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31화
“마, 마법이야!”
귀족들 중 누군가가 체면을 차리는 것조차 잊고 소리를 질렀다.
한평생 마법사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그저 지식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한 마법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놀랍지 않을 리가 없었다.
“……!”
“헉.”
푸르른 마력을 담은 바람에 휘감겨 점차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는 로브를 푹 눌러쓴 차림이었다.
로브는 얼굴을 거의 가려 아랫입술만 겨우 보일 듯 말 듯 한 상태였다.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드러난 부분을 보았을 때, 그들은 단숨에 마법사가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이에요.”
“물론 사람이겠지. 마법사가 다른 종족은 아닐 테니.”
“여자인 것 같죠?”
“놀라워……. 내가 이 두 눈으로 마법사가 마법을 쓰면서 나타나는 모습을 다 보다니 말이야.”
귀족들은 뒤늦게 자신들이 경망스러웠다는 것을 깨닫고는 헛기침을 하며 수군거렸다.
이제 와 애써 시치미를 떼려고 해도 그들의 귀족답지 못한 모습은 이미 에단과 사라의 눈에 들어온 뒤였다.
“그대들이 신기해하는 것도 당연해. 마법사의 존재가 어디 그리 흔할까.”
“커흠!”
미세한 웃음기가 담긴 에단의 말에 귀족들은 불편한 기침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고아한 자존심으로는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에단은 그런 귀족들의 태도를 익숙하게 보아 넘기며 그들과 함께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황실 기사에게 손짓했다.
일전에 사라를 에스코트했었던 그놈이었다.
“폐하의 전령은 이리로.”
“아, 예!”
황실 기사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다가왔다.
그는 오늘 황제의 뜻을 대신 전하기 위해 이곳에 자리했다.
마법사의 등장으로 그의 의무가 잠시 흐트러졌지만, 황실 기사는 곧 명을 수행하기 위해 품에서 황제의 칙서를 꺼내 들었다.
“폐하께서 크롬벨과의 우정을 위해 기꺼이 나서 준 마법사님께 친히 전하라 하셨습니다.”
황실 기사의 말에 귀족들은 모두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꼿꼿하게 서 있는 사람은 마법사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예를 표하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마법사는 어느 제국을 가더라도 준황족에 가까운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들은 마탑에만 처박혀 있기를 택했다.
권력과 탐욕에 물들어 있는 그들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란 말이었다.
그런 마법사들에게 크롬벨 제국의 황제라고 한들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크롬벨은 마탑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이며, 앞으로도 이렇게 영원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하셨습니다.”
황실 기사는 표정을 알 수 없는 마법사가 곧은 자세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흔들림 없이 황제의 칙서를 전부 다 읽었다.
“폐하께서 마탑과 이야기를 나누셨단 말인가?”
“엄청나군. 폐하의 힘이 마탑까지 미친다니…….”
귀족들은 슬며시 허리를 펴며 암브로시아 공작을 바라보았다.
“암브로시아 공작이 어째서 이 위험한 일에 친히 움직이는가 했는데…… 이래서였군.”
“마법사와 연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인데, 저 같아도 그렇게 하겠어요.”
“왜, 지금이라도 자원하겠는가?”
“폐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당연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마법사의 근처에도 못 다가가겠지만.”
아쉬움을 담은 말들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분주하게 오고 갔다.
누군가는 동경을, 질투를, 경계를 한가득 담은 시선이었다.
“이제 슬슬 출발하셔야죠.”
사라는 그런 에단과 귀족들을 번갈아 보다가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띤 채 클로드를 안아 올렸다.
그러곤 에단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공작님께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해 주세요, 클로드 님.”
“…….”
사라가 배웅 인사를 하라고 했지만 클로드는 뚱하게 입술을 삐죽이며 우물쭈물하였다.
오랫동안 에단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아이는 심통이 잔뜩 나 있었다.
클로드는 울먹이는 눈을 한 채 사라의 품에서 에단을 간절히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
“안 돼요. 위험하단 말이에요.”
대답은 에단이 아닌 사라에게서 흘러나왔다.
부드럽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클로드의 투정을 잘라 내는 사라의 말은 제법 엄했다.
클로드는 사라가 이런 식으로 말할 때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이미 터득한 뒤였다.
“……알았어.”
클로드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푹 숙이다가 이내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사라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저런.”
그런 클로드를 보며 에단은 혀를 차며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웃었다.
그런 뒤 클로드를 향해 두 팔을 뻗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포옹도 안 해 줄 셈이니.”
“……!”
에단의 말에 클로드는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다정한 미소와 그를 향해 벌리는 두 팔, 그 사이로 너른 품이 보였다.
아버지의 저 품이 얼마나 저를 단단하게 끌어안아 주는지. 얼마나 따뜻하고 든든한지.
클로드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며칠, 어쩌면 몇 달이 될지도 모르는 외출이 더 서럽고 슬펐다.
“……흐으.”
클로드는 결국 꾹 참았던 눈물을 또르르 흘려 보내며 에단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하하.”
결국 제게 와 안기는 클로드를 웃으며 받아 든 에단은 온 무게를 다 실으며 안기는 아이를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사라가 힘을 보충해 준 반지가 은근히 진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단은 클로드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아이에게 속삭였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마.”
“정말요?”
“그래. 너를 혼자 두는 일은 내게도 쉽지 않은 일이란다.”
“……네에.”
클로드는 에단의 말에 작게 훌쩍이며 그의 어깨에 두 눈을 묻어 버렸다.
에단은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느낌을 생생하게 느끼며 클로드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부자의 모습을 보고 있던 사라는 찡한 기분이 들어 손을 가슴께로 가져가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친해지다니.’
암브로시아 공작가에 유모로서 처음 방문한 날, 클로드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창백하게 질렸던 에단의 낯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고 나뭇조각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던 클로드 또한 여전히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정말 나 열심히 했구나…….’
사라가 이끌어 낸 변화였다. 그것이 너무나 뚜렷하게 보여서 그녀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꾹 눌러 진정했다.
“클로드 님, 다시 제게 오세요. 공작님은 이제 곧 출발하셔야 해요.”
“으응…….”
클로드는 답지 않은 어리광을 부리며 에단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훌쩍이며 얼굴을 비비는 클로드 덕분에 에단의 어깨 자락은 누가 보아도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쉽게 에단을 놓아줄 것 같지 않은 클로드의 모습에 사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따가 옷 말려 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에단은 웃으며 클로드의 등을 커다란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며 조금 더 제 품 안에 아이를 고쳐 안았다.
“아무래도 내 아드님이 많이 속상한 모양이니. 출발 직전까지는 이리 안아 주어야지.”
“……!”
클로드는 젖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에단은 그런 아이의 보드라운 뺨을 흠뻑 적신 눈물을 닦아 주며 수려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네가 이렇게 떼를 쓰는 날도 다 보는구나. 그게 기쁘다고 하면 내가 너무 못난 아비인 걸까.”
“아니요, 아니에요!”
에단의 말에 클로드는 고개를 힘껏 가로저었다.
지금 클로드에게 있어 에단은 최고의 아버지였다. 언제나 멋지고 강하고 든든한 아버지.
한때 아버지는 날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여겼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라가 알려 주었다.
사람은 소중한 것이 생기면 그걸 잃게 될까 봐 두려워진다고. 아버지는 클로드를 너무 소중히 여겨서 두려워했을 뿐이라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클로드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졌다.
“저는 아버지가 좋아요.”
클로드는 그렇게 말하며 에단의 품에 다시 폭 안겼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사라가 서운한 듯 입술을 삐죽이며 두 팔을 벌렸다.
“클로드 님, 저는요? 저는 안 안아 주실 거예요?”
“앗…….”
사라의 말에 클로드는 퍼뜩 놀라며 다시 그녀에게 안겼다.
그러곤 혹시나 서운했을 사라를 위해 그녀의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나는 사라도 좋아. 알지?”
“알아요. 저도 보고 싶을 거예요.”
사라는 그런 클로드를 꼭 끌어안으며 에단에게 조용히 눈짓했다.
그러자 에단 또한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럼 이만 출발하지.”
에단의 명에 암브로시아의 마차들과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제 알톤 영지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에단은 그렇게 말하며 아까부터 가만히 서 있던 마법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로브를 써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힘든 마법사가 살짝 고개를 틀어 사라와 클로드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
그러다 이윽고 에단이 내미는 손을 잡고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잘 다녀오세요!”
사라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에단이 마차에 타 보이지 않자 금방 울상을 짓는 클로드의 손을 대신 쥐어 흔들어 보이며 해맑게 인사까지 했다.
“유모는 안 가?”
“쉿, 클로드 님. 그건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아! 그랬지.”
클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모든 사람의 시선과 관심은 마법사에게 향해 있어서 클로드의 자그마한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제가 저택에 남았다는 인상을 줘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금방 저쪽으로 넘어갈 테니 저한테도 더 섭섭해해 주세요.”
“……난 이미 섭섭해!”
“어머, 그래요? 신나라!”
클로드는 자신이 섭섭하다는 말에 기뻐하는 사라를 보며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다가 말했다.
“그럼 아버지랑 같이 마차에 탄 마법사는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