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32화
클로드의 물음에 사라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서서히 출발하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제 제자들 중 가장 총명하고 예쁜 아이가 하나 있거든요. 그 애가 잠시 동안 제 행세를 해 줄 거예요.”
“아, 벨루나 누나구나.”
“바로 아셨네요. 우리 클로드 님 아주 똑똑하기도 하지.”
사라는 사르르 웃으며 클로드의 뺨에 제 뺨을 비볐다.
아이는 울었던 것도 잊어버리고 꺄르르 웃으며 간지러움에 몸부림쳤다.
“……하.”
저택의 사용인으로 위장하여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벤야민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이미 저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이야 익숙해진 뒤였다.
그가 은근히 두 사람에게 찬밥 신세인 것 또한 말이다.
“암브로시아 공자와 밀런 소백작의 사이가 꽤 좋아 보이네요.”
“밀런가가 암브로시아 공작에게 약점을 잡혔다는 소문이 거짓일 수도 있겠어요.”
귀족들은 사이가 좋아 보이는 사라와 클로드를 두고 떠들어 댔다.
벤야민은 그런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사라에게 다가가 말했다.
“언제쯤 저쪽으로 옮겨 가실 생각이십니까?”
“보는 눈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아, 그리고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니?”
“정원과 저택 곳곳에 남겨 놓은 흔적들은 전부 처리했습니다.”
벤야민의 말에 사라는 한숨을 내쉬면서 날 선 시선으로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영상 수정구부터 전서구가 알아볼 수 있는 표식까지 아주 다양하더군요.”
“고마워. 암브로시아 저택에 손님이 드나들 때마다 이게 무슨 고생이니.”
암브로시아 공작가는 보안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어쩌면 황실보다도 더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 암브로시아 공작가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와 동시에 공략하고 싶은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한 번씩 이렇게 손님을 받을 때마다 암브로시아 내부 곳곳에 다양한 흔적들을 남기고 가곤 했다.
“그래도 네가 있으니 사용인들이 아주 편했겠어. 잘했구나, 벤야민.”
“……예.”
사라는 클로드를 안지 않은 팔로 벤야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칭찬했다.
그러자 벤야민의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며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
하지만 사라의 품에 안겨 그를 빤히 바라보는 클로드의 시선에 벤야민은 작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암브로시아를 염탐하기 위함이라기에는 무해한 것들이긴 합니다만, 이런 것들도 있어서 수거해 왔습니다.”
“이건…….”
사라는 벤야민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것들을 보곤 미간을 좁혔다.
“여성용 손수건이랑, 귀걸이, 목걸이, 장갑…….”
“그리 위험한 물건은 아니라 그냥 둘까 하다가 혹시 몰라서…….”
“아니. 아주 잘했어, 벤야민. 정말, 정말 잘했어.”
사라는 아까보다 더욱 반가운 목소리로 벤야민을 적극 칭찬했다.
그리고 휙 고개를 돌려 마차를 배웅하는 귀족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경계심이 듬뿍 묻어 나왔다.
“내가 있는데 어디서 감히 공작님에게 수작을…….”
분명 공작가에 이것들을 흘렸다고 하며 에단에게 말 한마디, 약속 한번 잡아 보려는 수작이었다.
‘제가 그날 경황이 없어 손수건이 없어졌다는 것도 몰랐지 뭐예요, 손수 자수를 놓은 것이라 아꼈던 것인데……. 아, 저는 어릴 적부터 자수가 취미였답니다! 존경을 담아 공작님의 이니셜을 새긴 손수건이었는데, 이렇게 제 주인을 찾아가네요.’
‘제 할머님이 물려주신 소중한 귀걸이인데, 암브로시아의 아름다운 정원에 시선을 빼앗겨 잃어버렸답니다. 허락하신다면 되찾으러 가고 싶은데……, 시간이 되실까요?’
‘공작님의 무사 기원을 빌며 장갑 한쪽을 두고 왔답니다. 나머지 한쪽도 드리고 싶은데…….’
사라의 머릿속으로 에단을 노리는 여자들의 작업 멘트가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내 눈에도 잘난 남자가 남들 눈에는 또 얼마나 잘나 보일 것인가.
저택에서 매일 같이 식사하고 마주치고 대화한다고 우쭐해졌던 사라의 마음속에 은근한 조바심이 생겨났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가만있을 것 같아?”
“예?”
“아무것도 아니란다.”
스산하게 중얼거리는 사라의 목소리에 벤야민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지만 사라는 은근히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곤 저택을 떠나는 마차의 모습을 보며 다짐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끝내겠다고. 알톤 영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에단 암브로시아를 내 남자로 만들고 말겠다고 말이다.
“…….”
제국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떠나는 공작과 마법사. 그리고 그들을 배웅하는 귀족들이라.
공작과 마법사를 태운 마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는 역사에 길이 남을 순간이라고 여겼고, 누군가는 마법사와 친분을 쌓게 될 공작을 질투했으며, 누군가는 이번 기회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 * *
“와아아아!”
“암브로시아 공작가의 마차야!”
“마법사님이 타고 계신대!”
암브로시아의 문이 열리고 기사들을 필두로 한 마차가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리고 있었던 제국민들은 환호했다.
알톤 영지의 일로 인해 흉흉한 소문이 돌던 것이 이내 축제 분위기로 바뀐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암브로시아와 전설처럼 존재했던 마법사가 동시에 움직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국민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이 순간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얌전히 마차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벨루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군요.”
벨루나는 답답했던 로브를 벗으려 손을 들어 올렸다.
“마차의 창으로 실루엣이 보이니 가만있도록.”
“……그러죠.”
하지만 에단의 제지에 그녀는 순순히 들었던 손을 내렸다.
앞으로 스승은 로브를 절대 벗지 않을 테니 그녀의 행세를 하는 동안은 벨루나 또한 로브를 벗어선 안 됐다.
“…….”
벨루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어색하게 쥐었다 펴며 로브 너머로 보이는 에단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눈을 감고 마차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방비해 보여 미묘한 기분을 느끼게끔 했다.
언제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빈틈 하나 없어 보이던 남자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순간을 벨루나는 알고 있었다.
스승의 앞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벨루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스승님의 앞에서는 언제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그녀가 알고 있는 사라는 예전부터 그랬다.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고, 난생처음 스스로가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사라가 모습을 감추고 목소리를 감추고 있었어도 그녀를 매우 아끼고 애정하고 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물며 암브로시아에서 스승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지 않았는가. 마탑에 있을 때보다 배는 더 다정하고 자상했다.
그런 스승의 앞에서 무장 해제가 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미묘하게 거슬린단 말이야.’
지금이야 쓸모가 있으니 벨루나와 벤야민을 거두고 있는 암브로시아 공작이었지만, 그전까지는 정말 곧 치울 쓰레기를 보듯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그의 눈 안에 비친 경계는 분명 그들이 위험하기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다른 의미의 경계도 포함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벨루나는 의미심장한 기분으로 에단에게 말을 걸었다.
“스승님의 정체는 끝까지 비밀에 부칠 생각입니까?”
벨루나의 질문에 에단은 감았던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질문의 의도를 가늠해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는 에단을 보며 벨루나는 뒷말을 덧붙였다.
“알톤 영지의 일이 누구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스승님께서 나서신 이상 영원히 감출 순 없을 겁니다.”
벨루나의 말에 에단은 은근히 미간을 좁혔다.
사라의 정체가 귀족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골치가 아파졌다.
그렇지 않아도 암브로시아에 힘이 실리는 것을 경계하는 황제를 상대하는 것도 슬슬 귀찮아지려던 찰나였다.
‘밀런 소백작만 한 신붓감이 없는데 말이야. 황자들을 저택에 자주 초대해 주는 건 어떻겠나, 암브로시아 공작.’
‘황실 기사단장이 아직 혼인 전인데, 아주 훤칠하고 젊은 나이에 단장직에 오른 천재 중의 천재이지. 밀런 소백작과 연배도 비슷한 게 딱이지 않는가.’
황제는 에단과 눈만 마주치면 사라를 어떻게든 제 사람들과 엮어 보려 했다. 황제의 그 능구렁이 같은 제안을 단호하게 잘라 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게다가 사라를 노리는 것은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밀런 소백작은 잘 지내십니까? 지난번 연회 때 그 일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걱정이 되어 그렇습니다.’
‘지난번 암브로시아 공작가로 초대장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더군요. 밀런 소백작에게 저 대신 말씀을 좀 전해 주십시오.’
‘지난번 연회 때 함께 춘 춤을 아직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밀런 소백작이 보여 준 그 미소가…….’
그와 마주치는 귀족 청년들이 사라를 입에 올리며 열띤 얼굴을 할 때마다 전부 다 제국에서 치워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라가 마법사고 마탑의 수장이라는 것까지 알려진다면 아주 본격적으로 그녀를 꾀어내려고 온갖 수작을 다 부릴 테지.
그걸 상상하기만 해도 이가 갈리고 치가 떨렸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아.”
벨루나에게 대답하는 에단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