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16화 (216/256)

제216화

구중궁궐이라는 말이 있다. 아홉 번 거듭 쌓은 담 안에 자리한 대궐을 뜻하는 말인데, 다른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을 가리키기도 한다.

북한산 자락에 그런 집이 하나 있다. 높디높은 벽이 성처럼 느껴질 정도로 단단하게 세워져 있다.

이 지역은 커다랗게 잘 지은 저택이 많은 동네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구중궁궐 같은 집은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는 듯 당당한 위압감을 뽐냈다.

세련된 디자인의 고급 승용차가 그 집 문 앞에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섰다.

그 앞에서 공손한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던 여자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한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굉장히 고풍스러운 슈트로 몸을 두르고 머리 모양을 단정하게 고정시킨 중년의 남자였다.

“어서 오십시오, 용 대표님.”

차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크레이듀의 용선재 대표였다.

“이사장님은?”

“안에서 용 대표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쪽 머리로 뒤를 질끈 묶은 여자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군. 하여간 예의 바른 동생님이라니까.”

이야기를 들은 용선재 대표가 피식 웃으며 문 앞으로 들어섰다. 문 안에는 상당히 잘 단련한 듯 몸이 단단해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를 맞았다.

용선재 대표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남자를 지나쳐 정원 사이로 곧게 뻗은 길을 가로질렀다.

정원은 완벽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자연미라고 하기에는 인공적인 느낌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그래도 균형 있는 조형미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집 주변에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개울이 흘렀고 그 위에는 돌다리와 나무다리가 사이좋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돌다리에는 이끼가 잔뜩 꼈고, 나무다리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굉장히 안정감 있는 구조였다. 한국식 정원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이었다.

“이놈의 집은 정말 쓸데없이 길단 말이야.”

그의 중얼거림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정문과 현관 사이가 멀었다. 거리면 500m 가까이 돼서 걷는 데만 5분 이상 걸렸다.

현시대의 구중궁궐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그런 저택이었다.

“어서 오세요, 형님.”

용선재 대표가 현관으로 들어서자 그와 닮은, 좀 더 젊은 남자가 웃으며 맞았다.

“어허, 이사장님 보시게. 안에서 점잖게 기다리셔야지 체통 머리 없이 나와서 있으면 어떡합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이 오셨는데 동생인 제가 당연히 버선발로 나가서 맞이해야죠. 하하하.”

“제 동생은 그래도 되지만 용씨 가문 가주가 이러시면 안 되지요.”

“오늘만 봐주세요. 어른들이 안 계셔서 눈치 볼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용선재 대표와 닮은 사람은 그의 동생이었다.

그러나 단지 용선재 대표의 동생이라는 표현으로는 그를 설명하기에 많이 부족했다.

용선국 이사장. 이게 그의 직함이다. 용선재 대표가 방금 말했듯 용씨 가문의 가주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건우와 대척점에 있는 교피아의 수장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어른들은 자리를 비우셨나 보네.”

용선재 대표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형님이 온다는 이야기를 전하자마자 다른 약속이 생겼다며 나가셨습니다. 서운하시죠?”

“서운할 게 뭐 있나요? 내가 선택한 길인데. 이런 홀대까지 각오하고 집을 돌아온 거잖습니까.”

용씨 가문은 굉장히 역사가 오래된 집안이다. 오래된 만큼 가풍이 굉장히 엄격하다.

사회 분위기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지만, 가풍은 크게 바뀌지 않고 거의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염색은 남녀노소 중 노(老)를 제외하고 모두 금지, 외출 시 반바지나 청바지 금지 같은, 젊은 사람들 눈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구태의연한 규칙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용선재 대표는 어린 시절 굉장히 자유분방한 아이였다. 집안의 장손으로서 용씨 가문의 가풍과 가규(家規)를 솔선수범하며 지켜야 했으나 바뀐 세상에서 여전히 옛것을 고수하려는 어른들의 모습이 답답하게만 보였다.

용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건, 큰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자연스럽게 다음 대 가주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용선재 대표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려고 하자 어른들은 그에게 특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때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들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뜯어고치려고 체벌도 마다치 않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 맞서 종아리에 피가 터져 나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독한 아들.

두 사람은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달았다. 가문에 대한 책임감이 과하게 강했던 아버지의 체벌 수위는 점점 더 강해졌다.

독방에 가두고, 굶기고, 심지어 정신병원에 집어넣기까지 했지만 아들은 그런 폭력적인 행동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사실 굴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가해진 폭력은 아들에게 큰 정신적 데미지를 입혔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하나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버텨낸 것이다.

이러다가 정말 아들이 죽겠다 싶어 눈물을 흘리며 나선 어머니로 인해 두 사람의 전쟁은 일단락됐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결과는 바뀌지 않았고 서로에게 깊은 생채기만 남겼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이후 아버지보다 더 엄격한 가문의 어른들이 나섰다. 그들은 아들을 집에서 쫓아내고 장손 자리를 박탈했다. 그리고 아들의 동생을 장손 자리에 대신 올렸다.

주변에 보는 눈이 있으니 무일푼으로 쫓아내지는 않았다. 학생이 쓰기에 넓은 아파트와 넉넉한 생활비는 제공했다. 그리고 그걸로 가문과의 인연이 끊겼다.

여기서 아들은 용선재 대표고 아들의 동생은 용선국 이사장이었다.

용선재 대표는 부모님의 보살핌도 없이 홀로 살며 대학을 졸업하고 과외로 돈을 벌었다. 그 돈을 기반으로 작은 학원을 세웠고, 그 학원이 성장하면서 지금의 기가 싱크빅이 되었다.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다고 해도 사실상 무일푼으로 기가 싱크빅을 세운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용선재 대표의 이름이 유명해지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자 용씨 가문은 은근슬쩍 그를 다시 받아들였고 용선재 대표도 못 이기는 척 가문으로 돌아갔다.

예전과 같은 간섭은 없었다. 용선재 대표에게 폭력을 가하고 폭력을 부추겼던 사람들은 대부분 일선에서 물러나 그다음 세대들이 가문 운영에 참여하면서 갈등이 생길 일은 거의 없었다.

같은 가문이라고는 하나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비즈니스 관계가 되었다. 한때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해도 현 가주의 친형인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용선재 대표와 용선국 이사장은 서로 사이가 좋았다. 형은 골치 아픈 일을 떠맡긴 것 같아 동생에게 항상 미안했고, 동생은 형을 밀어내고 자신이 가주 자리에 앉은 것 같아 미안했다.

용씨 가문의 힘은 막강했다. 사교육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와중에도 기가 싱크빅은 계속 성장했다.

용선재 대표의 능력도 큰 작용을 했지만 거기에 용씨 가문의 힘까지 더해지자 거칠 것이 없었다.

기가 싱크빅은 그야말로 쭉쭉 커졌고, 80~90년대를 풍미했던 유명 학원들을 하나둘 제치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2014년, 최건우가 등장하기 전까지.

“아무리 그래도 이제는 고집을 내려놓을 때가 되셨는데….”

“됐습니다. 그분들이 반갑게 나를 맞아주는 게 더 불편할 것 같습니다.”

용선재 대표는 동생에게 언제나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다. 용선국 이사장은 만류했지만 가문의 일원으로서 가주를 존중한다는 의미로 존칭을 바꾸지 않았다.

“참, 형님도.”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분들과 제 사이가 틀어진 기간만 30년이 넘었습니다. 30년 동안 깊어진 골을 메꾸려면 최소 30년 이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메꿔도 흔적은 남기 마련이죠. 그럴 바에는 서로 없는 사람 취급하며 사는 게 편합니다.”

“형님이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저는 언제나 형님 편입니다.”

엄격했던 아버지와 달리 다정했던 형.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같이 지낸 건 10년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 기간 동안 용선국 이사장에게 형은 이상적인 아버지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았다.

“가주께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가문을 우선하셔야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용선재 대표에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가주 자리는 언제나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가문과 형님에게 동시에 도움이 될 일을 찾고 있습니다.”

“허허허. 같이 잘 되면 좋은 일이긴 하지요.”

“그래서 오늘 뵙자고 말씀드린 겁니다. 공동의 적이 생겼으니 함께 의논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공동의 적이라고 하면 역시 최건우 대표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맞습니다, 형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우선 차부터 한잔 드세요.”

서재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앞에 찻잔 두 개와 다과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수행원도 모두 나가고 두 사람만 남았다. 용선재 대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잠시 향을 음미하다가 가볍게 한 모금만 마시고 내려놓았다.

불그스름한 색을 띤 홍차는 서재를 가득 채울 만큼 풍취가 좋았다.

“향이 좋네요.”

“그렇지요? 형님과 약속을 잡고 특별히 영국에서 공수해온 홍차입니다.”

“어쩐지, 맛이 깊다 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때부터 말없이 홍차를 즐겼다. 삼십 분이 지나도록 서재에는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형님.”

“네, 말씀하세요.”

“최건우 그 친구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습니다.”

“장문오 시장 일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맞습니다. 최근에 나온 뉴스 보셨습니까? 몇몇 언론들의 장문오 밀어주기가 장난이 아니더군요. 마치 장문오 때문에 교육 타운이 있었다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띄워주기에 나선 언론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건 최건우의 양해 없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저도 봤습니다. 그동안 정계에서 요청이 들어와도 묵묵히 자기 길만 가길래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차라리 학원 사업에만 집중했으면 좋았을걸, 이렇게 빨리 야심을 드러낼 줄은 몰랐습니다.”

건우가 장문오 시장과 손을 잡은 건, 용선재 대표 입장에서는 바라마지않던 일이었다.

아무리 정부가 싫어해도, 아무리 용씨 가문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지금까지는 건우를 끌어내리기 어려웠다. 실력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고, 국민들의 지지는 너무나도 강력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동안 자기 자리를 잘 지키며 묵묵히 앞만 보고 가던 건우가 갑자기 노선을 변경했다. 누구도 몰랐던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교육 타운이라는 무지막지한 스케일의 대공사는 그동안의 성향을 보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는 다르다.

정치는 그야말로 수렁이다. 아무리 국민의 사랑을 받던 사람도 정치판에 뛰어드는 순간 수렁에 빠지고 만다.

논리도 상식도 필요 없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지역감정과 빨갱이 프레임을 억지로 가져다 붙이는 순간 논쟁이 일기 시작한다.

물론 과거와 달리 세상이 변했으니 곧이곧대로 안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프레임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시궁창으로 끌어내려 준다.

그때부터 예의고 뭐고 없이 개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가면이 벗겨지고 민낯이 드러난다.

그럴 리 없다고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도 창졸간에 드러난 민낯에 등을 돌리고 만다.

민낯이 흉측하지 않아도 된다. 꾸민 모습만 보던 사람은 평범한 민낯조차 실망하게 될 테니까.

꼭 이런 식의 구시대 프레임이 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직접 나서지 않고 장문오 시장을 내세우긴 했지만 건우가 정치에 발을 디디는 순간 확실한 명분이 생긴다. 장문오 시장과 대척점에 있는 세력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명분이.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고 류명훈 전 대통령의 계승자 장문오 시장과 현재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건우의 협력은 민국당 외 세력에겐 엄청나게 큰 위협이다.

아무리 이합집산하며 싸우고 있다고 해도 강력한 적이 나타나는 순간 싸움을 잠시 멈추고 힘을 모아 힘이 세진 외부 세력부터 물리친다.

이게 바로 현 정권이 계속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다들 욕심이 많아서 힘을 합치기가 쉽지 않은데 건우의 선택이 확실한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다.

용선재 대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절대 넘을 수 없는 철옹성처럼 느껴졌던 건우가 스스로 빈틈을 보였으니 재기가 불가능하도록 깊숙이 찌르는 일만 남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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