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친구?”
“응! 나도 친구가 갖고 싶어.”
“그런 거라면 아빠가 구해다주마.”
“싫어!”
아빠가 데리고 오는 친구들은 안 봐도 뻔하다.
과거에도 이미 친구를 갖고 싶단 말에 아빠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었다. 제국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의 귀족 자제들을 데리고 왔었다.
그러나 그들은 친구라고 볼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나랑 친구가 되고 싶어서 온 이들이 아니었다.
베일에 감춰진 아마네트라는 아이가 궁금했을 뿐. 현 후작의 딸이라고는 하나 거의 후작가 안에서만 지냈고 모친에 대한 소문이 무성한 아이.
귀족가 자제들에게 아마네트는 그저 정복하고 싶은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몰랐던 과거의 아마네트는 그렇게 불려온 친구들이 좋았다. 처음 만나보는 또래 친구들이었으니까.
그들이 내게 어떠한 무례를 끼치는지 알면서도 다 이해했다. 본능적으로 느끼면서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걱정 마렴. 아빠가 좋은 친구를 구해다 줄게.”
아빠는 나를 위해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 부풀어 나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나중에. 지금은 내가 직접 구할 거야!”
“그, 그럴래? 하지만 친구 문제는 아빠가 직접 나서서 한 명 한 명 살펴보고…….”
그렇게 고른 애들이 하나같이 제정신 아닌 애들이었답니다.
아빠는 나름 좋은 가문에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나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서 골랐겠지만, 좋은 가문도 좋은 교육도 다 필요 없다.
인성이 글러먹은 인간들인걸. 과거에 어찌나 날 괴롭혔던지.
물론 데려온 애들 중에 몇이랑은 친해지기도 했었다. 서로 티타임도 가지고 서로의 집도 방문하고.
하지만 진심으로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일단 그 복수는 나중으로 미루자. 그때만 생각하면 불쑥 불쑥 분노가 올라왔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거절해도 아빠는 분명 그 아이들을 데리고 올 것이다. 흘러간 과거의 몇 가지 일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정말 싫은 거야?”
“응. 싫어.”
우유부단한 아빠에게 돌려 말해봤자 오해만 커질 뿐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단호하게 거절을 하는 편이 낫다.
“아마네트…….”
“내가 원하는 친구 먼저 사귀고 그다음에. 그렇게 해줄 거지?”
“하지만…….”
“그렇게 안 하면 다른 친구들은 얼굴도 안 볼 거야.”
단호하게 말하자 아빠는 재빠르게 수긍했다.
“아니야. 알겠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정말?”
“그래. 아빠가 한입 가지고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잖니.”
“알았어. 이번엔 믿어볼게. 아빠 고마워 사랑해.”
아빠가 말을 바꿀까 봐 급히 웃으며 사랑을 표현했다.
“왠지 모르게 조금 찝찝하지만…….”
“에이, 찝찝할 게 어디 있어. 아빠도 참.”
손까지 휘적거리며 나의 순수한 의도를 어필했다.
가만히 내 모습을 보던 아빠는 깊은 한숨을 내쉬다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어디로 구하러 갈 거야? 사람들이 많이 간다는 호숫가?”
“비밀! 아빠는 바쁘니까 여기 있어. 나는 멜린지랑 갈래.”
“그건 안 된다. 위험해.”
“어어, 한입 가지고 두말하려고? 내가 사랑한다고 한 거 고맙다고 한 거 뱉어내.”
사람이 이러면 안 되지. 바로 직전에 그렇게 하라고 허락까지 해놓고.
“그치만 그건…….”
“걱정 마. 아빠가 호위도 붙여줄 테니까 걱정 안 해.”
“아……, 알았어.”
계획을 들킨 듯 아빠의 눈동자는 하염없이 흔들렸다.
“응! 알아서 아빠가 날 보호해줄 거잖아.”
“그, 그렇지. 우리 따님, 언제 갈 예정이야? 물론 아빠가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준비만 하려고.”
아까보다 풀이 죽은 아빠를 보며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바로! 준비해줘!”
그래야 아빠가 다른 짓을 못 꾸미겠지. 오늘이 아빠가 제일 바쁜 날이니까.
후작인 아빠는 대외적으로 꽤 바빴다. 특히 오늘은 펠리아스 공작가가 주최가 되어 여는 모임 날이었다.
딸에게는 쩔쩔 매는 아빠였지만, 제국에서 유력한 고위 귀족가와 교류는 놓치지 않고 참석해 입지를 다졌다.
오늘이 딱이라는 말씀.
여주인공을 처음 만나러 가야 하는데, 아빠가 뒤에 서서는 노려보고 있으면 첫인상부터 좋지 않을 게 분명하다.
“정말 오늘 가는 거지?”
“응! 왜 안 돼?”
“아냐. 안 될 건 없지만…….”
오늘은 따라 갈 수 없는 스케줄이라는 걸 알기에 아빠는 머리를 쓰는 듯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오늘 외출이 가능한 마차들이 없을 텐데.”
“아닌데. 다 운행 가능하다고 하던데?”
“벌써 그것도 알아봤어?”
“아니. 그냥 해본 말인데. 아빠 나한테 거짓말했구나?”
놀란 아빠는 급히 숨을 들이 마시고 손을 급하게 저었다.
“아냐. 거짓말이 아니라…….”
“그럼 바로 출발할 수 있게 해줘. 얼른 가고 싶으니까.”
더 이상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아서였을까, 아빠는 모든 걸 포기한 듯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외출하기까지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로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했지만 밤이 늦으면 내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아빠의 작은 바람이 들어있는 듯했다.
물론 그런다한들 내가 안 갈 리는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갈 때 쯤,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바로 마차로 향했다.
“너무 늦게 오길래 아빠가 일부러 막는 건가 했어.”
마차에 도착하자마자 볼멘소리로 마부를 닦달했다.
“허허. 그럴 리가요. 그저 준비가 조금 늦었을 뿐입니다.”
마차 문을 급하게 여는 마부를 가만히 쳐다봤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 우물거리던 그는 내가 얼른 타길 바라는 것처럼 고개를 조아렸고, 난 마차에 올라탔다.
“정말 그런 거지? 아빠가 개입한 건 절대 아니지?”
“그럼요. 후작 각하께서는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답니다. 그저 아가씨를 원하는 곳에 데리고 가달란 말만 하셨어요.”
“그럼 됐어.”
단호하게 말하는 마부를 뒤로하고 마차에 올라탄 나는 창가로 바짝 달라붙었다.
역시나 멀지않은 기둥 뒤편에 아빠가 보인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올 것처럼 몸을 움찔거린다.
저렇게 커다란 사람이 저렇게 숨는다고 가려 지냐고!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빨간 색이어서 어찌나 잘 보이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아가씨, 뭐 보세요?”
“응? 아냐. 그보다 멜린지. 마부에게 록페르타 고아원으로 가달라 전해줘.”
“고아원이요?”
어디로 가는지는 아빠뿐 아니라 멜린지에게까지 비밀로 했던 터라, 목적지를 들은 그녀는 꽤 놀란 표정을 해보였다.
“응!”
“그렇지만, 정말 고아원이 괜찮으시겠어요?”
“응! 왜. 멜린지도 반대하려고?”
멜린지는 조금은 슬픈 눈으로 옅은 미소만 지었다. 어쩐지 아무것도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멜린지는 마부와 연결된 마차 창문을 열고 목적지를 말했다.
고아원이란 얘기를 들은 마부 또한 꽤 놀란 듯 눈이 커졌다. 마차는 곧 출발했다.
아빠가 이렇게 순순히 보내준 게 의심스럽다. 아무리 바로 따라오지 못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아빠는 올 사람인데.
“아가씨……. 고아원은 왜 가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친구 구하러.”
“정말 친구 구하러 가시는 게 맞나요?”
정곡을 콕 찌르는 멜린지의 질문에 난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아 얼른 도착하면 좋겠다.”
“고아원 아이들과 친구를 맺어도 괜찮으시겠어요? 분명 뒤에서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요.”
“뭐 어때. 남들이 뭐라 한다고 해서 내가 어디 주눅 들 사람인가? 난 걱정하지 않아도 돼. 멜린지.”
계속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그녀를 향해 나는 두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에도 멜린지는 굳어진 표정을 지워내지 못했다.
“후작 각하가 아시면 난리나실 텐데…….”
“나는 아빠에게 친구를 구하러 간다고 분명히 말했고, 실제로 그러려고 가는 길인걸. 내가 좋은 가문의 친구를 사귀겠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죠…….”
내말에 수긍한 듯 멜린지도 천천히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가자.”
고아원. 과거에는 갈 일도 없었을 뿐더러 현재도 갈 일이 없었을 그 곳.
하지만 그곳에는 내 미래에 대한 해답이 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고아원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하늘은 어둑어둑 해진 상태였고, 아이들은 밥을 먹으러간 건지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네요.”
“곧 나올 거야. 귀족가의 마차가 들어오는데 아무도 안 나올 리가 없지.”
내가 탄 마차를 제외하고도 뒤에 두 대나 더 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거창한 행렬이 아닐 수 없다. 역시나 예상대로 마차들이 하나둘 들어오자 누군가가 우리 쪽으로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귀한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은 한 여자. 여자를 보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멜린지. 이제 내리자.”
“아직 기사님들의 확인이 다 끝나지 않았어요.”
“아냐. 이정도면 충분해.”
도착한 이후 먼저 마차에서 내린 기사들은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내 안전에 어떠한 문제가 없도록 말이다 .
“하지만.……”
“어서.”
재촉하는 내 말에 멜린지는 결국 먼저 내려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난 그 손을 잡고 마차에서 천천히 내렸다.
“여기까진 어,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예사 가문의 분이 아니신데.”
“내가 누군지 알 건 없고. 나 친구를 구하러 왔어.”
재수 없는 놈한테는 똑같이 재수 없게 대해주어야 한다.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학대하는 인간들은 모두 잘근잘근 밟아야한다.
“친구요?”
“응! 친구!”
“친구라면 어떤 분은 원하시는 겁니까.”
“원장님이 제일 싫어하는 아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