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이런, 미안미안. 사교육 쪽이라서 기밀을 요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죄송해요. 사실 별것 아닌데 지금 팀장님이 워낙 교육을 철저히 하셔서 이런 게 버릇이 됐어요.”
“응? 팀, 장, 님? 수철이 너 설마 거기서 아직 평사원으로 있는 거 아니지?”
지대한은 마치 못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평사원은 아니고 대리인데요.”
“맙소사. 평사원이 아닌 건 다행이다만 아무리 그래도 너 같은 국가 엘리트를 데려가서 고작 대리 직급을 주는 건 너무한 것 아니야? 너 우리 회사에서 얼마나 근무했지? 4~5년 정도 했나?”
“5년이요.”
“헐. 그만한 경력이면 다른 대기업 같은 경우는 과장에서 시작해. 규모가 작은 중견기업이면 팀장이나 실장급도 될 수 있는 경력이야. 다른 곳은 몰라도 우리 회사 출신은 충분히 그럴만하잖아. 그런데 대기업도 아닌 신생회사에서 대리는 정말 너무한 것 아니야? 난 네가 당연히 팀장급이라고 생각했어.”
과장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국정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 정보기관이다.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다루는 곳인 만큼 사람도 아무나 마구 뽑지 않는다. 머리가 명석해야 하고 신체도 건강해야 한다. 거기에 국가관 또한 투철해야 한다.
그런 곳에서 아무 문제 없이 5년을 보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설기관들은 서로 데려가고 싶어 군침을 흘린다.
사설기관 평사원은 아무 경력 없는 체육학과나 경호학과 졸업생들이 대상이고, 군인이나 경찰 등 경력 사원은 최소 대리부터 직급이 시작된다.
그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국정원 경력 5년이면 과장 자격으로 차고 넘친다.
“그게… 다들 경력이 화려하셔서요. 제 나이가 어린 것도 있고.”
“아무리 그래도 우리 회사가 이 바닥에서는 최고로 쳐줘. 막말로 특전사 경력이 많으면 뭐해? 총으로 사람 쏴 죽이는 건 우리보다 잘할지 몰라도 사설기관에서 진짜 필요한 건 그런 능력이 아니잖아. 외인부대를 뽑을 것도 아니고, 안 그래?”
“그게… 편의상 직급만 그렇게 구분한 거지 팀 체계가 상명하복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에요. 오더를 내리는 팀장님을 제외하고는 팀원들 전체가 수평적 구조에 가까워요.”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왠지 네가 푸대접을 받는 것 같아 내 마음이 안 좋아. 사회에서는 뭐니뭐니해도 사회 경력이 짱이지, 군 경력 같은 게 무슨 대수라고.”
“그건 그런데… 제가 혹시 우리 팀장님이 특전사 출신이라고 이야기했던가요?”
“뭐? 너희 팀장이 특전사 출신이었어? 으아, 나는 진짜 몰랐어. 그냥 일반적인 예를 든 거야.”
기습적인 질문이었지만 지대한은 이런 걸로 당황할 짬밥이 아니었다.
“아, 그렇구나. 전 갑자기 형이 특전사 이야기를 꺼내서 깜짝 놀랐어요.”
“전혀 모르긴 했는데 한편으론 빤하잖아. 우리 회사 출신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다 알아. 초이스 시큐리티로도 몇 명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대부분 너랑 경력이 비슷비슷하잖아. 너보다 경력이 1~2년 앞선다고 해도 걔들이 과장을 건너뛰고 팀장을 달았을 린 없으니 결국 팀장급은 군 출신일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그럼 둘 중 하나밖에 더 있어? 기무사 아니면 707 특무대.”
“우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분석력은 여전하시네요.”
“회사 짬밥이 얼만데 그 정도 계산도 못하겠냐?”
지대한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존경합니다.”
“짜식. 그러니까 아쉽다는 거야. 네 경력도 만만치 않은데 기껏 대리라니…. 내가 다른 자리 하나 알아봐 줄까?”
“헉! 아니에요, 형. 전 지금 일이 나쁘지 않아서요.”
이수철이 깜짝 놀라 두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네 표정 보니까 그럴 것 같긴 한데, 정말 남 주기 아까운 좋은 자리라서 그래. 너, 도원 그룹이라고 알아?”
“네, 알죠. 재계서열로 따지면 50위쯤 되나? 해양업 쪽으로 잘 나가는 거기 맞죠?”
“그래, 바로 그 도원그룹. 거기서 이번에 정보실을 새로 개편한대. 그동안 정보실이 워낙 유명무실해서 완전히 뒤엎을 건가 봐. 정말 제대로 마음먹은 건지 총수가 직접 우리 쪽에서 쓸 만한 사람이 없는지 연락이 왔더라고.”
“그래요? 그런데 도원그룹 규모면 초이스 시큐리티가 더 나을 수도….”
“에이. 초이스 에듀가 잘 나가는 건 나도 아는데, 자리가 달라. 과장이나 팀장급이었으면 내가 말도 안 꺼냈지.”
“네에? 그럼 설마… 아니죠?”
정보실을 개편하는데 과장도 아니고 팀장도 아니란다. 대리 자리를 제의하려고 왔을 린 없고, 그럼 남는 건 하나밖에 없다.
“그 설마가 맞아. 정보실 실장 자리야. 어때, 생각 있어?”
“정말 농담하시는 거 아니죠?”
“내가 이런 농담을 하려고 바쁜 시간 쪼개서 여기까지 왔겠어?”
“그건 그렇지만 팀장도 아니고 실장은….”
“내가 너 하는 거 5년이나 지켜봤잖아. 수철이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이수철이 말끝을 흐리자 지대한은 고민한다고 생각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섰다.
“글쎄요. 팀장도 안 해본 제가 그룹 정보실을 총괄하는 일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요.”
“세상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시행착오를 겪으며 실력을 쌓아가는 거지. 그렇게 자신이 없어?”
“그것도 그거지만 솔직히 형이 왜 이런 자리를 제게 제안했는지 이해가 안 가서요. 현역 중에도 적당한 사람들 많을 텐데.”
“흠… 내가 무슨 다른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것 같아?”
“네, 좀….”
“예리한 녀석 같으니. 맞아. 제안은 진짠데 솔직히 다른 의도도 있어.”
이수철이 의구심을 내보이자 지대한은 솔직히 털어놔 버렸다.
어차피 제안할 게 있어서 마련한 자리고 이수철은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아니다. 의뭉을 떨어 의심을 사느니 처음부터 전부 털어놓고 시작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해는 안 가지만 저한테 뭘 바라시는 건데요? 아시다시피 저는 별로 가진 게 없잖아요. 제가 있는 곳이 첨단 기술을 보유한 것도 아니고요.”
“사실 최건우 대표가 높으신 분들에게 찍혔어. 이번에 교습소 논란도 그래서 일어났던 것이고.”
“도원그룹 정보실장 자리를 걸 정도면 보통 높은 분들이 아닌가 봐요?”
“우리 원장이 절절매는 걸 봐서는 대통령 그 이상이야.”
“우리나라에 대통령 그 이상도 있을 수 있나요?”
“순진한 소리 한다.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대통령의 나라였다고? 알려지지 않은 진짜 권력자들이 몇몇 있는 거 너도 알잖아?”
“어떤…?”
“미안하지만 더는 묻지 마, 나도 모르니까. 안다고 알려줄 수도 없고.”
“네, 이해해요. 우리 일이 항상 그랬죠. 제대로 알려주지는 않으면서 요구사항만 많은.”
이수철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쨌든 진짜 권력자들에게까지 최건우 대표가 미운털이 박혔어. 그게 뭘 의미하겠어? 곧 대한민국에서 학원 장사를 접어야 한다는 의미야. 아무리 최건우가 잘났다고 해도 위에서 작정하고 죽이려고 드는데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되면 네가 탄 배도 곧 난파선이 될 거야.”
“어차피 난파선이 될 건데 제게 뭘 바라시는 건데요?”
“언젠가 됐든 분명 난파는 돼.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가 문제지. 그런데 위에서는 그 시간을 최대한 당기고 싶어 해. 최 대표 영향이 크니까 시간을 끌수록 수습해야 할 일들이 많아질 거라고 생각한 거지. 나는 네가 시간을 당기는 일을 도와줬으면 해. 어차피 난파선이 될 건데 너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
“저기… 대한이 형.”
“왜, 별로 안 내켜?”
“배신자가 되라는 건데 내킬 리가 있나요? 타고 있는 배가 난파선이 된다고 해도 제 한 몸 탈출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아까도 말씀하셨잖아요, 제 능력이면 어디든 취직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미리 탈출해 배신자로 손가락질당하는 것보다 도원그룹 정보실장를 포기하고 편하게 살래요.”
이수철에게 자리 욕심이 있었으면 처음부터 초이스 시큐리티에 입사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명예보다 마음 편한 게 더 좋았다.
“나도 그런 네 성격을 잘 알지. 그래서 다른 제안도 가져왔어. 우선 계약금으로 10억 원을 받게 될 테고. 그리고 어머님이 편찮으시잖아.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즉시 최고의 병원에서 최고의 의료진들에게 최고의 진료를 받으시게 될 거야. 솔직히 이 정도 제안이면 배신자로 손가락질받아도 괜찮지 않아?”
이수철이 소문난 효자라는 걸 잘 아는 지대한이 그의 효심을 이용해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추가했다.
이수철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본 지대한은 어떤 말도 추가하지 않았다.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으세요?”
한참 동안 고심에 잠겼던 이수철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웠던 제안이라서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길게는 못 줘.”
“이틀만 주세요. 이틀만 생각하고 연락드릴게요.”
“이틀이라…. 그래 알았어. 그럼 딱 이틀만 줄게. 그리고 말 안 해도 오늘 이야기는 비밀인 거 알지?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는 게 밝혀지는 순간 강력한 불이익을 받을 거야. 너 말고도 포섭대상이 있다는 걸 언제나 절대 잊지 마.”
“그럼요. 이런 걸 털어놓을 사람도 없어요.”
“그럼 믿고 오늘은 먼저 일어날 게.”
***
바보온달이라고 불리는 현 대통령 전명우. 괜히 아무 이유 없이 그런 별명이 생긴 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역사 속 또는 문학 속 온달과 전명우는 닮은 점이 꽤 많다.
그러나 장군으로서 영예로운 삶을 산 온달과 달리 전명우에게 바보온달과 닮았다는 말은 조롱이나 마찬가지였다.
분명 닮은꼴 두 사람인데 왜 이런 차이점이 생긴 걸까?
그건 바로 이야기의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에서 주체는 바보온달이다. 아무리 평강공주의 헌신적인 내조 덕분에 사람 구실을 하게 됐다고 해도 고구려의 훌륭한 장수가 되어 적을 물리치는 데 앞장선 것은 온달이었다.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으로도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명우는 다르다. 전명우가 바보온달을 닮았다는 이야기에서 주체는 전명우가 아니라 그의 아내 황금숙이다.
잘생긴 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전명우를 대통령으로 만든 황금숙의 놀라운 내조를 칭송하는 한편, 아내 덕에 능력도 없으면서 대통령이 됐다고 조롱하기 위해 바보온달 이야기를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전명우는 정말 잘생긴 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그런 한심한 남자일까?
지금은 미디어 시대다. 그렇기 때문에 미디어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애초에 대통령이 될 수조차 없다.
미디어란? 인간 사회에서 자신의 의사나 감정 또는 객관적 정보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마련된 수단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런 표현은 너무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방송에서 연설하고 토론하는 능력, 이게 바로 대통령 후보에게 필요한 미디어 능력이다.
잘생긴 외모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미디어 능력이 되겠지만 방송 연설이나 방송 토론에서 죽을 쒔다면 유권자들은 전명우를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황금숙을 만나기 전 전명우는 굉장히 소심한 남자였다는 데 있다.
얼굴은 웬만한 연예인들도 명함을 내밀기 힘들 정도로 잘생겼지만 대중들 앞에 설 자신이 없었던 소심한 성격 때문에 길거리 캐스팅 따위는 쳐다도 보지 않던 사람이 전명우였다.
그런 그가 대중들 앞에서 어떻게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황금숙의 내조도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의 피땀 어린 노력이 없었다면 그런 단점은 절대로 극복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대통령은커녕 국회의원도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연예인 중에 이런 경우가 있다.
얼굴이 정말 잘생겨서, 또는 정말 예뻐서 나쁘지 않은 연기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연기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
전명우가 바로 그와 비슷한 경우였다. 뛰어나진 않더라도 나쁘지 않은 능력은 갖추고 있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의 잘생긴 외모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능력이 부족한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든 황금숙에게만 초점을 맞췄다.
물론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전명우의 능력이 어떻든 간에 그는 아내의 말이라면 거의 대부분 들어줬다.
어쩌면 애처가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문제는 황금숙이 국정에까지 간섭하면서 대통령의 권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데 있었다.
바보온달 이야기가 나온 것도 그런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아직 임기가 절반 가까이 남은 대통령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여전히 국가 권력의 핵심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 대통령이 되고 처음으로 얼굴까지 붉히며 화를 냈다.
비밀리에 소집된 국무회의는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