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08화 (208/256)

제208화

- 와! 다들 적극적으로 찬성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100계좌를 개설하겠습니다.

- 헉! 100계좌? 그럼 10억?

- 대봑!!!

-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김수민 님을 스카우트하려고 했다니 ㅠㅜ 그냥 김수민 님이 저를 스카우트해주시면 안 되나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ㅎㅎㅎㅎㅎ

- 악 ㅋㅋㅋㅋㅋ 정현미 님 너무 귀여우세요. 그런데 김수민 님에게 이혼 전문 변호사가 필요할까요?

“크크크크크. 아, 이 사람들 정말 재미있어. 전문직들이라 딱딱하고 재미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역시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비슷비슷하다니까.”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채팅을 하던 남자가, 잠시 타자를 멈추고 히죽거렸다.

그때 남자의 등 뒤로 방문이 덜컥하고 열렸다.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외모의 젊은 여성이 팔을 올리고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동수 씨! 대체 회의는 언제까지 할 거예요?”

“어? 이, 이제 다 끝나가. 곧!”

남자의 정체는 동지 그룹의 마동수였다. 독특한 이름이고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김수민’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온라인에서만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바가지를 긁고 있는 여자의 정체는, 마동수 보다 더 유명한 그의 와이프 윤시연이었다.

“김수민? 동수 씨. 중요한 회의라는 게 설마 동지 그룹 일이 아니라 「Gun4」일이었어요?”

윤시연은 마동수 책상 위 커다란 모니터에서 요란하게 올라가고 있는 채팅창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가 마흔이 다 되어 갑자기 팬카페 활동이라니. 이 남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 여자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며 위안으로 삼아야 할지, 집안일도 내팽개치고 팬카페 활동을 하는 건 좀 심한 것 아니냐고 혼을 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하하하. 그…게, 내가 이야기 안 했나? 동지 그룹 회의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동지 그룹 회의라고 지레짐작한 내 잘못이다?”

바가지를 긁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은데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 자신을 자꾸 그런 사람으로 만든다.

아내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걸 느끼자 마동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니지, 아니야. 다 내 잘못이지. 내가 당연히 「Gun4」일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안 한 내 잘못이야. 미안해. 앞으로는 꼭 무슨 회의인지 말할게. 응? 그러니까 얼굴 찡그리지 마. 예쁜 얼굴에 주름 생기면 안 되잖아. 응응?”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는 남편이 애교를 부리자 윤시연은 금방 화가 풀리는 걸 느꼈다. 이러니 저리니 해도 그녀는 여전히 마동수 빠순이었다.

“그래요. 앞으로는 꼭 이야기해줘야 해요? 난 회사에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했단 말이에요. 회사 일을 휴일에까지 가져온 적이 거의 없었잖아요.”

“그럼. 당연하지.”

“이제 회의가 끝난 거예요?”

“뭐… 대충?”

“그럼 이제 나가서 애들 보세요. 우리 원, 투, 쓰리가 휴일인데 아빠가 안 놀아준다고 입이 댓 발은 나왔어요.”

“그래? 오호. 이 녀석들은 하여간 아빠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라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내가 출동해야지. 하하하. 추…출동.”

화가 풀린 아내의 모습에 안도한 마동수는 얼른 거실로 뛰어 나갔다. 팬카페 일은 대충 마무리됐으니 이제 아빠로 돌아갈 시간이다.

거실은 금세 시끌벅적하게 변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빠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환호성을 지른다.

목마를 해달라, 비행기를 태워 달라, 말을 타고 싶다, 레슬링을 하자, 칼싸움을 하자. 애들이 많으니 요구사항도 많다. 그런데도 마동수는 싫은 표정 하나 짓지 않고 즐거워 보인다.

윤시연은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고마우면서도 측은했다. 저렇게 세 아이가 원하는 걸 들어주다 보면 어느새 녹초가 되어버린다.

마동수가 아이들과 놀아주기 시작했으니 이제 청소와 빨래를 할 차례다. 넘칠 만큼 부자지만 그녀의 성격상 집안일은 남에게 잘 맡기지 못한다.

치울 게 있나 싶어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채팅창은 여전히 활발했다.

그런데 이상한 글자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아우. 일이 있어서 이제 들어왔습니다. 죄송. 내용을 쭉 읽어 봤는데 저도 당연히 찬성합니다. 좋은 일인데 저도 참여해야죠. 김수민 님은 10억이나 기부하신다면서요? 대단하십니다. 역시 「Gun4」의 대들보세요. 그래서 저도 분발하기로 했습니다. 50계좌 넣겠습니다.

- 우와!!!! 우신기 님 멋져요.

- 헐… 이러다가 우리가 넣을 계좌 없어지는 거 아닙니까?

- 그럴 수도 있겠네요. 서둘러야겠어요. 저는 우리 애들 이름으로 두 계좌 넣어야겠어요. 그런데 계좌번호는 어떻게 되는 거죠? 김수민 님? 김수민 님, 미리 계좌번호 좀 알려주세요.

- 김수님 님!!!!!!!

- 어디 가셨나?

“헉, 이게 뭐야? 10억? 이 사람이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정말. 여보오오옷!!”

***

최근 들어 회의하는 횟수가 굉장히 잦아졌다. 수뇌부 대부분은 학원 전문가들이지 건설 분야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실무는 미래건설에게 맡긴다고 해도 완전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시행착오가 계속됐고,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거의 매일같이 회의를 열어야만 했다.

참석자들은 회의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고 한탄했지만 짧게라도 모여 의견을 나누는 게 전화로 일일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라 어쩔 수 없었다.

“여주시에 교육 타운을 건설한다고 발표한 이후 지방에서 불만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또 무슨 불만이라는데요?”

김완태의 보고에 안우현이 퉁명하게 물었다. 김완태에게 나쁜 감정이 있어야 한 행동이 아니다. 요즘 와서 초이스 에듀에 딴지를 걸며 자꾸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언론에게 하는 말이었다.

교육 타운이 엉터리 계획이라고 난리, 엉터리가 아니라고 하자 사기라고 난리, 투자를 안 받기 때문에 사기가 아니라고 하자 혼자 독식한다고 난리.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부를 받았더니 기부를 받았다고 난리, 더는 기부를 안 받는다고 하니 기부를 안 받는다고 난리, 일정 금액 이상의 금액만 받는다고 하니 차별한다고 난리.

이렇듯 건우가 어떤 선택을 해도 무조건 까고 보는 언론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논리도 없고 맥락도 없는 주장이지만 메이저 언론사까지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우현은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학원 본점이 서울에 있는데 굳이 교육 타운까지 수도권에 지을 필요가 있느냐는 불만이 가장 많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부지까지 전부 확보한 마당에, 이제 와서 다른 지방으로 교육 타운을 옮기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자기들 지역에 교육 타운을 짓는다면 땅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빌려주겠다는 지방자치단체도 많이 있습니다.”

초이스 에듀의 본점과 분점 대부분은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작년부터는 지방에도 분점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교육 형평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초이스 에듀가 경기도 여주에 교육 타운을 만들겠다고 발표하자, 지방의 학부모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지 않습니까? 인터넷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대표님 강의를 들을 수 있는데 왜 불만이라는 거죠?”

안우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걸로 충분하면 분점도 없애고 교육 타운 건설도 취소하라고 합니다. 그런 게 전부 차별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허! 정말 너무하네. 분점을 운영해서 버는 돈으로 라이브 스트리밍을 무료로 서비스하는 건데 그걸 없애라는 게 말이 됩니까?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팀장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 학원의 공신력이 커졌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교육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사설 학원에게 평등한 교육을 요구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입니다.”

건우와 초이스 에듀 수뇌부가 최근 겪고 있는 가장 큰 딜레마였다.

초이스 에듀는 분명 사설 학원이다. 학원이 해야 할 몫은 어디까지나 학교의 보조에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주는 게 주된 일이다. 평등한 교육이니 어쩌니 하는 건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 요구해야지 학원에 요구하면 안 된다.

그런데 초이스 에듀는 놀라운 수능 적중률과 새로운 커리큘럼 개발로 학원이 가지는 보조적 위치를 넘어서버렸다. 이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거기에 건우의 바른 이미지까지 더해져, 대중들은 초이스 에듀를 더 이상 사설 학원으로 보지 않고 마치 교육부의 대체 기관인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마치 평등 교육이 초이스 에듀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대중들이 늘어나면서 이것저것 요구 사항이 생기기 시작했고, 불평 거리도 계속 늘어났다.

사설 학원이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무시하면 좋으련만, 지금 건우 입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 곧 교피아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직은 조용했지만 그게 평화로움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태풍이 오기 전 고요함처럼 긴장감이 느껴졌다.

언제 어디서 교피아와 적대 관계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그래서 인기 관리가 필요했다. 교피아는 여당과 정부를 등에 업고 있지만, 건우가 믿을 건 대중들의 지지밖에 없다.

계속해서 지금의 인기를 유지한다면 교피아도 마음껏 압력을 가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중들의 요구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굉장히 신중하다. 쉽게 독니를 드러내지는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부고발자였던 윤현희 교수 덕분에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들은 근 100여 년간 기득권을 유지해온 세력이다.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꽃길만 걸어온 게 아니다. 광복, 6·25, 이승만 하야, 쿠데타, 군사정권 수립, 12·12사태, 두 번째 군사정권 수립, 문민정부 수립, IMF 등 한국 현대사의 온갖 격변기에서도 살아남으며 바퀴벌레와도 같은 질긴 생명력을 보였다.

그런 곳과의 전쟁이 쉽게 될 리가 없다. 굉장히 길고 험난한 싸움이 될 것이다. 건우가 가려는 길의 대척점에 있지 않았다면 솔직히 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그렇다면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해야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

건우는 기다리다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 그들을 끌어내기로 마음먹었다.

장문오 시장 밀어주기가 바로 그것이다. 류명훈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장문오 시장과 교피아는 양립할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교피아는 원하지 않더라도 장 시장에게 교피아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여러 후보 중에 그를 선택했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자신의 이득 앞에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다고 해도 불구대천의 원수와 타협할 가능성은 낮다는 게 초이스 시큐리티의 판단이었다.

장 시장은 본격적으로 정치 일선에 나섰다. 초이스 시큐리티는 사활을 걸고 최선을 다해 그를 밀어주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지지율은 높아지고 있고, 그럴수록 교피아는 다급해진다.

오래지 않아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계속 참다가 장 시장이 대세로 굳어져 버리면 아무리 교피아라도 여론을 바꾸기 쉽지 않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곧 움직일 것이다. 아니, 이미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건우와 초이스 에듀를 비난하는 기사가 늘어나고 있는 걸 보면 교피아도 슬슬 반격 준비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교육 타운을 계획을 수정할 순 없으니, 방법은 지방에 분점을 늘리는 것밖에 없겠네요?”

안우현의 물음에 잠시 상념에 빠졌던 건우가 현실로 돌아왔다.

지방의 학부모가 진짜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지방 분점을 늘리는 것. 그들도 이미 확정된 교육 타운 계획이 수정될 거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거의 하지 않았다.

서울과 수도권 그리고 일부 지방 대도시 학생들만 누리고 있는 초이스 에듀 오프라인 교육을 자신들의 자식들도 받게 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말 쉽지 않은 문제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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