내가 사람들을 잘 달래 줄 성격이라고 생각해서 부른 건가?”
“그건 아니지만.”
“차라리 베론이나 론다를 불러.”
“집사님과 시녀장님은 클로드 님과 일렉사 님 곁에서 못 떨어지셔.”
“그럼 나는 떨어져도 되고? 그 둘보단 내가 붙어 있는 게 더 낫다는 거 몰라?”
벤야민의 말에 벨루나는 최근 들어 점점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클로드를 떠올렸다.
서로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하루가 다르게 투닥거렸다.
처음엔 안절부절못하던 페넬로아와 일렉사도 이제 그 모습을 보며 태연하게 차를 마시고 식사를 했다.
그래서 벨루나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
벤야민은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잠시 할 말을 잃었던 그는 이내 시간 낭비라는 듯 미간을 좁히고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
“클로드 님과 또 싸우지 마!”
“안 싸워.”
“싸우지 말라고!”
등 뒤로 번지는 벨루나의 고함에 벤야민은 짜증을 담으며 휙 뒤를 돌아보았다.
“너나 이곳 잘 지켜. 난 내 일을 할 테니까, 쓸데없는 오지랖은 그만두고.”
벨루나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인 벤야민은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그 모습을 보며 벨루나는 염려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 일이 벌어지면 미쳐 날뛸 놈인데. 스승님께서는 왜 벤야민에게…….”
그녀는 클로드를 지키는 일을 벤야민에게 맡긴 스승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스승의 판단력을 의심하게 됐던 순간이었다.
‘왜냐니? 두 사람이 사이가 좋으니까 그렇지.’
‘예? 그럴 리가…….’
‘물론 너를 믿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니야, 벨루나. 하지만 너는 나를 닮아 정이 많으니까.’
‘그게 무슨?’
‘너와는 달리 벤야민은 쉽게 정을 주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의 우선순위는 아주 뚜렷할 거거든.’
벨루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던 스승을 떠올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새빨갛게 물든 하늘이 오늘따라 유달리 더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