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19화 (219/256)

제219화

상류층이라는 게 그렇다. 거의 대부분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고, 자기들끼리 기득권을 유지하길 원한다. 누군가가 끼어드는 걸 싫어해서 결혼도 끼리끼리 하는 경우가 많다.

용선재와 조순희도 그렇게 만났다.

용씨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해도 차기 가주의 친형이다. 기가 싱크빅을 세워 승승장구하며 능력도 인정받았다.

그런 그를 사위로 원하는 집안은 많았다. 용씨 가문의 후광을 원하는 것도 있었고, 용선재의 출중한 능력을 탐내는 곳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 둘을 모두 욕심냈지만.

조순희는 유명 언론사의 딸이었다. 막내로 예쁨 받으며 자란 덕분에 자유분방한 성격이었고 엄격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시집살이가 싫었던 그녀로서는 최고 상류층 집안 출신이면서도 시댁의 간섭을 받을 일이 없는, 거기에 재력도 상당한 용선재가 가장 이상적인 남편감이었다.

가문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던 용선재로서도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언론사의 고명딸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 말아야 할 게 너무나도 많은 가주 자리가 싫었던 것이지 야망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가 단지 유력 언론사 집안이라서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 대통령 전명우. 그는 역사적 인물이자 문학적 인물로 유명했던 바보 온달의 환생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실제로 바보 온달과 닮은 건 아니었다.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우직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온달과 달리 전명우는 잘생겼고 귀가 얇다.

대중들에게 알려진 온달과는 정반대의 성격. 그런데도 어떻게 바보 온달의 환생이라고 불렸을까?

그건 바로 그의 부인 때문이었다.

평범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전명우. 다행히 머리가 나쁘지는 않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던 그는, 그곳에서 지금의 부인인 황금숙을 만났다.

평범한 집안 출신에 나쁘지 않은 머리. 초일류 대학을 들어간 것도 아니고, 단지 인(in) 서울을 했다는 정도로는 평범함의 범주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그런데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에게 특별한 구석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잘생긴 외모였다. 그냥 잘생긴 정도가 아니라 연예인 뺨 칠 정도로 잘 생겼다.

길거리 캐스팅도 제법 있었다. 당시 종로나 명동으로 나가면 연예인이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많았다. 그만큼 눈에 띄게 잘생겼다. 그러나 소심한 성격 때문에 카메라 앞에 설 자신이 없었던 전명우는 애초에 연예인은 꿈도 꾸지 않았다.

만약 그에게 조금이라도 연기 재능이 있었다면 한국 사람들은 대통령 전명우가 아니라 톱스타 전명우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명 재력가의 딸이었던 황금숙은 전명우의 잘생긴 외모를 보고 첫눈에 반해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소심한 성격이라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데다가 그녀 덕분에 돈맛을 알게 된 전명우는 자연스럽게 황금숙과 사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재력가도 보통 재력가가 아니던 황금숙의 아버지는 잘생긴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볼 게 없는 전명우가 굉장히 못마땅했다.

평범한 집안도 마음에 안 들었고, 평범한 학벌도 마음에 안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소심한 성격이었다. 딸의 등 뒤에 숨어 얼굴도 제대로 못 드는 남자를 좋아하는 아버지는 세상에 없었다.

당연히 결사반대를 했지만, 줄기차게 따라다니며 기어코 전명우를 남자친구로 만들고 만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황금숙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딸이 할 수 있는 온갖 협박을 다 했고 마지막에는 자살소동까지 벌이는 통에 그녀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의 교제를 허락했다.

물론 전명우는 그 순간까지도 황금숙의 뒤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연애를 허락받았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엄청난 재력가 집안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

전명우의 인생은 그때부터 탄탄대로였다. 어떤 선택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이지만 하는 일마다 술술 풀렸고, 결국에는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것도 소심한 성격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잘생길 얼굴로 웃기만 하면 됐다. 나머지는 황금숙이 다 알아서 했다. 전명우는 그냥 얼굴마담 역할이 전부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황금숙을 보고 평강공주의 환생이라고 불렀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명우가 바보온달이 된 것이다.

전명우는 지금도 여전히 얼굴마담 역할이고 국가의 중요한 결정은 황금숙의 의견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조순희는 그런 황금숙의 가장 절친한, 둘도 없는 친구다.

전명우와 사귈 때도 황금숙은 조순희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조순희 친정인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든데다가 매사 거침없는 행동까지 더해져 ‘철의 여인’으로 불리지만, 황금숙은 오직 한 사람 조순희 앞에서만은 순한 양처럼 착하게 변한다.

조금 과장하자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조순희가 했다면 믿을 정도로 황금숙은 그녀를 믿었다.

그래서 측근 중에는 조순희를 대통령의 비선 실세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이러니 용선재도 조순희에게는 절대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오늘은 그녀에게 아쉬운 소리도 해야 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 안 써요? 고 맹랑한 것이 자꾸 내 심기를 거스르는데.”

한때는 후계자였다고 해도 지금 용선재는 용씨 가문의 일개 소속원이다. 용선국이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용선재에게 명령을 내린다면 그 지시에 따라야 한다. 가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니까.

반대로 용선재는 용선국의 친형이다. 친족간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에서는 용선재가 용선국보다 손윗사람이다.

두 사람 사이는 살가워서 상관없지만 문제는 그들의 부인이었다.

용씨 가문 가주의 안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이 손윗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용선국의 부인과 그래도 용선재가 형이니까 그녀로부터 형님 대접을 받고 싶은 조순희 사이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데, 그녀들에게는 어느새 중요한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 왜 맹랑하게 구냐고 때릴 건 아니잖아.”

“때리다니요? 어머 기막혀. 그런 품위 없는 짓을 제가 할 리가 없잖아요.”

“솔직히 당신이 며느리 역할을 하는 것도 없잖아. 그냥 신경 끄고 살면 되는데 왜 자꾸 신경을 써?”

“그건 저도 알아요. 시집살이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게 전부 당신 덕분이라는 것도 알고요. 그런데 전 가만히 있고 싶어도 동서가 자꾸 손윗사람 대접을 받으려는 게 문제라고요.”

조순희에게 용선재는 처음부터 이상적인 남편감이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제수씨가 그 정도야?”

“그럼요. 그 착하게 생긴 얼굴로 얼마나 여우 짓을 한다고요! 용씨 가문 소속 여자들은 옛날로 치면 내명부 소속이래요. 그러면서 자기는 내명부에서 가장 높은 왕비이니 제가 당연히 지시를 따라야 한다나? 그런 엉터리 말을 듣고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그게 정말이라면, 어휴…. 처음엔 안 그런 것 같더니, 어른들이 멀쩡한 사람을 또 하나 망쳐놨네. 그래도 여보.”

“네, 말씀하세요.”

“그냥 무시하고 상관하지 마. 나와 우리 집은 그냥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야. 사실 우리 집안 전통상 당신이 제수씨 지시를 따라야 하는 건 맞는데, 안 따른다고 제재할 방법이 없어. 그래도 계속 심하게 굴면 내가 이사장에게 한번 이야기해볼게.”

두 사람이 그냥 이사장이라고 부를 사람은 용선국 밖에 없었다.

“당신이 서방님에게요? 정말이죠?”

“그럼! 내가 약속한다.”

“어머. 웬일로 당신이 이렇게 순순하게 나오는 걸까요? 혹시 저한테 부탁할 것 있어요?”

조순희의 날카로운 지적에 용선재가 속으로 뜨끔했다.

처음엔 아니라고 부정할까 하다가 눈치 빠른 그녀에게 거짓말을 해봐야 금방 들킬 거라는 걸 깨닫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떻게 알았어?”

“호호호. 당신이 뛰어봐야 제 손바닥 위인 거 몰라요?”

정말 손바닥 위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조순희가 보기에는 남편은 똑똑하며 쉽게 예측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끔씩 지금처럼 예측 가능한 상황이 올 때면 기분이 좋았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용선재가 적당히 장단을 맞춰준 것이다.

“그러게 내가 왜 그걸 몰랐을까?”

“아부 그만하고 부탁할 게 뭔지 그거나 얼른 털어놔요.”

“이번 주 안에 당신이 황 여사 좀 만나고 왔으면 해서.”

“금숙이요? 금숙이는 왜요? 설마 금숙이 남편에게 부탁할 게 있는 거예요?”

조순희는 전명우를 대통령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고 ‘금숙이 남편’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응, 맞아.”

“무슨 일로요?”

“최건우 문제야.”

“아, 결국 최건우를 잡기로 두 형제가 합의를 본 모양이네요.”

그제야 남편이 집에 늦게 온 이유를 알았다.

최건우라면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으리라.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데 동의를 했어.”

“안 그래도 눈에 거슬렸는데 잘됐네요. 기가 싱크빅이 1위에서 밀려난 이후, 제가 나가는 모임 여자들의 시선이 이상해졌거든요. 얼마 저에는 정말 기분 나쁜 말도 들었어요.”

“무슨 말이었길래?”

“글세, 기가 싱크빅이 초이스 에듀 하청으로 들어갔다고 하지 뭐에요!”

“뭐? 어떤 정신 나간 여자가 그딴 소리를 해?”

어쩌면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초이스 에듀의 지원 아래, 퓨처 앱을 통한 인터넷 가정 방문 사업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그 덕분에, 거의 모든 학원 매출이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 와중에도 기가 싱크빅 매출만 껑충 뛰었다.

초이스 에듀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

그 사실 때문인지 용선재는 평소와 다르게 예민하게 굴었다.

“있어요, 그런 여자들이. 대부분은 동서랑 친한 사람들이에요.”

“쯧, 할 일 없는 여자들 참 많네.”

“그러니까 그딴 소리 안 들으려면 얼른 최건우를 밀어내고 당신이 1위로 올라서야지 않겠어요?”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었으면 내가 밤마다 고민에 빠져 살진 않았을 거야.”

“아무리 최건우에게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당신이랑, 서방님이랑, 금숙이 남편이 같이 힘을 합치면 어쩌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말해봐요, 내가 뭘 도우면 돼요?”

“모든 정부기관을 동원한 전방위적 압박.”

한두 곳으로는 안 된다. 모든 기관을 총동원해서 초이스 에듀에 대한 압박을 시작해야 한다. 정신 차릴 수 없도록, 매우 강력하게.

“국정원이랑 검경을 포함해서요?”

“거긴 당연하고, 특허청이랑 국세청도 동원해야지. 그 밖에도 동원할 수 있는 기관은 전부 동원할 수 있도록 이야기해줘.”

“그것만 하면 돼요?”

“아니, 하나 더 있어. 의식 있는 척하는 기자나 연예인 중에 최건우에게 동조하는 놈들이 꽤 많아. 그놈들만 그러면 상관없는데 좋아하는 연예인이 한 말이라며 무작정 찬성부터 하고 보는 생각 없는 인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게 문제야. 그것부터 끊어야겠어.”

“어떻게요? 기자나 연예인들 입을 강제로 다물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그 연놈들을 전부 블랙리스트에 올려서 특별관리를 하는 게 어떨까 싶어?”

오랫동안 고심해왔던 만큼 용선재의 설명은 거침이 없었다.

“특별관리요?”

“그래, 특별관리. 방법은 많아. 기업에 압력을 가해 광고를 내리게 만들고, 방송국에 압박을 줘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도록 만드는 거야. 최건우를 지지하는 연예인들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드는 거야.”

“기자는요?”

“기자는 쉬워. 그냥 소속 언론사 광고만 끊으면 돼. 그런 게 안 통하는 작은 인터넷 언론사는 폐간해버리면 그만이야.”

“그렇긴 하네요. 힘없는 언론사 치우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국정원이나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를 통해 댓글 부대를 운영했으면 좋겠어.”

“댓글 부대요?”

“댓글 부대를 통해 블랙리스트에 오른 연예인들을 완전히 쓰레기로 만들어야지. 어설픈 압박은 자칫 투사로 만들어줄 수 있으니, 누를 때 완벽하게 눌러줘야 해. 그 일을 하는 김에 최건우에게 호의적인 기사들은 전부 물타기해서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좋겠지. 가능해?”

“물론이에요. 금숙이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더군다나 최건우는 정부하고도 사이가 안 좋아서 설득하기 더 쉬울 거예요.”

“좋아, 그럼 당신만 믿을게.”

“대신 금숙이에게 갈 때 선물을 몇 개 들고 가야겠죠? 걔는 은근히 공주님 스타일이라서 친구라도 떠받쳐 주는 걸 좋아해요.”

“필요한 건 이걸로 사.”

용선재는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 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아내에게 건넸다.

“이건 처음 보는 카드인데, 뭐예요?”

“이사장이 줬어. 필요할 때 쓰라고.”

“어머. 이게 그 유명한 당신네 집안 프라이빗 카드인가요?”

“맞아, 그거. 최건우가 몰락하면 돌려줘야 하지만, 그때까진 당신이 필요할 때 써.”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 나는 물려받을 일도 없는 가문 돈인데 아껴서 뭐하려고? 펑펑 써도 돼.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 선에서 당신 필요한 것도 좀 사고. 우리 집 돈 많은 거 알잖아.”

“호호호. 그래요. 용씨 집안 며느리로 들어와서 처음 써보는 용씨 돈인데, 제대로 써야겠죠? 기대해요. 금숙이가 당신 말이라면 끔뻑 죽도록 만들어 놓을 테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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