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해가 많이 짧아졌다. 이젠 퇴근 시간인 오후 여섯 시만 돼도 사방이 어둑어둑해진다.
한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긴팔로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 바람막이나 코트를 입고 다니는 모습도 많아졌다.
서초역 앞에는 대법원이 있고, 대법원 뒤에는 대검찰청이 있다. 대검찰청 바로 뒤에는 서초경찰서고, 길 건너편에는 서울고등검찰청과 서울고등법원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법으로 먹고사는 공무원들이다. 칼퇴근의 대명사인.
오후 여섯 시 정각이 조금 넘으면 반포대로 주변 보행로는 서초역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로 붐빈다.
서초역으로 향해가지만 최종목적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고, 곧바로 퇴근해 집에 가는 사람들도 있다. 법과 관련된 일을 한다 뿐 보통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이게 평소 서초역 주변 모습이지만 오늘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묘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섯 시부터 여섯 시 삼십 분. 퇴근 피크타임이 끝나면 법원과 검찰청을 끼고 있는 반포대로 주변 보행로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조용한 거리로 변한다.
차는 가득 찼는데 다니는 사람은 없는 묘한 거리.
그런데 오늘은 퇴근 피크타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서초역으로 향하지 않고 대법원을 지나 대검찰청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손에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도 꽤 있었다. 대부분은 검찰을 비판하고 각성을 요구하는 문구였지만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도 있었다.
‘Ekdrjwl 보고 있나? 검찰 아웃, 네 가운데 다리도 아웃.’
***
여주시에 있는 장문오 자택.
지금 이곳엔 장문오를 비롯해 그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스마트폰 크기의 스피커을 앞에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흠….”
재생이 끝나자 장탄식이 제일 먼저 흘러나왔다.
“시장님. 이 대화 속 남자가 정말 용현철 맞습니까?”
“네. 확실합니다.”
“대체 이 파일은 어디서 난 겁니까?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겁니까?
“어허. 김 의원. 지금 시장님을 두고 취조하는 겁니까?”
“크흠. 죄송합니다. 시장님. 워낙 충격적인 내용이라 표현이 좀 거칠었던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이 대화 내용을 들었을 때 저도 여러분들과 똑같은 감정이 들었으니까요.”
지금 이들은 얼마 전부터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다.
일단 민국당 복당 이후 장문오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오르기만 했다. 거침없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의 엄청난 상승세다.
이대로만 간다면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선전(善戰)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선전을 기대할 수도 있다는데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선전은 필요 없다. 일등 말고는 모두가 패배자일 뿐이다. 인지도가 거의 없는 비 인기당 후보가 선전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민국당은 그럴 수 없다.
대한당 다음으로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무조건 이겨야 한다.
그렇다면 장문오 지지도가 그런 확신이 생길 만큼 엄청난가?
청년층은 몰라도 중장년층까지 포함하면 아직은 부족하다.
내년 대선까지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남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 기간 동안 대한당 후보를 확실하게 앞지를 자신이 없다면 시간이 갈수록 불리한 건 장문오다.
대선에서 여론이 굉장히 중요한데 여론을 조장하는 메이저 언론사 상당수가 친 대한당 성향인 게 가장 크다.
이대로 가면 위험했다. 뭔가 획기적인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조금씩 설득력을 얻고 있는 상황에서, 너무나도 완벽한 카드라 눈앞에 딱 하고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너무 완벽해서 의심이 갔다. 차리리 20~30% 정도 보완이 필요한 내용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손댈 필요조차 없는 맞춤형이다 보니 오히려 의심스러워 보였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
‘이걸 이용해 정치적 역공을 펼치려는 게 아닐까?’
‘왜 하필 지금에서야 기다렸다는 듯 이런 자료가 튀어나온 거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들이었다.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게 실례인 건 알지만 그래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자료 정말 믿을 수 있는 출처에서 나온 거 맞죠?”
표현만 유해졌다 뿐, 조금 전 흥분한 얼굴로 물어본 김 의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질문이었다.
“밝히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어디가 출처인지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게 뭡니까?”
“제가, 저 자신보다 더 믿는 사람에게 받은 자료라는 사실입니다.”
“아…!”
두 번째 장탄식이 터졌다. 녹음파일 재생이 끝났을 때보다 더욱 극적인 감정이 담겼다.
“단, 제가 이분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진 게 문제이긴 합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런 결정적인 자료까지 얻었으니, 이걸 전부 갚으려면 어떡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혹시 보상을 바란 도움인가요?”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도움이 있다. 보상을 바라는 도움, 보상을 바라지 않는 도움.
도움이라는 단어 뜻이 ‘남을 돕는 일’인데 보상을 바란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정치판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무조건적인 도움이란 없다. 도움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내놔야 하는 기브앤테이크가 당연한 곳이 정치판이다.
그런데 장문오가 갚기 힘들 정도로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으니, 측근들은 슬며시 걱정이 된 것이다.
“바라는 게 있긴 합니다.”
“혹시 많이 부담스러운 일인가요? 솔직히 말씀드려 말도 안 되는 조건이 아니라면 바라는 걸 들어줬으면 싶습니다. 이 파일에는 그러고도 남을 가치가 들어있으니까요.”
“제가 생각할 땐 말이 안 되는 조건입니다.”
“아…!”
세 번째 장탄식이었다.
이번엔 굉장히 아쉬운 감정이 실렸다. 실망 어린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무조건 이겨달라는 게 조건이니까요.”
“네에에? 그게 정말이십니까?”
“사실입니다.”
“그게 말이 되…. 아, 그렇군요. 그래서 말이 안 된다고 하신 거군요.”
“그럼 이제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 이야기 나눠 볼까요?”
“무조건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당과의 협상 카드로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대한당을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칼을 들고 협상이라니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류명훈 전 대통령 일을 벌써 잊은 겁니까?”
장문오 측근 대부분은 류명훈 정권때부터 시작된 인연들이다. 그런 만큼 대한당에 대한 원한도 각별하다.
“맞습니다. 어설픈 카드를 가졌다면 모를까 이 정도 핵폭탄급 자료를 가졌는데 굳이 협상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그냥 기자들 불러서 바로 풀어버리시죠. 안 그래도 용현철 입학 비리로 떠들썩한 상황이라 효과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할 겁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지금이 최적기입니다. 이 자료를 가지고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수는 없겠지만, 영부인을 공략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정권은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그럼 다들 바로 공개하는 것에 동의하시는 것으로 알고 일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네.”
***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대검찰청 앞에 약 천여 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다. 각자 피켓을 들고 질서정연하게 각자의 요구사항을 말했고, 그 모습을 취재하는 기자들도 많이 모였다.
시위는 한 시간 동안 진행됐고 경찰과의 어떤 충돌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굉장히 이상적인 시위 형태였다. 첫 시위치고 천여 명은 적은 숫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면은 당연하고 유명 일간지 제1면을 차지할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역시 사람들의 예상처럼 그렇게 당연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민국당 몇몇 의원들이 요청한 기자회견에서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 때문에 대검찰청 시위 기사는 제대로 관심도 받지 못하고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속보! 용현철 녹음 파일 전격 공개. 충격적 고백]
[용현철 갑질의 끝을 보여주다.]
[갑질과 비리의 절묘한 이중주. 용현철이 보여준 세상.]
[국가대표 선발비리, 입학비리, 임용비리가 사실로 밝혀져. 과연 병역비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이자 한 여자의 재미난 장난감이었던 남자, 전명우]
[연애가 예정된 톱스타 커플은 과연 누구?]
[연예인인 동네북인가?]
…
[악당의 탄생, 용현철]
악당은 사전적으로 나쁜 짓을 일삼는 사람을 의미한다.
악당은 영화 속에서 많이 등장한다. 스토리를 극적으로 만들거나 주인공을 빛나게 하려는 의도로 많이 이용된다.
그런데 악하고 독하고 비열한 전형적인 영화 속 악당이 현실에서도 존재했다.
용현철 이야기다.
그는 원래 승마선수였다. 그러나 승마선수를 하기에 덩치가 너무 커지면서 조정으로 종목을 바꿨다.
그때가 고2였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악당 탄생의 시작이었다.
선배의 다리를 부러뜨려 대신 국가대표가 되고, 수상 경력이 꼴찌인데도 면접에서 만점을 받는 기염을 토하며 당당하게(?) 한강대학교에 합격한다.
안타깝게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얼마 전엔 대리시험으로 어렵기로 소문난 임용시험에 합격하는 기적을 선보였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비리라는 비리는 다 저지르고 다니는 용현철이 과연 군대는 정당한 방법으로 면제받았을까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다.
(중략)
- Just News 박정훈
자극적인 제목의 수많은 기사들이 온라인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정부와 여당 그리고 용씨 가문이 기사들을 내리려고 했지만, 그들의 입김이 통하는 곳은 메이저 언론사가 전부다.
우후죽순 생겨난 가내수공업 수준의 언론사들은 통제가 불가능할 만큼 무수히 많았다.
포털사이트 통제해 기사들을 없애려고 했지만 초이스 시큐리티의 역공작으로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처럼 해외에서 운영하는 SNS는 그런 식의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수십 수백 개의 글이 기사들로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비슷 내용이었지만 용현철의 안하무인 같은 행동에 분노한 네티즌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욕으로 댓글을 도배했다.
국민들 전체가 들고일어나자 정부도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한강대학교가 가장 먼저 여론에 굴복했다. 한강대학교 총장과 체육교육학과 학과장이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다음으로는 국가대표 선발 비리와 관련 조정 국가대표 감독과 코치진 전원이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번 사태의 가장 결정적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황금숙, 조순희, 용현철이 묵묵부답이었다. 핵심인 몸통은 건드리지 않고 주변 인물들만 책임을 지는 모습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엉터리 해결방식에 대중들의 불만은 점점 쌓여갔다.
바로 이런 혼란 속에서 색다른 시선의 게시물이 하나 올라왔다. 모두들 용현철이 저지른 비리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 글은 녹음 파일에서 아주 잠깐 언급한 용씨 가문에 주목했다.
[용씨 가문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쓸 데 있는 연구 결과.]
용현철 녹취록을 들었다. 나 또한 사람이라 용현철이 저지른 뻔뻔하고 철없는 행동에 굉장히 분노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 분노했을지언정 그가 저지른 비리에 놀라진 않았다. 우리나라 상류층 인간들의 상당수가 그와 비슷한 형태의 갑질과 비리를 저지르고 다녔기 때문에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 내가 이번 녹취록을 들으며 의아했던 것은 용현철이 저지른 수많은 비리가 아니라 아주 잠깐 언급된 ‘용씨 가문’의 정체였다.
솔직히 용현철을 알기 전까지 나는 용씨 가문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우리나라와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보는 집안을 그동안은 나는 왜 몰랐을까?
그래서 조사를 시작해봤다.
일단 용현철의 아버지 용선재에 대해 조사해봤다. 용선재는 입시학원으로 유명한 기가 싱크빅의 소유주였다. 한때는 10년 가까이 우리나라 최고의 입시학원 자리를 지켰지만 지금은 혜성처럼 나타난 최건우의 초이스 에듀에 밀려 이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또다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입시학원 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한 초이스 에듀는 정부가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이인자에 불과한 기가 싱크빅을 장관들과 국회의원들이 눈치를 볼까?
알아보니 그건 아니었다. 한때 시가총액이 1조원을 돌파한 적이 있는 기가 싱크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관들과 국회의원들이 눈치를 볼 만큼 대단한 권력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그렇다면 과연 정치인들은 누구의 눈치를 본 것이란 말인가?
단순히 용현철의 허언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용현철이 저지른 비리는 너무 크고 많았다. 단순히 돈 좀 잘 버는 학원 원장 아들내미가 저지를 수 있는 급의 비리 규모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도 녹취록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제 남는 건 한 사람뿐이다.
용현철이 작은 아빠라고 불렀던 용선국. 우리가 몰랐던 용씨 가문의 수장.
용씨 가문은 대체 어떤 곳일까? 나는 여기서부터 조사를 다시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