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그의 정체는 초이스 시큐리티의 팀장이었다.
이름은 김덕규. 한때는 최고의 특수부대 요원이었지만 지금은 초이스 시큐리티로 자리를 옮겼다.
자신이 아끼던 부하 대원이 작전 중 사망했을 때 그 가족을 돌봐준 사람은 국가가 아니라 건우였다.
김덕규는 그 사실에 감사하며 은혜를 갚겠다는 심정으로 초이스 시큐리티에 입사했다. 능력이 있는 만큼 금방 팀장 자리를 꿰찼고 건우에 대한 충성심 역시 높아 중요한 임무에 자주 투입되었다.
이번 임무는 한 사람을 감시하는, 어쩌면 간단해 보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업무의 중요도상 팀장인 김덕규가 직접 감시에 나섰다.
Rrrr
- 그래, 김 팀장.
“실장님, 감시 대상이 방금 용궁을 떠났습니다.”
용선재 대표가 용선국 이사장의 자택을 떠나자 김덕규는 곧장 차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지훈은 초이스 에듀 정보팀 팀장이자 초이스 시큐리티의 대표이다. 그러나 건우와 같은 직급으로 불릴 수 없다고 ‘대표’라는 호칭을 한사코 사양했고, 팀장급 직원들이 여러 명 생긴 이상 차지훈을 계속 팀장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초이스 에듀 정보팀을 정보실로 승격시키고, 차지훈은 실장으로 승진(?)했다.
- 그래? 상당히 오래 머물렀네.
“네. 무슨 말을 나눴는지 엿들을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 아서라, 김 팀장. 용궁이 달리 구중궁궐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야. 방비가 얼마나 삼엄한데. 괜히 무리하다가 우리 정체를 들키는 것보다 한발 물러나서 조용히 지켜보는 게 지금으로써는 최선이야.
용궁이란 용선국 이사장의 집을 뜻한다. 편의성을 위해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했다.
“궁금한 마음에 그냥 해본 소립니다. 도청 같은 건 꿈도 안 꾸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청은 처음부터 생각도 안 했다.
대신 저곳에 일하는 고용인이라도 포섭해볼까 했는데, 그것도 사정을 알고는 포기했다. 용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용씨 가문의 소속원이었다. 성이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어 설마 했는데, 모계 쪽이라서 그럴 뿐 용씨 집안의 핏줄은 맞았다.
아무리 한 집안 사람이라고 해도 억지로 찾는다면 빈틈이 없겠느냐마는, 그러다 오히려 역공작에 당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고용인 포섭은 포기했다.
-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 팀장은 나도 믿지. 나도 노파심에서 한 말이야. 용씨 가문은 내 첩보 생활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큼 긴장되는 곳이거든.
“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싸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관찰만 하면서 이렇게 피곤한 적은 처음입니다.”
- 그래, 고생했어. 좀 있으면 고자성 팀장 도착할 테니까 교대하고 회사로 들어와.
“헉, 고 팀장님이 옵니까? 설마 지켜보는 걸 그만하시려고?”
고자성 팀장은 초이스 에듀 정보팀의 원년 멤버로 잠입이 주특기이다. 한국에서는 상대가 없다고 할 만큼 실력자라는 걸 김덕규도 초이스 시큐리티에 들어와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자신을 대신해 교대하러 온 다는 사람이 고자성이다? 혹시나 잠입을 시도하려는가 싶어 놀라서 물었다.
- 아니. 차라리 청와대라면 모를까 용궁은 안 돼. 청와대는 워낙 크고 잘 알려지기도 해서 찾아보면 개구멍이 많아. 하지만 용궁은 그냥 성이야, 철옹성, 설계도도 구할 방법이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겠어? 초능력이 있다면 모를까.
“그럼 왜 고자성 팀장님이 오는 겁니까?”
- 심심하다고 징징거려서 보내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회사로 들어오면 돼. 복귀하면 나부터 찾아오고.
“다른 시킬 일이 있으십니까?”
- 1차 조사는 끝났으니 네 의견까지 들은 다음에 대표님에게 용궁에 대한 상황 보고서를 올려야지.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임무 교대만 하고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 오케이, 이따 보자.
***
“제가 한때 무협지를 좋아한 적이 있습니다.”
건우의 사무실.
용선재 대표를 조사한 1차 보고서를 읽고 건우가 제일 처음 한 말이었다.
“그러십니까? 저는 지금도 무협지를 꽤 좋아합니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차지훈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럼 말이 통하겠군요. 용씨 가문을 보니까 무협지에서 나오는 당가(唐家)와 비슷한 같습니다.”
“사천성에 있는 가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구성원은 대부분 혈연으로 이뤄져 있어, 다른 문파와 비교해 굉장히 폐쇄적인 거기요?”
“역시 잘 아시네요. 맞습니다, 거기.”
“100%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면이 꽤 있긴 하네요.”
“고용인까지 같은 가문 사람을 뽑는다는 건 역시 숨길 게 많다는 의미겠죠?”
“기왕 고용할 거 같은 핏줄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좋은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있겠지만?”
“친일파 출신도 모자라, 그 사실에 대해 반성은커녕 오히려 교피아를 만들어 계속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가문이 그런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겠죠? 개과천선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차지훈은 확신에 가까운 얼굴로 대답했다.
“저도 동감입니다. 그런데 용선재 대표에 대한 개인적인 조사는 아직 많이 없네요.”
“1차 조사로는 나오는 게 없어서 좀 더 깊이 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모습만 놓고 보면 굉장히 바른 생활 사나이입니다. 대표님과 비교하면 부족할지 몰라도 그동안 꾸준히 사회 봉사활동도 해왔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지급한 장학금도 상당액입니다.”
“그렇군요.”
건우는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용선재 대표가 나쁜 놈이라는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대외적인 모습은 전부 가식으로 느껴졌다.
“솔직히 말씀드려 용선재 대표를 왜 조사하라고 하셨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제 곧 ‘하지만’이 나올 것 같은 뉘앙스이네요.”
“하하하. 맞습니다, 대표님 느낌이. ‘하지만’ 용선재가 용씨 가문의 일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워낙 개 X 같은 집안이거든요. 아! 제 표현이 너무 과격했지요?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아닙니다. 그 정도면 적당히 완화해서 표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저 또한 개 X라는 표현이 아까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용씨 가문이 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죄라고 할 수 있죠. 사실 용선재가 용씨 가문의 일원이라는 걸 확인했을 때, 저는 그가 당연히 방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데요?”
“용씨 가문은 사학재단만 10개 넘게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교육 재벌입니다. 직계라면 사학재단 경영에 참여하지 사설학원을 운영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직계도 아니고 용선국 이사장의 친형이네요. 보고서에서 이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앞으로 제가 가장 많이 신경 써야 할 두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이 어이없기도 했고요. 운명 같은 걸까요? 그 집안 전체와 제가 맞설 수밖에 없는.”
“아직 용선재 대표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직계이며 현 가주의 형입니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교육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기라성 같은 학원들을 제치고 기가 싱크빅을 1위 자리로 올린 사람 아닙니까? 대표님이 워낙 뛰어나셔서 그렇지, 그도 학원계에서는 전설 같은 존재입니다.”
학원계에서 건우는 아직 어리다며 무시하는 사람들도 용선재 대표에겐 존경의 시선을 보낸다. 수십 년간 수많은 사회 변화 속에서도 기가 싱크빅을 흔들림 없이 단단히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몇 년 반짝한 걸로는 아직 알 수 없고, 용선재 대표처럼 십 년 이상 꾸준함을 보여줘야 인정하겠다고 건우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저도 용선재 대표가 보여준 성과가 대단하다는 건 인정합니다. 한때나마 존경했던 인물이니까요.”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 가주가 되지 못하고 동생이 가주가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용씨 가문의 전통이었던 적장자계승 원칙까지 깨면서요. 동생이 형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요? 그렇게 생각하기엔 그동안 용선재가 보여준 능력이 절대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차 실장님은 용선재 대표가 왜 가주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가문과 반목이 있었던 건 확실합니다. 그게 단지 전통을 과하게 강조하는 고리타분한 집안에 있기 싫은 거였는지, 아니면 그동안 가문이 행한 수많은 죄과가 싫은 거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제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건 좀 더 조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만약 두 번째 이유라면 굳이 용선재와 반복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용씨 가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막강한 가문이다. 용선재 대표는 수십 년을 사교육 시장의 거두로 군림하면서 엄청난 인맥을 쌓아두고 있다.
용씨 가문 그 자체도 어려운데 굳이 용선재 대표까지 더할 필요가 있을까?
“둘은 형제입니다. 친동생이 저와 전쟁을 시작하면 형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건우는 굳이 ‘전쟁’이라는 단어를 썼다. 교피아에 대한 반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자신의 집안이 못마땅해서 가주 자리를 포기한 것이라면 방관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압니까, 내부고발자가 되어줄지?”
“차 실장님.”
“네, 대표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억지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딱히 내세울 만한 근거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말씀드리자면, 용선재 대표는 악인(惡人)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꼭꼭 숨길 줄 아는 영리한 놈이기도 하고요. 부담을 드리고 싶진 않지만…, 용선재 대표가 나쁜 놈이라는 사실을 미리 산정하고 조사해주십시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습니다. 짜맞추기식 정황증거라도 상관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은 건 모두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부탁하고 있는 어조였지만 사실상 건우가 처음 내리는 단호한 명령이었다.
차지훈은 대체 건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많은 세상 사람들이 선인(善人)으로 알고 있는 용선재 대표를 악인으로 규정지은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깊숙한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건우의 눈을 보며 그런 호기심은 금방 접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건우를 이렇게 화나게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용선재 대표는 명백한 유죄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먼지 한 톨까지 털어서라도 원하시는 내용을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
“본가에 가신다더니 늦었네요.”
용선재가 집으로 들어서자 와이프인 조순희가 현관 앞에서 그를 맞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할 이야기가 좀 많았어.”
“그러실 것 같았어요. 우애 좋은 두 형제가 어른들 때문에 자주 보지 못하니 말이에요. 어른들은 이번에도 집에 안 계신 거예요?”
“그래. 중요한 일이 있어서 나가셨다고 하더군.”
“중요한 일은 무슨요. 그냥 당신을 피한 거지.”
조순희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그래도 가문의 장손이고 장남인데 대우가 너무 매몰찬 게 서운했다.
“뭘 그렇게 서운해해? 하루이틀 일도 아닌데. 그 어른들은 돌아가실 때까지 영원히 그러실 거야. 그러니 이상한 기대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아.”
“어머, 이이 봐. 제가 무슨 기대를 한다고 그래요? 저도 지금이 좋아요. 용씨 가문에 들어가 어른들 잔소리 들어가며 갇혀서 사는 것보다 밖에서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편하게 사는 게 훨씬 좋아요. 제가 아니라 당신 때문에 서운한 거예요.”
“난 괜찮다니까.”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이것부터 보고 이야기하세요.”
조순희가 남편에게 보여준 건 그녀의 핸드폰 속 사진이었다. 거기엔 집안 어른들과 중년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젊어 보이는 여자가 등장했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핸드폰 속 여자 또한 용선재가 아는 사람이었다.
“이게 뭐야?”
“뭐긴 뭐예요? 당신이 아는 그분들이지.”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이걸 왜 내게 보여주는 거냐고?”
“조금 전에 올라온 동서의 SNS 예요.”
동서라고 하면, 용선국의 와이프를 말한다.
“그런데?”
“당신이 올 줄 알았을 텐데 동서가 어른들을 모시고 일본에 간 모양이더라고요. 그리고 자기 SNS를 내가 보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런 사진을 올린 거고요.”
“무슨 상관이야? 가신 곳이 한국이든 일본이든 상관없잖아.”
용선재는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기분이 좋진 않았다. 일이 있다는 게 핑계라는 건 알지만, 자신을 피해 놀러 간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일이 유쾌하진 않았다.
“상관이야 없죠. 동서 하는 짓이 괘씸해서 그렇지.”
살가운 두 형제와 달리 그들의 부인은 그렇게 사이가 좋지 못하다. 그냥 좋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나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용선재에게는 이런 게 스트레스였지만 못마땅하다고 와이프를 갈아치울 수는 없었다. 부인을 사랑해서도 아니고 예뻐서도 아니다.
천하의 용선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이 그녀에게 있는 게 문제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