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28화
사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 모든 가정은 1황자님께서 흑마법에 손을 대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폐하께서는 1황자께서 그 힘에 손을 대셨을 거라 여기시는 건가요?”
“그 아이가 그럴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마탑의 법에 따르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뒷목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가 밀런 소백작이 아닌 마탑의 주인으로서 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크롬벨이 마탑에게 어떠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를 먼저 제시하게. 마탑의 법을 수용할지 말지는 그 후에 논하도록 하지.”
“……과연 그렇군요.”
사라는 노기를 누르고 냉철하게 거래를 시작하는 황제에게 조금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황제와 제대로 된 협상을 해야 할 차례였다.
“이번 알톤 영지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마탑에서는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 하나를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누구지?”
“저요.”
사라는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답했다.
황제는 그런 사라를 보며 조용히 한숨을 삼키고는 말했다.
“……말장난 같군.”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다르지요.”
“한번 말해 보게.”
“저는 얼굴과 목소리를 감추고 암브로시아 공작님과 동행할 거예요.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로서 말이죠.”
“그곳에서 정체를 숨기겠다는 말인가?”
“사라 밀런은 공작가 저택에서 암브로시아 공자를 돌봐야 해서요.”
“……그렇군.”
황제는 어느 정도 납득을 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마탑의 주인인 사라가 나서 준다면 알톤 영지의 일은 분명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쯤 알톤 영지에서 무슨 일을 겪고 있을지 모를 1황자를 좀 더 빠르게 구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크롬벨이 취할 이득은 그것이 전부인가?”
“크롬벨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법사를 포섭할 능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변국에게 경외심을 심어 줄 수 있을 겁니다.”
“호오.”
“감히 넘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겠지요. 여차하면 마탑과 거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
사라의 말에 시종일관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했던 황제의 얼굴에 그제야 흥미가 떠올랐다.
“그럼 마법사로서 전면에 나서 준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이번 알톤 영지에 가게 될 마법사는 마탑을 대표하게 될 것이고, 크롬벨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내리는 명에 최대한 협조할 것입니다.”
황제는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라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떠세요? 이 정도를 내드리면 기쁘게 마탑의 뜻에 협조하실 생각이 드시나요?”
“…….”
사라의 말에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고심했다.
아버지로서의 결단과, 황제로서의 욕망 사이에서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내 아들은 그런 사특한 것에 걸려들 아이는 아니야.”
“……글쎄요. 그러기를 저도 바라고는 있답니다.”
“정말, 흑마법사가 내 아들에게 접근한 정황이 있나?”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고심하는 황제를 뒤로하고 사라는 에단에게 시선을 건넸다.
에단은 그런 사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황제에게 다가갔다.
“폐하.”
“……공작은 어떻게 보는가.”
“마탑과 우호적인 관계를 공식적으로 만들어 둘 수 있다는 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카제르가 그 사특한 것에 손을 댔다면…….”
“제국의 황자로서 진정 자격이 없는 분이 되겠지요.”
냉철하게 떨어지는 에단의 말에 황제는 참담하게 눈을 감았다.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황제는 이내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사라는 그런 황제를 보고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피어나는 꽃 같은 미소를 보고 황제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소름이 돋았다.
“물론입니다, 폐하.”
* * *
황제의 결단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날 밤 황제의 은밀한 뜻을 담은 서신이 암브로시아 공작가에 도착하였고, 사라와 에단은 그 즉시 짐을 꾸릴 것을 명하였다.
제국 전체에 알톤 영지의 상황이 널리 알려졌고, 제국민들은 마탑과 협상에 성공한 황제를 널리 칭송했다.
“알톤 영지에 흉흉한 일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진실이었군 그래. 그러게 마물의 숲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니까.”
“세상에 이 제국에 마법사가 오다니!”
“마탑이라는 게 정말 있었단 말이야? 책에서나 읽었는데!”
“구경 가고 싶은데, 암브로시아의 행렬에 몰래 끼면 안 될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알톤 영지에 지금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 간다고 하지 않아!”
“그래도 마법사님이 함께하시는데……. 내가 살면서 언제 마법사님을 볼 수 있겠나. 응?”
수도에는 암브로시아의 행렬에서 모습을 드러낼 마법사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크롬벨 제국과 근접한 왕국들과 제국들이 보낸 사절단 또한 시도 때도 없이 크롬벨의 수도로 모여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마법사와 마주칠 기회를 잡기 위해 암브로시아 저택 주변을 서성이기도 했다.
“세상에……. 이제 내일이면 출발해야 할 텐데 저 인파를 뚫고 나갈 수는 있을까요.”
메이는 창가에 앉은 사라의 뒤에서 머리를 빗겨 주며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라는 존재가 정말 신비롭고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매일같이 사라를 마주하다 보니 새삼 잊어버린 것이다.
마법사인 사라의 존재가 이토록 큰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저 인파들 속에 귀족들 또한 모여들 거야. 평민들은 두려워 앞에 나서지 못할 테고, 귀족들은 체면을 차리느라 가는 길을 막아서지 못할 테니 괜찮지 않을까.”
사라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창문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가 내려앉고 달이 떠오른 한밤중이었지만, 암브로시아 저택 근처를 서성이는 사람들로 인해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반짝이는 야경을 볼 수 있었다.
“색다른 풍경이네.”
사라는 창틀에 턱을 괴고는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뭔가 심정이 복잡해 보이는 모습에 메이가 조용히 다시 사라의 머리를 빗기 시작할 때였다.
“유모오…….”
사라의 방문 밖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울먹이는 클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로드 님?”
사라는 의자에서 일어나 손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한창 자야 할 시간에 자지 못해 빨갛게 충혈된 눈을 비비는 클로드와 그 뒤에서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벤야민을 볼 수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아프세요?”
사라는 깜짝 놀라 클로드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클로드는 사라의 어깨에 제 뺨을 비비며 울먹였다.
“흐앙, 유모…….”
잠투정 섞인 울음이 터져 나오는 클로드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사라는 벤야민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니?”
“매번 저렇게 잠을 못 자겠다고 버티는데 어떡합니까.”
그는 지친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 벤야민은 클로드와 친해진다는 명목하에 아이의 옆방을 배정받았다.
처음에는 온 팔에 소름이 돋을 정로도 서로 싫어하던 사이였지만, 그래도 조금 친해졌는지 클로드가 잠자기 전까지 말싸움을 하는 관계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간 잠을 잘 못 주무셨어요? 제겐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스승님이 걱정하신다며 저 꼬맹이가 사용인들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클로드 님…….”
사라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클로드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린 클로드가 벌써 사용인들의 입을 단속해 걱정을 끼치려 하지 않았다는 게 도리어 더 안쓰럽게 다가왔다.
“죄송해요. 알톤 영지로 가 있는 동안 많이 서운하실 텐데, 그간 신경을 많이 못 써 드렸지요.”
“흐윽.”
사라의 말에 클로드는 참았던 설움이 밀려드는지 코를 훌쩍거리며 펑펑 눈물을 쏟아 냈다.
“오늘은 저와 함께 자요. 어떠세요?”
“좋은 생각입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세요.”
벤야민은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잠을 잘 자지 못하는 클로드가 신경 쓰여 그 또한 밤을 지새운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것이다.
벤야민도 퀭한 게 당장 잠이나 자고 싶은 얼굴이었다.
“고생했어, 벤야민. 고맙구나.”
“……별것 아니었습니다, 스승님.”
사라의 칭찬에 벤야민의 눈가에 희미한 붉은 기가 올라왔다.
그는 오랜만에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겨 웃으며 사라에게 안겨 있는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꼬맹이에게 스승님과의 마지막 밤을 양보하도록 하지요.”
“꼬맹이 아니야아아.”
“예예, 암브로시아 공자님. 주무십시오.”
벤야민은 끝까지 클로드의 성질을 한번 건드려 주고는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휙 돌려 벤야민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클로드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멈춰 있었다.
“정말 사이가 좋다니까.”
그 모습을 보며 사라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곤 클로드를 안은 채로 방 안으로 들어가 아이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오늘은 저랑 손 꼭 잡고 자요. 클로드 님이 잠들 때까지 제가 재워 드릴게요.”
“정말? 내가 잠들 때까지?”
“그럼요. 제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요?”
사라는 웃으며 클로드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메이는 눈치껏 방 안을 밝히던 촛불을 끄고 벽난로를 피우며 따뜻한 공기를 만들어 냈다.
타닥타닥하고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는 클로드가 자기 전 가장 듣기 좋아하는 소리였다.
“좋아…….”
클로드는 그것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사라의 손을 꼭 쥔 채 눈을 감았다.
사라는 그런 아이의 등을 다른 손으로 부드럽게 토닥이며 메이에게 눈짓했다.
“그럼 주무세요.”
그러자 메이가 조심스럽게 사라의 방문을 닫으며 밖으로 나섰다.
탁, 하고 방문이 닫히자 클로드는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유모.”
“네.”
“아버지랑도 같이 자고 싶어.”
“공작님이랑요?”
“응. 내일이면 유모도 아버지도 알톤 영지로 갈 거잖아.”
“그야 그렇지만…….”
난데없는 클로드의 부탁에 사라는 곤란한 듯 말을 흐리며 아직도 집무실에 있을 에단을 떠올렸다.
그럼 에단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자게 되는 건가? 클로드를 사이에 두고?
사라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안 돼?”
그리고 고민에 빠진 사라를 보며 클로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아이는 어느새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