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37화 (237/256)

제237화

초이스 시큐리티 작전 지휘 차량.

일명 ‘초리티1’은 겉으로 보기엔 그냥 버스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부는 수십억 원이 넘는 첨단 장비들로 꾸며져 있다.

바로 그 초리티1이 오늘 소하정을 위해 출동했다.

- 뭐라고 했느냐면.

스피커를 통해 들리던 용현철의 목소리가 멈추자 차량 내부는 스톱 버튼이 눌러진 것처럼 모든 게 멈췄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든 이의 귀가 일제히 그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 장난감이래.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살아 있는 인형. 아! 그냥 인형이 아니라 잘생긴 인형이라고 했다. 전명우 그 아저씨가 외모는 좀 먹어주잖아. 말 잘 듣고 잘 생겼으니 이모 입장에서는 얼마나 데리고 놀고 싶기 좋겠어?

“와, 대박! 실장님, 용현철 저 철없는 새끼 지금 하는 말 들었어요? 완전 결정타네. 크크크. 이 정도면 저놈한테 감사패 하나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말 큰일 했는데.”

용현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자성이 호들갑을 피웠다. 그러나 버스 안에 있는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까지 용현철이 말한 내용들만 전부 공개해도 정부, 여당, 교피아 연합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된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소하정의 용기 있는 선택이 이런 대박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차지훈은 이자성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이야기 다 끝난 거 아니니까 조용히 해.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대화 내용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라 소하정 저 친구를 끝까지 완벽하게 케어하는 거니까.”

잠깐 떠들썩했던 차 안이 조용해졌다.

- 대통령이 와이프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 지금 이게 이해가 안 가? 내가 지금 없는 집 흙수저들의 최후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거잖아. 전명우 그 아저씨도 너처럼 없는 집 출신이거든. 그러니 봐. 대통령이 돼도 이모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 자기 스스로는 대통령이 됐으니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우리 이모 손바닥 위일 뿐이야. 그게 흙수저들의 최후라고.

- 이런 이야기를 영부인, 아니 황금숙 그 여자가 네게 직접 이야기했다는 거야?

- 아니. 우리 엄마한테 하는 이야기를 들었지. 엄마랑 이모는 서로 비밀이 없거든.

-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인데.

- 쯧쯧쯧. 이렇게 순진해서야. 그러니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나한테 기어오르는 거겠지만. 대통령이 되면 뭐해, 그걸 만들어준 사람이 이모인데. 만약 우리 이모가 독한 마음 먹고 손바닥을 뒤집어버리면 전명우 그 아저씨는 그날부로 끝나는 거야.

용현철은 황금숙을 두고는 ‘이모’라고 꼬박꼬박 호칭을 붙였지만 전명우에 대해서는 ‘아저씨’나 ‘그 양반’처럼 얕잡아 보는 단어를 사용했다.

- 왜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하는 건데?

- 글쎄. 입이 근질근질해서일까?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인 걸 혼자 아는 심정 같은.

-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은 걸 내게 알려준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무리 네가 가진 배경이 든든하다고 해도 이 정도 정보면 관심을 가져줄 언론사가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 크크크. 네가 들은 정보가 얼마나 어머어마한 건지 알긴 아는구나. 맞아, 다른 사람이 알면 큰일 나지. 그런데 넌 알아도 괜찮아. 아까도 말한 것처럼 넌 가족밖에 모르는 인간이잖아. 그러니 평생 비밀로 하고 살아야지. 대한민국에서 우리와 이모의 눈을 피해 네 가족을 보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병신아. 대한민국에는 없어도 외국에는 넘치고 넘친다. 우물 안에 개구리 같은 새끼. 외국 나가서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다닐 주제에 큰소리치기는.”

주먹을 불끈 쥐고 혼자 중얼거리는 이자성을 보며 차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막장 드라마를 보며 분노하는 아주머니를 닮아 있었다.

“저 자식, 저러니까 아직 애인이 없지. 쯧쯧쯧.”

“네? 저보고 뭐라고 하신 거예요?”

“아니. 그냥 조용히 남은 이야기나 듣자고.”

“넵,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감정이입을 잘해서. 하하하.”

이자성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자 차지훈은 카페 내부를 찍고 있는 카메라로 고개를 돌렸다.

가족을 위협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소하정은 아까처럼 분노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들은 이제 곧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니 용현철의 협박이 현실이 될 일은 없다.

- 내가 아니라도 넌 언젠가 벌을 받을 거야.

- 푸하하하. 이 선배 못 본 사이에 정말 이상하게 변했네. 아까는 정의가 이긴다는 개소리를 하더니 이번에는 벌? 요즘 혹시 만화영화 같은 거 보는 거야? 왜 그런 거 있잖아.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이렇게 손발 오그라드는 멘트 날리는 만화.

-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싶어서 해 본 말이야. 지금 너를 향한 국민들의 여론이 안 좋으니까.

- 국민들? 걔들이 뭐? 혹시 그런 말 몰라? 국민들은 개돼지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훌륭한 명언이 있을까 싶어. 걔들은 정말 개돼지거든. 얼마나 멍청한지 백을 뺏고 하나를 주면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그리고 하나도 안 주면 막 화를 내다가 한 달이면 까먹어. 그러니 뭐하러 신경 써. 조금 있으면 다른 뉴스로 또 시끄러워질 텐데.

- 다른 뉴스?

- 왜, 정치인들이 잘하는 물타기 같은 거 있잖아. 정치 이슈 나오면 연예인 기사로 덮는 거. 엄마가 그러는데 조만간 톱스타 연예인 열애 소식이 기사로 뜬다더라. 그때까지만 조용히 있으래. 돈은 좀 들었는데 효과는 확실할 거야. 남자 여자 둘 다 초특급 배우거든.

- 대체 누구길래.

- 미안하지만 이건 말해줄 수 없어. 다른 건 몰라도 연예인 열애 기사는 소문을 막고 있다가 한 방에 빵 터트려야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어.

용현철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풍선이 터지는 시늉을 했다.

- 그럼, 그러던지. 그런데 나 하나만 물어보자.

- 뭔데?

- 대체 오늘 나를 왜 보자고 한 거야?

- 하하하. 그게 궁금했어? 왜, 예전처럼 내가 선배를 개처럼 안 두들겨 패니까 이상해?

-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일부러 번화가에서 보자고 한 거야. 네 덕분에 인적이 드문 곳은 겁이 나서 웬만하면 다니지 않아. 예전처럼 갑자기 납치돼서 죽도로 맞긴 싫으니까.

- 겁이 난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말투가 당당하네.

- 네 앞에서 떨긴 싫으니까. 그건 너무 쪽팔리잖아.

- 선배가 이런 캐릭터였구나. 마음에 든다. 미리 알았으면 친하게 지냈을 수도 있는데. 지금부터라도 친하게 지낼래? 그럼 예전에 내게 당했던 건 전부 보상해줄게.

- 좆 까.

소하정이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런데도 용현철은 화를 내기는커녕 박장대소하기 바빴다.

- 하하하. 정말 마음에 든다. 뭐, 어쨌든 오늘은 경고나 하려고 왔어. 요즘 내가 기자들에게 까인다고, 괜히 신문사 찾아가서 예전에 있었던 일 떠벌리지 말라는.

- 왜 그래? 그런 거 안 무섭다면서?

- 무섭진 않은데 귀찮잖아. 아빠랑 이모한테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우리 조용히 살자. 그럼 나도 선배 찾아오는 일 없을 거야. 할 말은 이게 끝. 마지막으로 오늘 나한테 떤 건방은 예전에 내가 한 일도 있고 하니까 퉁 쳐줄게. 고맙지? 고마우면 지금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살아, 죽고 못 사는 가족들과 알콩달콩. 그럼 나 간다.

용현철은 자기 할 말만 끝내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우와, 저 새끼. 커피값도 계산 안 하고 그냥 가네. 돈도 많으면서 왜 저러는지 몰라.”

“그렇게 개념이 있는 놈이었으면 이런 엄청난 내용이 담긴 대화를 녹음할 수는 없었겠지. 우리로서는 다행이랄까?”

“대표님에게 바로 보고할 거죠?”

“그래, 해야지. 이걸 터트리는 순간 우리나라가 발칵 뒤집힐 텐데 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잖아.”

“으아. 하하하. 이 대화 내용을 들고 대표님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그게 궁금해지는데요. 폭탄도 그냥 폭탄이 아니라 핵폭탄급인데 설마 이제와서 멈추자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핵폭탄급인 건 분명하지만 워낙 사안이 커서 한편으론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럴 리가. 이번 전쟁을 처음부터 지시한 분이 대표님이야. 당연히 좋아하시지.”

“그럼 포상으로 소고기 먹으러 가는 건가요?”

“돈도 많이 버는 놈이 소고기 타령은. 먹고 싶으면 네 돈으로 사 먹어.”

“아무리 연봉을 많이 받아도 공짜는 언제나 좋더라고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소하정 씨 폭행한 깡패새끼들, 손봐줄 준비나 해.”

“오! 드디어 움직이는 건가요?”

“확실한 증언도 얻었는데 이제 뒤로 미룰 필요가 없지. 청부 폭행 따위는 다시는 못 하게 완벽하게 밟아놔.”

“알겠습니다, 실장님. 완벽하게 개과천선 시켜 놓겠습니다. 크크크.”

***

Rrrr

카페를 빠져나온 용현철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엄마, 나야. 방금 소하정이랑 헤어졌어.”

- 그래. 내가 시킨 대로 한 거지?

“그럼, 당연하지.”

- 괜히 겁준다고 쓸데없는 말 한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조순희의 지적에 잠시 움찔했지만 용현철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 대답이 왜 굼떠? 설마 이상한 짓 한 거 아니지? 너 지금 상황이 어떤 줄 알아? 이런 일일수록 확실하게 마무리해야 해. 그래야 언론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빨래 끝내지.

“에이, 씨. 내가 무슨 열 살 먹은 어린애야? 했다면 한 거지 왜 그렇게 내 말을 못 믿어?”

- 아니, 내가 널 못 믿는다는 게 아니라….

황금숙마저 자기 뜻대로 휘두르는 조순희지만 버럭거리는 아들은 어쩌지 못한다.

용현철도 그걸 알기 때문에 잔소리가 길어진다며 싶으면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 본다.

“솔직히 내가 한강대학교에 보내달라고 했어? 엄마가 억지로 떠밀어서 보낸 거잖아. 그리고 교사 임용도 내가 그냥 사립학교 간다는 걸 엄마가 우겨서 시험 보게 만들었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며. 나는 가서 조용히 시험보는 척만 하고 나오면 된다면서. 그런데 이게 뭐야. 이게 전부 엄마 때문이잖아.”

- 에휴. 일이 이렇게 될 줄 나도 몰랐어. 왜 하필 이런 일이 생겨서는. 엄마가 미안해, 아들.

“됐어. 필요 없어. 그리고 오늘 나 집에 안 들어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 뭐? 집에는 왜 안 들어와?

“이게 다 엄마 때문이잖아. 성질 죽이고 소하정 그 새끼 만났더니 배알이 꼴려서 안 되겠어. 애들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할 거야. 그렇게 알아.

- 현철아. 술 마시는 거 이삼 주만 참으면 안 돼? 기자들이 달라붙을 수도 있는데.

“몰라. 걸리면 엄마가 알아서 막아. 신문사 사장님이 외삼촌인데 그것도 못 해?

-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괜한 구설에 오를 필요는 없잖아.

“안 걸리면 되지. 취재 못 하게 호텔방 빌려서 먹을 거야. 아무튼, 난 술 마시러 간다. 끊어.”

전화를 끊은 용현철이 빨간색 스포츠카에 올라탔다. 갈기 달린 말이 두 발로 서 있는 엠블럼이 달린 차였다.

***

“미쳤군요.”

차지훈이 가져온 녹음 파일을 모두 들은 건우가 제일 처음 내뱉은 말이다.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합니다.”

“용씨 가문이 예절교육 하나만큼은 철저하게 가르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런 망나니가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놈은 용씨 가문의 가정교육을 받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용선재가 가문에서 쫓겨나면서 용현철 또한 용씨 가문 일원이 아니게 됐거든요. 최근에 다시 가문에 들어가긴 했지만, 가정교육을 받기엔 너무 늦은 나이잖습니까.”

“우리로서는 다행이네요. 일이 쉽게 풀리게 생겼으니. 용현철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이걸 터트리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최소 몇 달은 대한민국 전체가 시끄러울 겁니다. 국가대표 문제, 입학 문제, 임용문제 그리고 아직 밝혀지진 않았지만 병역문제도 같이 불거질 겁니다. 현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몸이 아파서 군대를 면제받았는데 그걸 납득할 국민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국민들이 예민하게 생각할 문제만 일부러 골라서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화 내용이 공개되는 순간, 대한민국은 핵폭탄을 맞은 것처럼 충격에 빠질 게 분명했다.

건우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걸 꼭 우리가 터트릴 필요가 있습니까?”

“네?”

“우리보다 더 확실하게 터트려줄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장문오 시장이라고.”

“아! 장문오 시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우리가 직접 터트리니 장문오 시장에게 넘겨서 정치적 이슈까지 만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위험부담도 줄이고 장문오 시장과 민국당에는 빚을 만들고.”

“하하하. 갈수록 사악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대표님.”

“그럴 수도 있겠네요? 동수 형님이랑 종종 만나서 어울리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동수 형님이란 사악하기로 유명한(?) 동지그룹 마동수 이사를 의미한다.

“그래도 너무 닮진 마십시오. 저는 순수한 대표님이 더 좋습니다.”

“하하하.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그럼 이 녹음 파일은 장문오 시장에게 직접 전달할까요?”

“네, 소하정 씨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 전달해 주세요. 소하정 씨 보호도 확실하게 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