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화
유 부장검사가 나가자 회의실에 적막이 흘렀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차가운 냉기로 변해 내부의 공기를 얼려버린 듯했다.
말없이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제일 처음 꺼내야 할지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대책 마련부터?
건우를 위로해야 할까?
유 부장검사라는 인간의 무도함에 대해 성토해야 할까?
압수수색을 걱정해야 하나?
이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린 대통령을 욕해야 하는 건가?
난데없이 몹쓸 욕을 먹은 손다정에게 따뜻한 말이라도 한마디 전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유 부장검사를 뭉개버린 차지훈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통쾌했다고 칭찬을?
이런저런 상념들이 복잡하게 얽혀 침묵이 길어질 수도 있는 순간을 끊은 사람은 역시 건우였다.
“놀라셨죠? 솔직히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저는 분명 21세기 한국에 사는 줄 알았는데 20세기에서나 볼법한 일어나서 당황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습니다. 저들이 20세기 마인드로 덤벼든다고 해도 지금 세상은 21세기라서 별 소용 없을 겁니다. 아무리 막 나가도 있지도 않은 죄를 억지로 만들어 뒤집어씌우긴 어려울 테니까요.”
“맞습니다, 대표님. 우리 자료는 전부 전산화되어 있기 때문에 조작은 불가능합니다. 설사 컴퓨터 전체를 떼간다고 해도 서버에 원본이 남아 있습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차라리 그걸 모르고 조작 시도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 엄청난 역풍을 맞을 테니까요.”
차지훈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이야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걱정은 혹시 모를 엉터리 조작이지, 털어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먼지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대비해 미리미리 내부 조사를 마무리해놓길 잘한 것 같아요.”
손다정의 목소리에도 여유가 있었다.
초이스 시큐리티를 통해 이미 강도 높은 내부 조사를 마친 덕분에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정부는, 특히 검찰은 초이스 에듀를 너무 쉽게 봤다.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만큼 누군가 한 명쯤은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리리라 막연히 믿었다. 수천억 원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인데 설마 티 나지 않게 몇천만 원 정도 해먹는 직원 하나 없을까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회사에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 흔적을 찾아내면 어떻게든 짜 맞춰서 건우가 그런 것처럼, 아니면 건우가 지시를 내린 것처럼 꾸밀 계획이었다.
나중에 아니라고 밝혀져도 상관없었다. 그 사이 초이스 에듀를 철저하게 밟아 놓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검찰과 달리 건우와 초이스 에듀 수뇌부들은 그런 사소한 범죄조차 없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초이스 에듀도 똑같이 사람 사는 곳임은 분명한데 검찰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 이유가 뭘까?
일단 경영자가 다르다.
대한민국 최고의 연봉, 최고의 복리후생. 거기에 일하며 느낄 수 있는 보람까지.
건우는 회귀 이후 스스로 다짐했다. 기적을 겪은 만큼 이기적으로는 살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이번 삶에서 최우선은 자기 자신의 행복이라고. 그래야 다른 사람도 행복한 마음으로 도와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건 회사를 경영하는 방침에도 영향을 줬다.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기업인데 정작 직원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도 굉장한 모순이라고 생각해 연봉뿐만 아니라 복리후생에도 굉장히 많은 신경을 썼다.
덕분에 직원들은 초이스 에듀와 건우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다. 정부나 검찰이 기대하는 일은 돈이 필요하거나 자신이 하는 업무에 비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할 때 주로 일어나는데, 그걸 고려하면 초이스 에듀에서 배임이나 횡령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희박할 뿐이지 절대로 없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무릇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아쉽지 않을 정도로 돈이 있어도 더 많은 돈을 탐내곤 한다.
이런 문제 막으려면 제대로 된 관리자가 필요한데 지금까지 그 일을 맡은 사람이 바로 손다정이다.
단 1원도 허투루 쓰지 않는 그녀의 꼼꼼함과 초이스 시큐리티의 국정원급 정보력이 합쳐지면서 자금 쪽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관리되고 있다.
“다들 두 사람 말씀 잘 들었죠? 여러분이 염려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평상시처럼 행동하세요. 사무실로 돌아가셔서 놀란 직원들도 좀 달래주시고요. 우린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직원들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리고 송미주 팀장님.”
“네, 대표님.”
“돈은 얼마가 들어가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NP 로펌 인원을 총동원해서라도 이번 일에 철저하게 대응해주세요. 국민들이 아닌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법적인 의구심을 완전히 없애주셔야 합니다.”
“지금 바로 연락 넣어서 준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모두 자리로 돌아가셔서 우리 초이스 에듀에 업무 공백이 없도록 수고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차지훈 실장님은 잠시 남아주시고요.”
***
북적거렸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갑자기 나타나 소란을 피웠던 검찰 관계자들은 차지훈과 송미주의 협박 아닌 협박에 황급히 떠났고 긴급한 논의를 위해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모두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제 이곳엔 건우와 차지훈만 남았다.
“부장검사를 완전히 묵사발을 만드시는 모습을 보며 역시 차 실장님은 보통 분이 아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건우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민망합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도 막말에 흥분해서 앞뒤 안 가리고 날뛴 것뿐인데요. 이런 건 스파이로 활동할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저도 이제 다 된 모양입니다.”
“이미 은퇴하셨는데 스파이 자격을 따져 뭐하겠습니까? 그것보다는 사랑꾼 차 실장님 모습이 보기 좋아서 말씀드린 겁니다.”
“…네에에? 사, 사랑꾼이요?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사냥꾼을 잘못 발음 하셨다던지.”
“제대로 들은 거 맞습니다. 손 실장님을 위해 대통령을 등에 업고 나온 부장검사와 맞짱을 뜨신 분 아니십니까?”
“하핫. 아, 그게…, 그러니까. 아….”
“하하하. 너무 당황하지 마세요. 그냥 놀리려고 해본 말이니까.”
“휴…. 대표님은 갈수록 짓궂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차 실장님은 왠지 놀리는 재미가 있어서요.”
“크흠. 그냥 칭찬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차지훈이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놀리는 건 이제 그만하고 일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솔직히 정부가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잠시 농담을 건네며 웃던 건우의 표정이 어느새 단단하게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알아내고 대비했어야 했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 지난번에 교습소 문제로 된통 당했는데 당연히 저쪽에서 만반의 준비를 했겠죠. 우리가 모든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앞으로가 문제지. 이번엔 기자들까지 동원했습니다. 압수수색에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데, 그들이 진짜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요?”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며 사람들을 다독이던 아까의 건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으면 이렇게 요란하게 압수수색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학원 입구에서 아까 그놈이 하는 말 들으셨지 않습니까? 확실한 건 하나도 없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두루뭉술한 답변이 전부였습니다. 뽐내기 좋아하는 성격이 분명한데 왜 그랬겠습니까?”
“입조심을 하는 건 아니겠죠?”
“대표님도 보셨지 않습니까? 유창석 부장검사라는 놈 성격이 어떤지. 그놈은 아는 걸 떠벌렸으면 떠벌렸지 절대 입조심 할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자들이 잔뜩 몰린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고 싶었을 겁니다.
오죽하면 임의동행이라는 명목으로 대표님을 끌고 가려는 쌍팔년도 생각을 했겠습니까? 튀고 싶어 안달 난 놈이 이때다 싶어 쇼를 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이 자리에 있다 보니 최후의 상황도 고려하게 되네요.”
책임질 사람도 많고 벌여놓은 일도 많다. 그런 만큼 느끼는 심리적 무게감도 장난이 아니었다.
무서운 건 아니지만 무책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자꾸 부정적인 상황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대표님 자리에 있다면 당연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절대 이상한 건 아닙니다. 무책임하게 낙관적인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차 실장님은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 일 자체만은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습니다. 이미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압수수색해봐야 아무런 문제도 찾아낼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럼 곧바로 역공을 취할 수도 있겠죠.”
“말씀은 낙관적인데 표정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으신데요?”
“문제는 이번 일에 임하는 저들의 마음가짐입니다. 대표님도 보셨던 것처럼 저들은 억지에 가까운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이 안 통했다고 물러날까요?”
“그렇지 않겠죠. 그랬다면 이미 교습소 문제가 의도처럼 안 됐을 때 한발 물러났을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제가 생각할 때 저들은 이미 배수의 진을 쳤습니다.”
“배수의 진이요? 어차피 전쟁을 치를 각오는 했지만 배수의 진까지 칠 상황은 아니지 않나요?”
배수의 진을 쳤다면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네.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도 됩니다. 대표님도 문제지만 장문오 시장이 대통령이 되면 피의 복수가 시작될지도 모르니까요.”
“피의 복수라…. 장문오 시장이 그럴 성격은 아닐 텐데요. 물론 잘못을 저질렀다면 타협 없이 단호하게 처벌하겠지만요.”
“저들에겐 그것만큼 무서운 게 없습니다. 불법적인 일을 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니까 정당한 법의 심판을 받는 것만으로도 지옥일 겁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압수수색보다 더한 일도 겪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건가요? 차 실장님 말씀대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들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이제 정확하게 선택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을요?”
“저들과 어디까지 가시려는 건지를요. 적당히 방어만 하다가 장문오 시장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실 건지, 아니면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는 말처럼 곧바로 역공할 건지 선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후자라면요?”
차지훈의 판단이 사실이라면 앞으로는 죽자고 달려들 텐데 방어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친 듯이 흔들기 시작하면 무슨 변수가 생길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럴 바에는 공격이 낫다. 최소한 공격을 하는 동안에는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거기서 또다시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용선재만 잡을지, 아니면 대통령까지 잡을지.”
“대통령을 잡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지만 혹시 몰라 한 번 더 의미를 물었다.
“완전히 끝까지 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정황만 보면 탄…핵이 될 수도 있거든요.”
천하의 차지훈도 조심스러운지 ‘탄핵’이라는 단어에는 머뭇거렸다.
“아…, 현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끌어내린다고요? 그게 정말 가능한 겁니까?”
건우도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능한 일이긴 한데 굳이 우리 손으로 끌어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요?”
“우리는 떡밥을 만들어 장문오 시장과 민국당에 던져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그들이 알아서 전명우 대통령을 끌어내릴 겁니다. 그전에 폭탄을 하나 터트리긴 해야겠지만요.”
“폭탄이라…. 뭔가 확실한 증거를 찾은 겁니까?”
“재미있는 증거라고 해야 하나요? 용선재 슬하 자식 중에 용현철이라는 아들이 있습니다. 지금 한강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그런데요?”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한강대학교가 우리나라 스포츠분야에서는 최고 명문대학입니다. 특히 그 대학 체육교육학과는 서울대 체육교육학과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들어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용현철이 거길 들어갔습니다.”
건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들은 내용으로는 차지훈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와 다르게 운동에 소질이 있었나 보네요.”
“아니요. 조사한 바로는 그렇게 특출한 재능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강대학교 체교과에 들어간 겁니까? 아! 설마?”
“역시 눈치를 채셨군요. 맞습니다. 그 일에 조순희와 황금숙이 개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부정입학 건이면 확실히 폭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부정입학보다 더 한 일이 있다고요?”
“더 한 일이 아닐 순 있지만 거의 동급에 가까운 폭탄이 몇 개 더 있습니다. 만약 이번에 그걸 한꺼번에 터트린다면 아마 정국은 엄청난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겁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