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26화 (226/256)

제226화

이름은 국무회의라고 하지만 거의 측근들만 참석한 측근회의에 가까웠다.

“시작부터 개망신을 당했네요.”

“송구스럽습니다, 대통령님. 애송이 주제에 그렇게 칼을 갈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전명우의 침통한 말에 산업통상부 장관이 고개를 숙였다. 골목상권 침해니 어쩌니 하며 최건우를 파렴치한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외쳤던 사람이다.

“내가 최건우에게 당한 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습니까?”

“네? 그럼…?”

“여당하고 이사장들에게 포문은 우리가 열겠다고 장담을 했는데 제가 헛소리를 한 게 되지 않았습니까! 대체 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겠어요, 네? 입이 있으면 말씀 좀 해보세요.”

이사장들이란 교피아를 뜻한다.

교피아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이기 때문에 초이스 에듀 입장에서나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 전명우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은 ‘이사장들’이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아…!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교육부를 두 번이나 물 먹인 놈입니다. 그것만 봐도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쉽게 보고 덤빈 겁니까? 게다가 제가 만만치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이야길 했지 않습니까, 네?”

두 번이나 고개를 숙여도 전명우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산업통상부 장관의 속마음이 타들어 갔다. 솔직히 조금 쉽게 보고 덤빈 건 맞지만, 골목 상권 침해라는 소스는 전명우가 먼저 던진 거였다.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잘 보이겠다는 일념으로 생각 없이 그 소스를 덥석 문 게 전부였다. 일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꼬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알았다면 바보처럼 덥석 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게, 처음부터 뭘 어떻게 해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살짝 미끼를 던져 간을 보면서 추이를 지켜보려고 했는데 최건우가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응해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휴…. 이것 참. 다들 김 장관이 당하는 모습 잘 봤을 줄 압니다. 그런데 이게 처음이 아니에요. 아까도 이야기한 것처럼 교육부는 아주 여러 번 당했어요. 무슨 동네북도 아니고 말입니다.”

전명우의 지적에 새로운 교육부 장관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전 장관들의 실수가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최건우가 사교육 시장에 계속 발을 담그는 이상 뭐라도 하나 쓸 만한 견제책을 내놓긴 해야 했다.

회의장 분위기가 침묵으로 무겁게 가라앉자 전명우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여기 참석한 사람들은 다 알 겁니다. 최건우가 장문오와 손을 잡은 이상, 우리와는 절대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요. 국민들의 지지? 그딴 것 필요 없습니다. 무조건 죽여 놓고 봐야 합니다. 다시는 고개도 못 들도록요. 아시겠습니까?”

화를 내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이 마치 자기 구역을 침범당한 짐승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느낌과 닮았다.

“…네.”

대부분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용 이사장이 제게 요청한 게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건 모두 이용하자고요. 최건우 그놈 나이는 어리지만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닙니다. 재산은 재벌 못지않게 모았고, 마이크로소프트라는 든든한 뒷배까지 있습니다. 미국 정부마저 호의적이에요. 이대로 두면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괴물로 커질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회의를 소집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아직도 제대로 경각심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아서요. 저놈을 못 죽이면 내가 죽는다는 각오로 덤벼들어야 합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최건우를 못 죽이면 우리가 죽습니다. 수능 문제로 우리가 불편해했을 때 최건우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누르면 누르려고 할수록 더더욱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죠. 그러다가 결국에는 장문오까지 끌고 와 우리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절대 타협할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감히 우리를 죽이겠다고 먼저 덤벼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뒤로 물러설 수가 없어요. 장문오가 차기 대권을 거머쥐는 순간 우리는 벼랑 끝에 몰리는 겁니다. 검찰총장, 내 말 듣고 있죠?”

“네, 대통령님.”

오늘 이 자리엔 주요 장관들뿐만 아니라 검찰총장과 경찰청장도 함께 불려 왔다.

최건우를 견제하기 위해 검·경을 동원하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전명우의 확실한 의지표명이었다.

“내가 만약 강 총장에게 전권을 준다면 최건우를 잡아넣을 수 있습니까?”

“그건… 죄송하지만 어렵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검찰총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섣불리 덤볐다가 산업통상부 장관처럼 개망신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명우도 몇 번이나 강조했다시피 최건우는 그렇게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고작 검찰 조사로 잡아넣을 수 있다면 정부와 여당 그리고 교피아까지 합심해 최건우를 잡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요?”

“차라리 재벌들을 털면 비자금, 상속세 문제, 탈세 중 하나는 무조건 나올 가능성이 높은데 최건우에게 그런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부를 그렇게 많이 하는데 비자금이나 탈세를 저지를 가능성이 낮고, 물려받은 게 없으니 상속세는 해당 사항이 안 됩니다.”

“흠… 그렇단 말이죠.”

“그렇지만….”

“그렇지만?

“잡아넣는 건 어려워도 최건우의 명예에 스크래치 정도는 낼 수 있습니다.”

“스크래치라? 그게 무슨 뜻이죠?”

“최건우 이미지가 올바름, 깨끗함 아닙니까? 그 이미지 때문에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것이고요.”

“그래서요?”

“아무리 최건우가 완벽하게 깨끗하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까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쪽 직원들만 해도 백 명이 넘는데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특히 돈을 만지는 부서라면 더더욱 그럴 겁니다.”

“관심이 가는 이야기군요. 계속 해보세요.”

나른하게 의자에 있던 전명우가 등을 세우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죠. 수천억 원이 왔다 갔다 하는 곳입니다. 보통 사람이 그걸 보는 데 욕심이 안 나겠습니까? 크게는 못 해먹을지 몰라도 몇백 정도는 적당히 서류 처리해서 빼먹는 인간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간을 털자?”

“최건우는 그럴 리 없다고 국민들이 생각하든 말든 안면 몰수하고 압수수색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검사들을 총동원해 탈탈 털면 아까 말씀드린 문제점들을 분명히 발견합니다. 최건우의 잘못은 아니라서 그놈을 처넣을 수는 없어도 초이스 에듀가 가지는 올바름과 깨끗함에는 먹칠을 할 수 있습니다.”

“초이스 에듀가 곧 최건우니까, 최건우의 깨끗함에도 금이 가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최건우 혼자 깨끗하다고 그 강 전체가 깨끗한 법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문제를 일으킨 놈을 찾아 협박한 다음 거짓 내부고발자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거짓 내부고발자?”

“내부고발자라는 표현이 좀 웃기긴 하지만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상당수 초이스 에듀 직원들이 그렇게 한다. 일종의 관행이다. 내가 하는 일에 비해 급여를 많이 받지 못하고 있다. 최건우는 기부 중독자다. 자신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우리에게 열정페이를 강요한다. 이런 걸 모두 써먹을 순 없겠지만 한두 가지를 이용해 내부를 흔드는 것도 괜찮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건우는 워낙 이미지가 좋아서 뭘 해도 이미지가 깎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말 안 듣는 대기업을 길들일 때 많이 쓰는 방법이다.

설사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도 한번 추락한 이미지는 다시 높이기 쉽지 않다. 요즘 세상에 쓰기엔 위험한 방법이긴 하지만 교피아의 도움을 받아 언론까지 동원할 수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었다.

“그 정도에서 그친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우리가 동원할 여러 방법 중 하나라면 못할 것도 없겠군요. 중요한 건 팩트가 아니라 여론이니까.”

“맞습니다. 검찰 조사에 이어 세무 조사까지 들어가면 여론이 계속 호의적이지만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분명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이번 일은 강 총장에게 전부 위임하도록 하겠습니다. 꼼꼼히 잘 준비해주세요.”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실장님, 보고드릴 게 있어 왔습니다.”

건우에게 보고할 게 생겨 사무실을 나서던 차지훈에게 이수철이 찾아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중요한 일인가 보네. 일단 사무실로 들어가자.”

“네, 알겠습니다.”

사무실로 다시 들어간 차지훈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탁자에 내려놓고 소파에 깊숙이 앉았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오늘 지대한 선배가 찾아왔습니다.”

“지대한? 수철이 네 사수였다던 그 녀석?”

차지훈은 국정원에서도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그곳 내부 사정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지대한처럼 국정원에서 10년 정도 근무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차지훈이 모를 리 없었다.

“네. 바로 그 선배입니다.”

“그 녀석이 무슨 일로 널 찾아온 거야? 혹시 우리가 우려했던 일이 벌써 시작된 건가?”

“99% 확실합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제안하더라고요.”

이수철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빨리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저한테 도원그룹 정보실 책임자 자리를 제안하던데요?”

“헐, 그게 정말이야? 참치캔 만들고 맛살 만드는 그 도원그룹?”

“네. 실장님.”

“아무리 5년짜리 국정원 경력이라고 해도 도원그룹 실장 자리면 꽤 파격적인데 정부에서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마음먹었나 보네.”

초이스 시큐리티는 이미 교피아의 행동 패턴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분명 인맥을 이용한 내부 흔들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분석을 바탕으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도 높은 교육도 마무리한 상태였다.

이수철 또한 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지대한의 연락을 받는 순간 차지훈이 주의하라고 강조했던 상황이 왔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래, 왠지 그걸로는 허전하더라니. 그다음엔 약점 공략?”

“어머니가 병원에서 최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계약금 명목으로 10억 원을 준다고도 했습니다.”

“허허. 어머님 치료에 10억까지. 완전히 모르고 갔으면 흔들릴 수도 있었겠네.”

“돈은 몰라도 어머니 치료 제안에는 혹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수철은 숨김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흔들릴 일이 없기 때문에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러게. 공략 포인트는 잘 찾았는데 조사가 부족했네. 역시 국정원도 예전 같지가 않아. 대표님이 지원해줘서 수철이 네 어머님이 미국에 곧 치료받으러 가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걸 보면 말이야.”

“아예 조사를 안 했을 겁니다. 그냥 지대한 선배가 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포섭 방법을 만들었을 겁니다. 설마 우리 회사에서 가족 치료까지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죠. 그 선배는 예전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너무 맹신하는 게 문제였어요. 귀차니즘도 좀 있고요.”

이수철의 냉정한 분석이 이어졌다.

지대한의 가장 큰 실수는 이수철을 정보 분야에서 6년 넘게 일한 베테랑으로 보지 않고 예전의 어설펐던 신입 시절 기억만 가지고 접근한 데 있었다.

초이스 시큐리티가 이수철을 무시하고 대리 직급밖에 안 줬다고 했지만 정작 무시하고 만만하게 본 건 지대한이었다.

“타의 모범을 보여야 할 짬밥인 지대한이 그 모양인데 국정원이 잘 돌아갈 턱이 있나. 그 덕분에 우리만 쉬워졌지만. 고생했어, 이 대리. 아 참! 녹음파일은 가져왔어?”

“그럼요. 여기 있습니다.”

차지훈의 물음에 이수철은 슬며시 웃으며 주머니에 있는 USB 메모리를 꺼내 건넸다.

지대한과의 대화가 담긴 파일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 이 대리는 역시 꼼꼼하네.”

“하하하. 10억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보너스를 타는데 당연히 해야죠.”

교피아가 인맥을 이용해 접근할 거라는 걸 예상한 차지훈은 단순히 교육 효과만 믿지 않았다. 사람은 믿어도 돈은 믿지 못한다는 말처럼, 상대방에서 큰돈을 제안한다면 분명 흔들리는 직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피아가 접근해온 사실을 신고하면 그들이 제안한 금액의 100%를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물론 악이용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만.

“그래, 잘했어. 이 파일은 분석팀에서 면밀히 분석할 거야. 그리고 사실이 확인되는 즉시 보너스가 지급돼.”

“하하하. 감사합니다, 실장님. 혹시 제가 첫 번째 수혜자인가요?”

“그럴 리가. 열한 번째 수혜자쯤 될 거야. 안 그래도 열 명이 차서 명단 보고하려고 대표님께 가려던 길이었거든.”

차지훈이 피식 웃으며 탁자에 놓인 서류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그럼 진짜 실장님 말씀처럼 우리 회사 직원들은 다 건드려볼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90% 이상은 그럴 것 같다.”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렇긴 한데 문제는 그다음이야. 이번까지 당했다는 걸 알면 정말 앞뒤 안 가리고 덤빌 것 같거든. 너도 밑에 애들 안 흔들리도록 잘 다독여.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버티면 결국 우리가 이겨.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실장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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