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39화
“……!”
사라는 에단의 말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견뎠다.
그녀의 온 마음을 뒤흔드는 말을 뱉어 놓고도 에단은 한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치사해.’
제아무리 먼저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는 하지만 스스로의 상태가 너무나 심각했다.
에단의 앞에만 서면 사라는 쉽게 여유를 잃고 초조해졌다.
심장은 물론이고 손까지 떨려 오고 말 한마디도 쉽게 뱉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상대가 오해할 수 있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에단과는 달리 말이다.
‘나만 이렇게 떨려 하고, 정작 공작님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사라는 에단의 단단함에서 나오는 여유가 멋있기도 했지만, 반대로 밉기도 했다.
짝사랑을 하는 죄로 이쪽은 작은 여유 따위 하나도 없는데, 에단은 그렇지 않아서.
그것이 마치 마음의 차이에서 오는 간격인 것만 같아 설레는 와중에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제이드 경의 말로는 나한테 하는 것보다 더 친절하게 구는 여자는 없다고 했었는데 말이야.’
사라는 제게 다정히 웃어 주는 에단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얻을 것이 있다면 그 무엇보다 달콤해질 수도 있는 게 주군이라며 너스레를 떨던 제이드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괜히 태연한 얼굴로 멀뚱히 서 있는 제이드가 얄미워 날 선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
영문을 알 턱이 없는 제이드는 갑자기 날아든 차가운 시선에 고개를 기울였다.
“밀런 소백작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니에요.”
사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이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빨리 이동하죠.”
“알겠습니다.”
사라는 이번 알톤 영지로 향하는 길에서 반드시 에단 암브로시아를 내 남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했었다.
여기서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 * *
알톤 영지의 영주 필립 알톤은 침통한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차남인 파웰 알톤은 그런 아비를 대신해 이를 으득 갈며 살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정녕 알톤을 대륙의 공적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 제정신이세요, 형님?!”
알톤 영주 성 지하 감옥에 갇힌 파웰은 금방이라도 감옥 창살을 비집고 나올 것처럼 달려들었다.
알톤 영지의 장남인 파이튼 알톤은 그 기세에 눌려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어,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언제까지 이딴 변방의 영지에서 처박혀 있을 셈이야! 우리도 중앙에 한 번 나가 보아야지.”
“저희 가문이 어떻게 중앙에 나갈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알톤은 마물의 숲을 지키는 철옹성 같은 곳입니다. 마물의 숲의 가장 가까이에서 제국민을 수호하는 것이 가문의 사명이건대 어째서!”
파웰은 그간 고함을 내지르느라 목이 다 쉬어 있었다.
그런 그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내뱉는 말들 하나하나가 전부 다 파이튼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게다가 1황자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흑마법을 쓰고 있습니다! 흑마법을 쓰는 자가 크롬벨의 황제가 된다고요? 대륙의 공적이 될 것이 뻔하지. 곧 무너질 황가의 오른팔이 되어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그리 여기지 말거라. 아직 아무도 모른다. 1황자가 흑마법을 쓰는 것은……!”
“지금 영지가 이 지경이 됐는데 온 대륙이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형님!”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파이튼을 보며 파웰은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악을 썼다.
“그게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었으면 제가 이리 말하지도 않습니다. 설사 잘 숨긴다고 해도 1황자가 황위를 계승할 수 있을 거라 여기십니까!”
“파, 파웰…….”
“형님은 어릴 적부터 그랬지요. 가진 것, 손에 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가지지 못한 것에만 주제넘은 집착을 하곤 했습니다.”
“…….”
“이번에는 또 어떤 어리석은 짓을 하려고 이러십니까!”
동생의 절규에 파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구절절 전부 다 동생이 옳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모를까.
하지만 그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나, 나도 처음에는 그저 1황자의 연줄을 조금 타 보려 했을 뿐이었다.”
파이튼의 목소리에서는 짙은 후회가 묻어 나왔다.
그저 1황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일 수만 있다면, 1황자의 편의를 좀 더 적극적으로 보아 준다면.
혹시 그가 다시 수도로 가게 됐을 때 알톤 영지를 잊지 않고 중앙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엔 그런 작은 희망에서부터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흑마법사가……, 흑마법사가 1황자의 뒤에 있을 줄 누가 알았단 말이냐!”
파이튼은 1황자가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흑마법을 썼을 때 느꼈던 공포를 떠올리며 절규했다.
“그자가 1황자에게 흑마법의 힘을 불어넣었단 말이다! 제국의 황자가 흑마법을 쓸 거라고 어느 누가 상상을……!”
“그걸 알았던 그 순간부터 바로잡으셨어야죠! 왜 폐하께 보고하지 않은 겁니까. 하다못해 저와 아버지에게만이라도 미리 언질을 해 줬더라면!”
“나는 그렇게 못 한다.”
“형님!”
“내가 입을 여는 즉시 너와 아버지를 죽인다고 했어!”
파이튼의 말에 순간적으로 파웰은 자신의 등 뒤에서 고개를 숙인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알톤 영지의 영주인 아버지라면, 크롬벨 제국의 충실한 신하인 아버지라면 분명 이리 말했을 것이다.
“아버지와 나를 죽여서라도 알렸어야 했습니다, 형님은.”
“파웰!”
“크롬벨의 귀족으로서, 알톤 영지의 후계자로서 알렸어야 했다고요.”
서슬 퍼런 파웰의 목소리에서 파이튼은 자신의 동생이 이 순간 그보다 더욱 알톤의 후계자에 걸맞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내가, 내가…….”
그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
파이튼의 후회만큼이나 꽉 쥔 주먹 위로 굵은 핏줄이 시퍼렇게 불거졌다.
그 모습을 본 파웰은 창살 너머 파이튼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형님. 저와 아버지는 괜찮으니 하루라도 더 빨리 1황자의 눈을 피해 황제 폐하께 알리세요.”
“…….”
“알톤 영지가 흑마법사에게 장악당했다고, 그리고 1황자께서 흑마법사의 조종을 받는다고 어서 알리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황실에서 우리 알톤을 구해 줄 겁니다.”
“그렇게는 못 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셨습니까? 어서 알리라니까요!”
버럭 성을 내며 창살을 쥐고 흔드는 파웰을 보며 파이튼은 공허하게 웃었다.
텅 빈 얼굴로 씁쓸하게 고개를 내젓는 파이튼을 보며 파웰은 어딘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설마, 설마 형님…….”
“흑마법사들이 알톤에 커다란 장막을 만들어 냈다. 외부에서는 물론이고 내부에서도 나갈 수 없게 되었어.”
“그런!”
“우리는 이곳에 갇혔다. 미쳐 버린 1황자와, 이 제국을 집어삼키려는 흑마법사들과 함께 말이다.”
파이튼의 말이 끝나자마자 파웰의 뒤에서 모든 의지를 잃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필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굳건히 서서 파이튼을 형형하게 쏘아보는 시선은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가 아닌 한 영지를 이끄는 영주의 눈빛이었다.
“1황자를 만나게 해다오.”
“아버지, 지금 1황자는 위험합니다!”
파웰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필립을 뜯어말렸다.
이대로 두면 자칫하다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난동이라도 부려서 1황자를 만나겠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알톤의 영주는 나다. 내가 영주민을 안정시키고 내가 알톤을 이끌어야 한다. 그러니 1황자와 만나게 해다오.”
“아, 아버지…….”
“어서!”
말을 더듬으며 망설이는 파이튼을 향해 필립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한 영지를 이끄는 수장답게 위엄이 담긴 음성에 파이튼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지은 죄가 커 필립의 노성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파이튼을 보며 파웰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누, 누구 말이냐.”
“1황자를 현혹한 흑마법사 말입니다. 힘을 불어넣었다던!”
“그자는 며칠 전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1황자가 지금 홀로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알톤에 남아 있는 흑마법사들은 장막 근처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1황자는…….”
파이튼은 씨를 말려 버리겠다는 듯 마물들을 이 잡듯이 잡고 있는 1황자를 떠올렸다.
‘크하하. 이게 나의 힘이다. 이게 나의 힘이야! 빌어먹을 황제도, 황자들도, 귀족들도 전부 다 이렇게 찢어발겨 줄 테다!’
흑마법사에게서 힘을 얻은 뒤로 1황자는 완전히 미쳐 버린 것만 같았다.
그의 광기에 파이튼은 점차 숨통이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홀로 있습니다.”
파이튼의 대답에 파웰과 필립은 서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잠시 그렇게 시간이 지났을까, 무언가 결심한 듯한 파웰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님이 지금 여기 와 있다는 것, 1황자는 모르고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