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알겠소. 충분히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번 일과 전혀 상관이 없으니 WTO에 제소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WTO에 제소한다고 해서 무조건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소 주체가 미국 정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게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앞장서서 마이크로소프트의 특허권을 침해한 건 증거가 너무나도 명명백백하다.
이제 와서 사실은 크레이듀가 자체 개발했으며 정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어려웠다.
아무리 와룡그룹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장인호 비서실장이라도 미국 정부가 이 정도까지 강하게 나온다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의리를 지킨답시고 괜한 오기를 부렸다간 모든 사태의 주범으로 몰려 덤터기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와룡그룹은 안타깝겠지만 같이 죽을 순 없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의리는 지켰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행이군요. 그럼 저는 비서실장이 미국 정부의 뜻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고 이만 전화를 끊겠습니다. 다음에는 좀 더 즐거운 일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군요. 어쨌든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아닙니다. 조만간 제가 한번 찾아가도록 하죠.”
전화를 끊는 장인호 비서실장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무슨 안 좋은 전화라도 받으셨습니까?”
잘하면 정치권에 진출할 수도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던 김영운 특허청장은 갑자기 식어버린 분위기에 안타까워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네. 김 청장이 알 필요 없는 일이네. 그럼 난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일어나보겠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크레이듀와 마이크로소프트의 특허권 분쟁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그냥 순리대로 두게.”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인지.”
“어허. 사람이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나. 그냥 순리대로 두라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법대로 해결되게 그냥 둬. 알겠나?”
“네. 아… 알겠습니다.”
“난 그만 가봄세. 바쁜 시간 뺏어서 미안하네.”
장인호 비서실장은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 갑자기 자리를 떠났다.
김영운 특허청장은 조금 전에 언급했던 정치권 진출은 어떻게 되는지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냉랭한 뒷모습에 주눅이 들어 그럴 수가 없었다.
***
초이스 시큐리티는 신생 정보보안 업체다.
일반적으로 정보보안(情報保安, Information Security)은 컴퓨터에서 다루는 정보의 수집, 가공, 저장, 검색, 송신, 수신 도중에 정보의 훼손, 변조, 유출 등을 방지하기 위한 관리적, 기술적 방법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보보안업체는 정보보안과 관련된 일을 하는 기업을 말한다.
그러나 초이스 시큐리티가 하는 일은 조금 다르다. 물론 정보보안 업무도 하긴 한다.
‘퓨처 앱의 원활한 운용을 위한 스마트폰 전용 백신 개발’이라는 꽤 그럴듯해 보이는 사업 목표도 세워놨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만든 하나의 포장일 뿐이다.
대외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진짜 업무는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의 정보보안이다.
쉽게 말해 사람들이 직접 발로 뛰며 정보를 수집하고, 정보를 교란하고, 정보 또는 정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보호하는 일을 한다.
이 설명도 어렵다면, 국정원 같은 정보기관을 사설로 운영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최종적인 진화 형태가 그렇다는 것이고 지금은 흥신소와 경호업체를 합쳐놓은 어설픈 사설 정보기관 느낌에 더 가깝다.
신생업체이기 때문에 아직은 미숙한 면이 있지만 회사 책임자인 차지훈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일단 초이스 시큐리티의 주축인 초이스 에듀 정보팀 역량이 굉장히 뛰어났다. 국가 정보기관에서 일할 때도 실력만큼은 최고로 꼽히던 그들이었다. 당시 그곳에서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던 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치질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또한, 새로 뽑은 직원들도 신입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해당 분야 베테랑들이 많았다. 지원자가 많아서 누굴 떨어뜨려야 할지 고민했어야 할 정도로.
지금은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처음 모여 적응 과정을 거치느라 어수선한 느낌을 연출하고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들 맡은 바 임무를 120% 수행해내리라 차지훈은 확신하고 있다.
입사 확정 이후 특기와 경력에 따라 팀을 나눴고, 손발을 맞춰볼 수 있는 가벼운 적응 기간을 거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대하던 진짜 임무가 시작되었다.
바로 출제 위원 명단 확보가 그것이었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기사를 통해 2017년도 수능시험문제 출제를 위해 선발한 600여 명의 출제·검토위원이 국내 모처 합숙소로 입소했다고 밝혔다.
이번 수능시험문제 출제를 위해 투입된 총인원은 900여 명이고, 출제·검토위원을 제외한 300여 명은 보안·의료·조리 등을 맡은 관리 인력이다.
작년보다 무려 300여 명이 늘어났다. 이유는 2015학년도와 2016학년도 수능에서 출제 오류가 불거졌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누가 봐도 초이스 에듀의 무서운 기세를 꺾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늘어난 300여 명 중 100명은 보안요원들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르는 문제 유출을 원천봉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었다.
하지만 초이스 시큐리티의 목표는 수능 문제를 몰래 빼내는 게 아니다. 타깃은 수능 문제가 아니라 수능 출제위원이었다.
단지 출제위원이 누군지 명단만 알아내면 되는 일이다. 입소 전에 출제위원을 알아내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배제했다. 그러기엔 인력도 부족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수능 출제·검토위원은 대부분 현직 교수나 교사 중에 선발된다. 그리고 수능 문제 출제를 위해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자리를 비워야 한다.
대한민국처럼 좁은 땅덩어리에서, 그것도 학기 중인 10월부터 한 달 넘게 자리를 비우는 현직 교수나 교사를 찾는 건 마음만 먹는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검토위원까지 포함하면 무려 600여 명이니 파악해야 하는 숫자가 제법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제 시작단계인 초이스 시큐리티라고 해도 그 정도 역량은 가지고 있었다.
“1차 명단이 들어왔습니다. 먼저 이철수 교수입니다. 국어 과목이고 한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입니다. 데이터베이스에 검색됩니까?”
초이스 시큐리티로부터 첫 번째 조사 명단이 도착하자 팀 앨버트로스의 수능 애널리스트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한 데이터베이스란 팀 앨버트로스에서 1년여간 준비하며 모아둔 대한민국 교수와 교사에 대한 기초 자료들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초이스 시큐리티의 도움으로 처음보다 굉장히 많이 보강되었다.
“한국대 국어국문학과 이철수 교수. 한 명 있습니다.”
“검색 결과 보고해주세요.”
“한국대를 학사 졸업했고 석사와 박사 과정 또한 한국대에서 거쳤습니다. 근현대 소설 전공이고 지금 대학에서 근현대 소설 위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박사과정은 한국대 명예교수인 박현승이 지도교수였습니다.”
“박현승 교수면 염상섭 전문가 아닙니까?”
데이터베이스 분석 내용을 듣던 이승훈이 물었다. 1차 명단은 국어 담당 출제·검토위원 위주라서 국어 강사인 이승훈도 당연히 참석했다.
완전히 삭발한 머리는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졌고, 부리부리한 눈썹과 함께 굉장히 남자답다는 평을 학생들에게서 듣고 있었다.
“맞습니다. 그리고 이철수 교수는 박현승 교수의 애제자로 불리던 사람입니다.”
“그럼 염상섭 작가의 소설이 이번 수능 지문으로 나올 확률이 굉장히 높겠군요.”
“염상섭 작가의 소설은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범위를 줄일 수 있습니까?”
“이철수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이 염상섭의 단편집 분석이었습니다.”
“단편집이면 만세전이나 삼대 같은 중·장편 소설은 제외하겠습니다.”
“단편 소설 중에 비중이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수능에 나오지 않은 게 뭐가 있습니까?”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두 파산이 비중이 높은데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이미 예전 수능에서 한 번 나왔습니다.”
효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만큼 대화도 굉장히 효율적으로 오고 갔다.
“그렇다면 두 파산에서 지문이 출제될 확률이 높겠군요? 올해 EBS 교재는 어떻습니까? 수능 출제위원장이 EBS와 연계율을 80% 이상으로 올리겠다고 약속했지 않습니까?”
“두 파산 지문이 예시문으로 아주 짧게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번 수능에서는 본 지문으로 나올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이번 출제위원 중에 이철수 교수 제자도 포함된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그걸 고려하면 두 파산이 출제될 확률은 50%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두 파산은 목록에 올렸습니다. 두 번째 출제위원입니다. 김한경 교수….”
팀 앨버트로스와 초이스 에듀 강사진들은 수능을 앞두고 거의 매일 이런 방식의 회의를 거치며 문제를 예측해나갔다.
보안이 굉장히 중요한 만큼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인원만 참석했고, 참석인원은 수능이 끝날 때까지 전원 합숙에 들어갔다. 모두 자원해서 합숙을 시작했고, 대신 수능이 끝나면 한 달간 휴가가 주어진다.
자체 합숙을 하며 예상 문제를 만들면 마지막 최종 검토는 건우가 한다. 아무리 건우의 개입으로 미래가 바뀌었다고 해도 그가 가진 미래 지식이 완전히 쓸모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팀 앨버트로스가 만든 예상 문제와 건우가 기억하는 미래 수능 문제를 교차 검증해 뺄 건 빼고 수정할 건 수정해서 최종적인 수능 예상 자료집이 완성된다.
***
[교육부와 초이스 에듀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2017학년도 수능시험이 이제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 대중들의 관심은 최건우 대표가 이번에도 앞선 두 번처럼 놀라운 수능 적중률을 보여줄 것인가에 쏠려 있다.
초이스 에듀는 올해도 역시 수능 대비 3주 특강반을 개설했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예전처럼 ‘수능 적중률 최소 XX% 보장’같은 자극적인 광고는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청자들이 몰려들어 수백 대 일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자랑했다.
예년처럼 적중률을 장담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최건우 대표가 보여줬던 놀라운 행보를 생각하면 이번에도 뭔가 있을 거라는 게 특강반을 신청한 학생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한편, 상당수 전문가들은 아무리 최건우 대표라도 올해는 예년과 달리 높은 수능 적중률을 기록하기 어려울 거라는 예측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어렵다고 말하는 가장 큰 근거로 전문가들은 올 수능시험에 임하는 교육부의 태도를 들었다.
그동안 초이스 에듀 때문에 온갖 망신을 당하고 심지어 EBS의 위상까지 퓨처 앱의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에 빼앗긴 교육부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칼을 갈고 나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교육부의 태도는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수능 출제위원들이 합숙에 들어간 것부터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특히 수능 출제·검토위원을 600여 명이나 선발했음을 강조했다. 이는 300여 명이었던 2년 전과 비교해 2배나 늘어난 수치이다. 보안요원도 작년보다 100여 명 늘어났다. 대대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교육부가 이번 수능 시험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지어, 물론 이건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지만, 교육부는 초이스 에듀가 개설한 특강반 수업 내용에도 굉장히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사실 수능 특강반 수강생이 적지 않은 만큼 수업 내용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막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유출된 수업 내용을 참고해 최대한 겹치지 않게 수능 문제를 출제할 거라는 이야긴데,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건 교육부가 초이스 에듀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덤비겠다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다.
조금 전에도 언급했지만, 방금 내용은 절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다.
하지만 놀라운 건 초이스 에듀의 행보다. 교육부가 옥죄든 말든 초이스 에듀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특강반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언뜻 교육부의 압력에 밀려 특강반에을 폐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초이스 에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학원 마케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수능 특강반을 개설했지만, 특강반은 최건우 대표의 교육관과 상반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돈이 없어도 교육은 공평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최 대표의 최종 목표인데 특강반은 소수를 위해 개설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초이스 에듀는 상업적 이익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사설 학원이다. 그런데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를 무료로 전환하고 초이스 에듀라는 이름을 알리는데 일등공신인 수능 특강반을 폐지한다는 게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기자의 의문에 대해 관계자는 이런 대답을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수능 특강반을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초이스 에듀의 모든 수업이 곧 수능 특강반이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폐지하는 겁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수업만 모두 제대로 이해하면 수능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후략…
- 동민일보 김영한 기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