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42화
호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정확한 것이 있을까?
어느 여자라도 에단의 말을 들으면 고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사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단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과 미묘하게 경직된 입꼬리는 그녀가 지금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곧 파벨 영지에 도착할 테니 내가 욕심을 부릴 시간도, 그대가 이리 편히 쉬는 시간도 끝이 나겠지요.”
“……네, 그럴 것 같네요.”
사라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이 많아진 얼굴을 하고선 그를 바라보았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사라의 눈동자만큼이나 그녀의 마음 또한 흔들렸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이 정도까지 할까.’
에단은 아쉬움을 삼키며 들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쳤다.
그는 최근 들어 사라의 마음을 좀 더 노골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내게 흔들리는 것 같긴 한데.’
손가락 끝으로 책장의 끄트머리를 꾹 눌러 접으며 에단은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라가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그녀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할 리 없으니.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이용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이용해야 한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마음을 두드리고 쥐고 흔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사라가 훗날 떠나고자 할 때 그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흔들림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야 말 테니까.
‘사라는 정이 많으니까, 쓸데없이.’
그것이 그녀가 내게 붙잡히는 족쇄가 될 것이다.
에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조금이라도 더 사라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암브로시아의 힘이 존재하는 한 그는 계속해서 사라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였다.
사라에게 받은 것이 많아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뛰면서도, 초조함에 가슴이 조여들기도 하였다.
차라리 그가 사라에게 베푼 것이 많다면 부채감 때문이라도 떠나지 못할 텐데.
관계의 키는 이미 그의 손을 떠난 지 오래였다.
이 마음을 깨달았을 때부터 그러했다.
“…….”
자신이 없어질 때마다 음험한 마음이 그의 속 안에서 끊임없이 뒤틀리며 흉측한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여유 있는 척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한계에 내몰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사라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녀를 빼앗아 갈 것만 같았다.
‘내가 빼앗기는 것이 맞기는 할까. 애초에 손에 쥐어 본 적도 없는데 말이야.’
감히 경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에단은 사라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점점 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자신과 사라 사이에 끊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에단이 보고 있는 책의 책장은 단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했다.
“공작님, 그 책 읽고 계시긴 한 거예요?”
사라가 그걸 지적하자 에단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들켰군.”
에단은 뒤틀리던 속이 사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일단은 이렇게 곁에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졌다.
그는 손을 들어 지끈거렸던 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머리가 조금 아파서 집중이 안 되는군요.”
“어머나.”
사라는 걱정 어린 얼굴로 에단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많이 아프신가요? 열이 나는 것 같아요? 아니면 그냥 단순한 두통인가요?”
세상 큰일이라도 난 것 같은 사라의 반응에 에단의 입꼬리가 살며시 위로 말려 올라갔다.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한번 봐 봐요.”
사라는 에단의 옆으로 건너가 앉은 뒤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머그잔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손길에 노곤함이 몰려온 에단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완전히 눈을 감았다.
“조금만……, 이러고 있으면 두통이 가라앉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요?”
에단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어지럽게 엉키던 속이 사라의 온기가 닿자 온화하게 녹아내렸다.
이것도 그녀가 부리는 마법이라면 마법인 걸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겠어요.”
“음?”
사라의 말에 에단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떴다.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요청한다는 말인가.
에단이 입을 열어 묻는 것보다 사라의 행동이 더더욱 빨랐다.
그녀는 순식간에 마차의 창문을 내리고 큰 소리로 기사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여러분! 제 감기 기운이 공작님한테 옮았나 봐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대요!”
“사라?”
“공작님이 아파서 죽으면 어떡해요!”
사라의 외침에 에단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주군! 아프십니까? 어디가요! 어떻게요!”
일단 제일 먼저 제이드가 마차의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저 멀리 마물들을 확인하러 나섰던 기사들까지 이쪽으로 흙먼지를 날리며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주구우우우우운!!!”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아아아!!”
“제가아아아아, 지켜 드리겠습니다!!”
어마어마한 속도와 커다란 목청이었다.
에단은 살짝 질린 듯한 얼굴을 하고선 사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사라의 입꼬리가 짓궂게 말려 올라가 있는 것을.
“열매 가져오세요! 내가 먹어 보니까 효과가 아주 좋던데!”
“알겠습니다!”
“두 개, 세 개……, 아니 있는 거 다 가져오는 게 좋겠어요! 공작님은 소중하니까!”
“네엡!”
기사들은 사라의 말을 아주 착실하게 잘 들었다.
다들 손에 열매를 한가득 들고 왔다.
마차 안으로 밀어 넣어지는 열매와 담요와 따뜻한 물과 온갖 약들…….
방금 전 사라가 겪었던 일을 에단도 똑같이 겪고 있었다.
“이것 드시고 빨리 쾌차하십시오, 주군.”
“아프시면 안 됩니다.”
“밀런 소백작님 저희 주군 좀 살려 주십시오. 허어어헝.”
기사들은 마차를 빼곡하게 둘러싸고 한마디씩 보탰다.
그렇게만 했는데도 머리가 광광 울릴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생전 아픈 적도 없던 분인데! 이게 다 마물들 때문이야.”
“맞아. 그럴 수도 있겠어.”
“마물들이 마물의 숲에서 나오지만 않았어도 주군이 친히 여기까지 나올 이유도 없었지.”
“이게 전부 마물들 탓이다.”
“그렇다!”
“죽여 버리자.”
“전부 쓸어 버려!”
“우오오!”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마친 뒤 다시 마차의 반대편을 향해 달려갔다.
“…….”
순식간에 우르르 사라진 기사들을 보며 에단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에단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가운데 아직도 마차에 있던 제이드가 제 가슴을 치며 말했다.
“저는 주군 곁을 지키겠습니다. 누군가는 옆에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한껏 자부심이 묻어 나오는 얼굴에 에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가.”
“옙.”
에단의 서슬 퍼런 명령에 제이드는 군말 없이 깔끔하게 뒤로 물러섰다.
괜히 버티고 섰다가 한 대 맞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에단이 때리면 매우 아팠다.
“아하하.”
서둘러 마차에서 나가 문과 창까지 꼭꼭 닫아 주는 제이드를 보며 사라가 유쾌하게 웃었다.
방금 전 당황한 에단의 얼굴을 눈에 꼭꼭 새겨 두며 말이다.
“지금 제게 복수한 겁니까?”
“복수가 되긴 됐나요?”
“그게 그대의 목적이었다면 아주 훌륭했다고 말해 주고 싶군요.”
사라가 느꼈을 당혹감은 이미 충분히 느꼈다.
기사들에게서 느껴지던 것은 걱정을 넘어선 그 무언가였다.
광기에 가까운…….
제 수하들을 그렇게 물들여 놓은 것은 아마 자신이리라.
“미안했습니다, 사라.”
에단은 진심으로 사라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사라는 자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의 사과는 받아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에단은 수도 없이 지금의 상황을 겪었을 사라에게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기꺼이 그의 사과를 받아 준 그녀에게 감탄했다.
앞으로는 절대 사라가 곤란할 만큼의 과보호는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에단이 결심했을 때였다.
“자, 그럼 이제 이거 드세요.”
“……?”
사라는 아까 기사들이 미친 듯이 내밀었던 열매를 들고 웃고 있었다.
“사라?”
“혹시 모르니까 먹어 두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그녀는 아까 에단이 열매를 먹였을 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에단은 그제야 아직 사라의 복수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 공작님? 아, 하세요.”
“…….”
“어서.”
“……아.”
에단은 그렇게 자신이 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받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