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안녕하십니까.”
유 부장검사가 초이스 에듀 본점 대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회의실 안에는 건우를 비롯한 초이스 에듀 수뇌부가 차분한 표정으로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습적인 압수수색에 당황했지만 저들에게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별로 안녕하진 못합니다. 불청객이 갑자기 방문해서요.”
손다정이 대표로 말을 받았고 건우는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하하하. 혹시 불청객이 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불청객인 건 알고 계신가요?”
“죄를 지은 사람을 잡으러 온 사람이 불청객일 리가 있나요? 저승사자라면 모를까? 흐흐흐.”
유 부장검사는 지금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이번 일을 맡은 건 검사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기회였다.
최고 윗선에서 내려온 지령인 만큼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자신의 앞날엔 꽃길만 기다리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주소를 잘못 찾아오신 것 같네요. 우리 학원에는 죄를 지은 사람이 없어요. 방금 기자들 앞에서 우리가 탈세를 저지른 것처럼 뉘앙스를 풍기시던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고작 그런 돈이 아까웠으면 애초에 기부도 안 했을 겁니다.”
“내가 언제 탈세를 저질렀다고 했습니까? 미안하지만 난 그런 적 없습니다. 기자가 물어보길래, 탈세는 기업들이 많이 저지르는 범죄 중 하나라고 엄연한 팩트를 설명해줬을 뿐입니다. 물론 그걸 어떻게 해석해서 기사에 옮기든 그건 기자 마음이겠지만요.”
“흥! 저승사자가 아니라 정치검사처럼 말씀하시네요.”
“뭐가 어째? 씨발, 조또. 손님이 왔는데 주인이 나와서 맞을 생각은 안 하고 난데없이 기집년이 나와서 설치네.”
웃음이 가득했던 유 부장검사의 표정이 차갑게 돌변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검찰청 직원들도 기다렸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이곳에 있는 초이스 에듀 수뇌부에게 겁이라도 주려는 의도라도 있는지 노골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이들의 유치한 협박에 떨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기습을 받았다고 해도, 이미 이런 식의 노골적인 공격은 각오하고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한 적절한 행동요령도 숙지한 상태였다.
“아… 씨발, 조또. 검사 같지도 않은 새끼가 찾아와서 통하지도 않는 협박이나 하며 지랄병을 떨고 있네.
“뭐어어어어? 지랄병? 죽으려고 환장했나. 어떤 새끼야? 당장 나와!”
“나다, 새끼야.”
유 부장검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차지훈이 유들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손다정은 이제 그의 연인이다. 자신이 보는 눈앞에서 그녀가 모욕을 당했는데, 그의 성격상 그걸 참고 두고 볼 리가 없다.
그렇지만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나서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저런 또라이 같은 새끼가 감히 수사 중인 현직 검사를 우롱해? 죽고 싶어, 이 새끼야!”
“살고 싶다, 이 새끼야.”
초등학생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유치한 말싸움이었다.
“허. 머리에 총이라도 맞은 건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네가 멍청해서 우리 대한민국 검찰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나 본데, 지금 그 행동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두고두고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해주지.”
“입만 산 새끼. 네가 무슨 수로 내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는데? 한주먹감도 안 될 것 같이 비리비리하게 생겨서는.”
“야! 뭘 그렇게 보고만 있어. 저 새끼를 당장 공무집행 방해로 연행하지 않고!”
유 부장검사의 쩌렁쩌렁한 고함에 수행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차지훈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차지훈은 그대로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주먹다짐을 하진 않았다. 지금 여기서 그런 식의 원시적 방법을 사용하면 상황이 악화되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름 유창석.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소속 부장검사. 이성경과 결혼 슬하에 2남 1녀가 있음. 최근 SR그룹 비서실 직원과 룸살롱에서 만나 봉투 한 장을 건네받음. 그 내용물에는 뭐가 들어 있었을까?”
“너… 너 이 새끼, 대체 뭐하는 놈이야?”
“새끼?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보네. 이성경. 직업 변호사. 지난 3월 Y그룹이 운영하는 갤러리에 방문해서 그림 하나를 사서 왔지, 아마? 현금으로 30만 원을 줬는데 그 그림 원가가 얼마라더라? 1어ㄱ….”
“그만! 지금 협박하는 거야?”
유 부장검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 모습에 차지훈에게 다가가던 수행원들이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협박? 협박하는 거냐고 물었어? 진짜 협박이 뭔지 보여줄까? 수행원들을 잔뜩 끌고 온 걸 보니 굉장히 잘난 척을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내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를테면 봉투에 있는 내용물의 정체라든지, 그림의 진짜 가격이라든지 그런 거 말이야. 저 중에 최소 한 명 이상은 내가 알려주는 내용을 듣자마자 당신 등에 비수를 꽂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당신 같은 괴팍한 인간 밑에서 고생했을 것 같은데 그걸 듣고 한 귀로 흘릴까? 아니면 약점으로 이용할까?”
“워…원하는 게 뭐야?”
“씨발 조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네. 원하는 게 뭐야? 아직 대화할 준비가 안 된 모양이네, 반말이나 찍찍 하는 걸 보니.”
유 부장검사가 차지훈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차지훈도 지지 않고 유 부장검사를 마주 봤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부들부들 떠는 유 부장검사와 달리 차지훈의 두 눈엔 여유가 넘쳤다.
평범한 키에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생김새였다. 다음에 길을 가다 만나면 누군지 가물가물해질 정도의.
그런데 차지훈이 내뿜는 존재감은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할 것처럼 강렬했다.
유 부장검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런 류의 인간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실력보다 아부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그는 누구보다 빠른 눈치가 장점이다.
그런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히죽거리며 말한 남자의 말이 너무나도 진심이라는 걸.
‘젠장! 이러려고 최건우를 찾아온 게 아닌데.’
말은 임의동행이지만 거의 반강제로 건우를 데리고 나가 기자들 앞에 세우려고 했던 유 부장검사의 계획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어그러지고 말았다.
“우…원하는 게 뭡니까?”
결국은 존댓말이 나왔다. 뒤에서 지켜보는 수행원들 앞이라 쪽팔렸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진작 그렇게 나오지 그러셨습니까?”
차지훈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씨익 웃었다.
미소가 분명한데 유 부장검사에게는 야차처럼 험상궂게만 느껴졌다.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서로 예의를 차렸으면 훨씬 분위기가 부드러워졌을 텐데 왜 굳이 잘하지도 못하는 욕을 해서 이렇게 쪽팔림을 당하는 건지, 저도 유감이네요.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네?”
차지훈의 찰진 이죽거림에 유 부장검사는 팔팔 끓어오르려는 속을 겨우 가라앉혔다. 그러다 보니 대답이 한 타이밍 늦었다.
“여기 온 이유가 뭐냐고요? 뭔가 용건이 있으니까 우르르 사람들까지 데리고 여기 왔을 것 아닙니까?
“아…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얼른 용건 끝내고 돌아가시죠. 우린 우리대로 바빠서요.”
우린 우리대로 바쁘다는 말에 기가 찼다. 누가 보면 지금 상황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태연했다.
‘설마 지금 이 사람들 자기들 학원이 압수수색을 받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 생각은 금방 지웠다.
먼저 나섰던 여자의 말만 생각해봐도 이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다면?
용건이라는 게 대책회의일 가능성이 높다.
처음에는 너무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대기업처럼 검찰관계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입구부터 봉쇄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무실에 갔을 때도 서류를 파쇄하거나 하드디스크를 지우려는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직원에게 건우의 행방을 묻자 이곳에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게 다 압수수색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일어난 초보적인 실수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불길하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압수수색을 처음 받아본 애들이 뭘 알겠어? 그냥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한 걸 거야. 경찰도 아니고 검찰인데 당연히 무서워해야지, 그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여기 계실 건가요?”
유 부장검사라 빠르게 눈알을 굴리며 생각에 잠겨 대답을 않자 차지훈이 한 번 더 물었다.
“그게 참고인 조사가 필요해서 말입니다. 같이 임의동행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누구를요?”
뻔한 이야기였지만 차지훈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크흠. 최건우 대표…님 말입니다. 초이스 에듀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정황을 포착했고, 그렇다면 학원 대표인 최건우 대표…님도 당연히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유 부장검사는 ‘님’자 라는 단어가 내키지 않은지 말끝마다 ‘대표님’을 어렵게 말했다.
“영장은 있으세요?”
법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초이스 에듀 법률팀장인 송미주가 나섰다.
“있었으면 임의동행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겠죠.”
“그렇다면 거절합니다.”
“최 대표님. 죄를 지은 게 아니라면 당당하게 나서시는 게 어떨지요.”
영장 어쩌고 하는 순간 일이 완전히 어렵게 됐다는 걸 깨달은 유 부장검사는 노골적으로 건우의 자존심을 건드려봤다.
엄청난 성공을 거뒀니 어쩌니 해도 이제 고작 이십 대 초반. 그 나잇대의 혈기왕성함에 기대를 걸어본 것이다.
하지만 건우는 대꾸도 않고 싱긋이 웃기만 했고, 대신 송미주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하고 이야기하시죠?”
“그쪽이 대표입니까?”
“초이스 에듀 법률팀장입니다. 변호사고요. 그러니 괜한 데 관심 가지지 말고 제게 말씀하세요. 제가 담당 변호사니까요. 참고로 이번 일은 우리 팀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NP(늘푸른) 로펌과 손을 잡고 공동대응하기로 했어요.”
“네? NP 로펌이요? 정말 거기랑 공동 대응을 한단 말입니까? 거기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NP 로펌은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법률사무소다. 하지만 시장을 세계로까지 확장하면 무조건 첫손에 꼽힐 정도로 국제적인 법률 사무소이기도 하다.
뉴욕과 LA에서 가장 큰 로펌과 업무적 제휴를 맺고 있어서, 미국 수출 기업들은 대부분 NP 로펌과 손을 잡는다.
정부와의 관계도 좋았는데 여기서 초이스 에듀와 손을 잡아버리면, 그 관계가 깨져버릴 수 있다. 그냥 단순히 정부와의 관계가 깨지는 게 아니라 여당과 교피아하고도 척을 지게 된다.
그건 곧 NP 로펌이 가지고 있는 고객들의 70%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 경우다. 다른 대형법률사무소들을 적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초이스 에듀가 많은 돈을 약속했다고 해도 한국의 권력자들에게 등을 돌리는 일이다. 최악의 경우 한국 법률 시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데 그걸 무릅썼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를 고객으로 소개해줬고 잘 해결해주면 교육타운 법률 자문도 NP 로펌에게 맡기기로 했어요. 그랬더니 두말 않고 우리와 손을 잡겠다고 하네요.”
‘씨발, 미치겠네. 이거 이러다가 나 혼자만 덤터기 쓰는 거 아니야?’
처음 생각했던 것과 상황이 완전히 딴판으로 돌아가자 유 부장검사의 얼굴이 거무튀튀하게 변했다.
“…결국 임의동행은 거절하는 겁니까? 그럼 뭔가 숨기는 게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찾아는 갈 겁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하니까 검찰청에 가서 명명백백하게 모든 사실을 밝힐 겁니다. 물론 대표님 혼자서가 아니라 저와 NP 로펌 변호사가 동행해서요.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시죠.”
“흠….”
“가시기 전에 제가 충고 하나 할까요?”
몸을 돌리려던 유 부장검사는 뒤따라오는 송미주의 목소리에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들으세요. 수행원들 데리고 대장놀이 그만하시고 저 인원들도 전부 투입해서 눈에 불을 켜고 우리가 저질렀다는 죄를 찾아내야 할 겁니다. 그래도 절대 찾을 수 없을 테지만요.”
“완벽하게 숨겼다는 겁니까?”
“아니요.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들이 정말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는 즉시 우리는 소송을 걸 예정입니다. 업무방해, 무고죄, 손해배상 청구. 이것 말고도 걸건 많습니다. 그러니 미리미리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훗. 글쎄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을 못 봐서요. 그 자신감이 언제까지 갈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봅시다.”
불안했지만 수행원들까지 있는 곳에서 불안한 티를 낼 수 없었던 유 부장검사는 마지막까지 허세를 부리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