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104화
가출에 대한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다지고 있었던 사라는 도리어 사과를 하는 론다와 사용인들을 보며 당황해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갑자기 클로드 님을 데리고 가출을 하고…….”
“저희 탓입니다. 그렇게 가시고 난 뒤 깊이 반성했습니다.”
론다는 깊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책감으로 굳어진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주인님께서도 사라 님이 그렇게 가신 뒤 반성하고 있노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공작님이요?”
“예.”
사라는 괜한 죄책감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에단이 걱정할 만한 상황을 잔뜩 만들어 놓고 제멋대로 굴어 버린 탓이다.
“공작님이 반성하실 일이 아니에요. 이건 제가 너무 멋대로 굴어서…….”
“아닙니다. 앞으로는 저희도 밀런 소백작님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사라는 곤란한 얼굴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도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론다는 그동안 클로드가 사라의 품에 안기는 것조차도 안 된다고 하며 벌벌 떨지 않았던가.
“클로드 님, 어쩌죠.”
“나도 몰라.”
클로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크게 하품을 내쉬었다.
이리저리 눈앞이 휙휙 바뀌며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어느새 졸음이 쏟아졌다.
사라는 아이의 몸을 편하게 고쳐 안으며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뜨끈한 아이의 뺨이 그녀의 어깨에 닿으며 무게를 실었다.
“……일단 클로드 님부터 재우러 갈까요.”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론다는 이번에는 클로드를 넘겨 달라는 말 없이 앞장서서 클로드의 방으로 걸어갔다.
요 며칠 동안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과보호를 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태도였다.
어느새 과보호에 적응을 한 건지 이번에는 이쪽이 더 적응이 안 될 지경이었다.
사라는 론다의 뒤를 조용히 따르며 조금 멀찍이 서 있는 메이를 살짝 노려보았다.
‘비밀로 해 달라니까 정말!’
메이는 그런 원망이 담긴 사라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했다.
그래도 그나마 클로드가 모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사라는 좋게 생각하려 애쓰며 론다를 따라 클로드의 방으로 들어가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따악,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아이의 옷은 순식간에 편안한 잠옷으로 바뀌었다.
“와!”
사라가 온 뒤로 이런 식으로 옷을 자주 갈아입었지만, 클로드는 매번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사라의 입술 사이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손에서 시작된 푸른 마력은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클로드의 몸을 한 번씩 훑으며 지나갔다.
졸린 상태에서 목욕하기는 귀찮을 것 같아 이렇게 간단하게 씻겨 주는 것이었다.
“시원해…….”
클로드는 몸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끼며 활짝 웃었다.
이제 막 들어와서 졸리기 시작했는데, 이런 식으로 유모가 씻겨 주자 아주 편하고 좋았다.
“잠들 때까지 곁에 있을게요.”
사라는 그렇게 말하며 방 안에 있던 론다와 사용인들에게 손짓해 보였다.
그들은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조용히 클로드의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나 잠들기 전까지 꼭 옆에 있어야 해?”
“그럼요. 잠이 푹 드는 것까지 보고 있을게요.”
곁에 있어 준다는 그녀의 말에 클로드는 한결 평안한 얼굴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폭신한 이불과 베개의 감촉에 더욱 몸이 나른해졌다.
그렇게 침대와 한 몸이 되어 가는 아이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주며 사라는 미소 지었다.
그때 클로드가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모 있잖아.”
“네.”
“나 일렉사가 조금 부러웠어.”
“…….”
클로드의 말에 사라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일렉사를 보며 클로드가 조금 외롭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아무래도 그 모습을 보며 어머니라는 존재가 떠오른 듯했다.
죄책감에 가슴 깊은 곳이 욱신거리며 조여들었다.
“근데 조금 안 부러워졌어.”
“왜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사라를 보며 클로드는 두 뺨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나한테는 유모가 있잖아.”
“……!”
클로드의 대답에 사라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맑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담고 있는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가슴속에 맺혀 있던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찡하게 조여 오는 가슴에 기분 좋은 통증이 느껴졌다.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슴께에 가져가 꾸욱 눌렀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클로드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며 사라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녀가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자 클로드는 사라의 귓가에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유모가 내 엄마였으면 좋겠어.”
“……!”
“비밀이야?”
클로드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사르르 웃었다.
잠기운이 확 몰려오는지 아이의 말은 살짝 어눌하게 늘어졌다.
“어머니가 들으면 서운하실 수도 있으니까, 비밀이야…….”
“아…….”
천천히 감기던 클로드의 눈꺼풀이 한 차례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점차 고르게 변하는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사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클로드 님.”
나직하게 불러도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 그렇게 클로드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라는 이내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괴롭게 신음했다.
“이러면 반칙이잖아요…….”
쿵쾅쿵쾅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자신이 이런 말을 들어도 될 자격이 있을까.
내가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어둠의 꽃을 쓴 박혜연이, 이런 말을 들어도 될까.
‘주제도 모르고 기쁘다니.’
씁쓸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클로드의 저 말이 너무나 기뻤다.
클로드를 위해서라면 그녀의 모든 것을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도리어 그녀가 아이에게 받아 가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이 모든 불행의 씨앗을 스스로 뿌린 것만 같아 늘 괴로웠었는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이의 이런 작은 말들에 위로받는다.
“미안해, 디엘린. 나 조금만 더 기뻐할게.”
사라는 붉게 달아올랐을 뺨의 열기를 식히며 잠깐의 행복을 만끽했다.
이제는 디엘린이 찾아와 클로드를 데려가겠다고 해도 절대 넘겨줄 수 없을 정도로, 클로드라는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 사라는 아이의 턱 끝까지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그리고 잠든 클로드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자요.”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사라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론다가 다가와 물었다.
“클로드 님은 잠드셨나요?”
“네. 낮잠 시간을 조금 넘긴 모양인지 잘 자네요.”
“그렇군요.”
론다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사라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말을 흘렸다.
“주인님께서도 오늘 낮잠을 주무신다고 일찍 방으로 가셨으니 밀런 소백작님께서도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공작님이 낮잠을요?”
사라는 처음 들어 보는 말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늘 바쁜 에단이 낮잠이라니.
그녀가 암브로시아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혹시 어디 몸이 안 좋으신 게 아닐까요?”
“주인님께서는 그저 피곤하다고만 하셨습니다.”
“…….”
혹시 나 때문인가.
확신에 가까운 의심이 들었다.
사라는 양심이 쿡쿡 쑤시는 느낌을 받으며 미간을 좁혔다.
“제가 밖으로 나간 뒤에 공작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뇨. 밀런 소백작님의 제자 분들에게 마련해 준 연구실에 한 번 들러 보시고는 평소처럼 업무를 보셨습니다.”
“…….”
론다의 대답을 듣고 나자 더더욱 그녀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제자들과 나눈 맹약 때문에 그녀가 피를 토하는 정확한 이유조차 듣지 못했던 에단이었다.
사라는 그저 괜찮을 거라는 말만 했을 뿐 그에게 어떠한 확신도 주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에단의 걱정 어린 보호를 답답하다 치부하며 가출까지 감행한 것이었다
“제가 한번 가 봐야겠어요.”
“하지만 이미 잠이 드셨을 겁니다. 저와 베론이 잘 살피겠습니다.”
론다는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사라를 말렸다.
하지만 이미 에단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 사라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에요. 제가 원인 제공을 한 것 같은데, 안 가 보면 제 마음이 더 불편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사라는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론다는 그녀의 뒤에 조용히 숨어 있던 메이를 슬쩍 바라보았다.
“…….”
“…….”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은밀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 후 사라의 뒤를 따랐다.
“아, 베론.”
빠른 걸음으로 에단의 방까지 순식간에 당도한 사라는 방문 앞에 서 있는 베론에게 다가갔다.
사라를 발견한 베론은 에단의 방문을 힐금 보더니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밀런 소백작님, 외출은 즐거우셨습니까?”
“공작님은요? 혹시 어디 아프세요?”
어쩐지 베론 또한 사라에게 걱정을 끼칠 수 없다는 것처럼 구는 것 같아서 그녀는 다급히 에단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그러자 베론의 얼굴이 곤란한 듯 흐려졌다.
그렇지 않아도 에단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의심을 하던 차였다.
베론의 반응은 사라의 의심을 점차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주인님께서는 괜찮으십니다. 혹시 밀런 소백작님께서 걱정하거든 괜찮으니 쉬라고 말씀 전하라 하셨습니다.”
“잠깐 얼굴만 보고 나오는 것도 안 된다고 하셨나요?”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만…….”
“그럼 잠깐만 들어가도 될까요? 공작님이 피곤하신 거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사라는 적극적으로 제 쓸모를 어필하였다.
베론의 얼굴에 갈등하는 기색이 떠오르자 사라의 눈빛은 더더욱 간절해졌다.
“으음, 잠깐이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사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베론을 스쳐 지나가 에단의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사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번엔 베론과 론다가 시선을 마주했다.
“…….”
“…….”
끄덕.
이번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