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남주의 시한부 유모입니다 96화
“…….”
에단은 마치 정곡이라도 찔린 것처럼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은근히 미소 짓는 사라의 얼굴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코앞에서 보고 있으니 에단은 결국 속절없이 흔들리고야 말았다.
“암브로시아의 힘을 상대할 때마다 피를 토한다고 들었습니다. 지난번 황궁에서 피를 토했던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메이에게 들은 사실을 털어놓는 그의 낮은 목소리는 묵직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사라가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 두려워졌다.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놓아 달라고 할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괴물 새끼라고 할까, 저주받은 힘을 타고난 만큼 생각하는 것도 추악하기 그지없다고 할까.
사라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한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으니 그는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피를 토한다는 건 몸에 큰 무리가 가는 일입니다. 보통 병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있을 리도 없지.”
에단은 조심스럽게 사라의 손목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한 줌도 되지 않는 가느다란 그녀의 손목이 거슬렸는지 그의 미간이 은근히 좁혀졌다.
“그래서 그대가 암브로시아를 떠나겠다고 해도 내가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
에단의 말에 어떻게 오해를 풀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사라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치 그녀를 이대로 놓아주겠다는 것처럼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는 사라가 다급하게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다만 그대는 지나치게 자비로우니까.”
에단은 그렇게 말하며 붙잡은 그녀의 손목 위로 이어진 손등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서로 스치는 손의 감촉이 뜨거워서 사라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다가 그는 천천히 사라의 손에 손가락을 하나하나 얽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그저 그대의 자비에 기댈 뿐입니다.”
그는 허리를 살짝 숙여 마치 허락이라도 구하는 것처럼 제 입술에 사라의 손등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은근한 긴장감에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금방이라도 그의 입술이 손등에 내려앉을 것만 같은 간질거리는 느낌.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숨결에 솜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
그때, 에단이 쓱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짙고 깊은 청색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내 꼴이, 내 상황이 이러하니 차마 곁에 있어 달라 청하지도 못하겠군.”
씁쓸하게 흘러나오는 에단의 목소리에 그녀는 절로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 그가 미안한 마음에 암브로시아 공작가에 있어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내뱉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있을게요, 있을 거예요!”
다급하리만치 빠르게 튀어나오는 사라의 대답에 에단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사르르 눈매를 휘며 웃었다.
사라의 손등에 에단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부터 시작해 천천히 몸에 화끈한 열이 도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의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었다.
“고맙습니다, 사라.”
입술을 떼고 숙였던 허리를 바로 하며 웃어 보이는 에단을 사라는 홍조가 띤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내가 큰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당신은 나와 클로드에게 한없이 다정했으니까.”
“욕심이라뇨, 그렇지도 않아요. 저는 그저 제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사라의 대답에 에단의 입술이 씁쓸하게 갈라졌다.
“그동안 당신은 나와 클로드에게 한없이 다정했으니까. 이건 욕심이 맞습니다.”
사라가 암브로시아의 힘 때문에 조금씩 힘을 잃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면, 에단은 이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단은 그의 갈증을 최대한 채우기 위한 노력을 아낌없이 해 볼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런 당신을 나로부터 지켜 낼 겁니다.”
그의 말에 사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에단이 원하는 대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이었다.
사라의 그 작은 행동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그는 웃어 보였다.
사라는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충분한 고민도 해 보지 못한 채 그의 집무실을 나서게 되었다.
“밀런 소백작님, 대화는 잘하셨습니까?”
베론이 멍하게 풀어진 사라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이 다가와 물었지만 사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론다와 서로 마주 보며 시선을 교환하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방까지 모시겠습니다.”
“괜찮아요, 론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사라는 제 옆으로 다가오는 론다에게 손을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에 걱정스러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제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털썩 누운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단단히 홀려 버렸네.”
조금의 해명조차 하지 못한 스스로가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에단에게 제대로 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그가 원하는 말만 내뱉고 왔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말도 없긴 했지만…….”
그의 말을 모두 부정할 순 없었다.
피를 토하는 건 정말 몸에 무리가 가긴 했고, 암브로시아의 힘을 잠재우기 위해 박혜연의 생명력을 쏟아붓고 있는 것 또한 맞으니까.
다만 에단이 박혜연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그리고 그녀가 박혜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게 이토록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제자들과의 맹약을 어길 순 없었다. 어기게 된다고 해도 지금 이 시점은 아니었다.
“이럴까 봐 내가 숨긴 거였는데.”
사라의 원망은 자연스럽게 이 모든 사실을 에단에게 쉽게 털어놓은 메이를 향했다.
메이가 머릿속으로 어떤 계산을 했고, 어떤 판단을 내려서 에단에게 털어놓은 것인지 그녀는 몰랐다.
다만 사라는 오늘 이 일을 기억하기로 했다.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 * *
1황자, 카제르 드 크롬벨은 올리븐이 주고 간 아티팩트를 손에 꽉 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스멀스멀 검은 연기가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아직은 불안정하군, 그래.”
초조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여유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 이 힘을 제 것으로 삼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감에 시달렸다.
카제르의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올리븐이 했던 말들이 반복적으로 들리고 있었다.
‘네가 가진 것, 입는 것, 누리는 것들을 홀랑 벗어 버리고 알몸이 된다고 해 봐. 그럼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뭘 거 같아?’
그 질문에 카제르가 답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바로 힘이야.’
올리븐은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고 은밀하게 그의 숨결을 조여 왔다.
‘네가 그자에게 당한 건 힘이 없어서야. 신분? 그게 무슨 상관이람, 목숨 앞에서 그딴 건 소용 없거든. 자연이라는 게 그래.’
자비 하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는 온기가 없었다.
‘곱게 자란 꽃 같은 우리 소환자께서는 모르고 있었겠지만, 다행히 나를 만났으니 이제 잘 할 수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힘은 내가 좀 줄 수 있을 것 같거든.’
뿐만 아니라 건네는 달콤한 제안 속에서는 은근한 빈정거림이 느껴졌다.
‘물론 대가는 필요해. 그게 뭐가 됐든 아주 값비싸고 소중한 것이어야 할 거야. 어때, 거래를 하겠어?’
마지막으로 그에게 내밀어지던 손은 거부를 모르는 것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카제르는 그날의 올리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악마 같은 자식.”
그러곤 저기 저 멀리에서 두 무릎을 모은 채 쭈그려 앉아 있는 올리븐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갑자기 찾아와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저러고 앉아 있었다.
말을 걸어도 대답도 안 하고, 카제르가 마물 사냥을 나갈 때에나 움직였다.
묵묵히 마물들의 시체를 처리하고 수습하고는 다시 알톤 성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것을 반복하는 올리븐이 이제 슬슬 거슬리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왜 저러는 거야, 저 자식은. 짜증 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