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85화 (185/256)

제185화

“지금까지 고생해준 것처럼 앞으로도 여러분들의 땀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와룡그룹은 새로운 도약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러기 위해 저부터 앞장서겠습니다.”

열렬한 박수를 기대하고 한 말인데 반응이 이상했다.

웅성웅성.

이준규 주임의 갑작스러운 난입에 회의장은 소란스럽게 변했다. 모든 이의 시선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에게로 일제히 쏠렸다.

“안녕하십니까. 크레이듀의 나성천 대표님이시죠?”

“그, 그렇소이다만.”

엄청나게 떠들썩한 소란을 피우며 나타난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나성천 대표의 얼굴은 미칠 듯이 붉게 타올랐다.

이건 나성천 대표의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한준수 회장의 연설을 방해한 꼴이 된다.

오해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소란을 피운 장본인이 ‘나성천’이라는 세 글자 이름을 다른 사람들도 다 들을 수 있도록 꼭 찍어 말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마이크로소프트가 대표님을 특허권 등 지적 재산권 침해로 고소했습니다. 여기 고소장입니다. 또한 내일 오전 미국대사관을 통해 한국 정부에도 강력 항의할 예정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즐거운 회의 되시길 바랍니다.”

“아,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

고소장이 담긴 봉투를 전달한 이준규 주임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골드 드래곤 홀을 빠져나왔다.

뒤늦게 추가 경비원들까지 투입돼 추격전에 나섰지만 뒤꽁무니만 쫓을 뿐, 아무런 성과 없이 분위기만 더욱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나성천 대표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조금 전과 다른 시선이 쏟아졌다. 그를 탓하는 책망의 눈빛, 동정 어린 눈빛, 조소 어린 눈빛 등등.

그중에서도 나성천 대표를 가장 아프게 한 건, 이번 사장단 회의 축사를 그룹 총수로 오르기 위한 출사표의 삼으려고 했던 한윤수 회장의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섬뜩한 눈빛이었다.

***

특허청 본청 청장실.

대전광역시 서구의 둔산동 주변에는 정부대전청사를 비롯해 대전광역시청, 대전광역시 서구청, 대전고용 노동청, 대전지방 경찰청, 대전지방 검찰청, 대전고등법원, 특허법원까지 다양한 공공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최근 불거진 특허권 분쟁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특허청 본청 또한 정부대전청사 안에 있다.

“오랜만이네. 김 청장.”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비서실장님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보통의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면 차관급 고위직 인사인 특허청장이 이렇듯 극진하게 맞이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오늘 갑작스레 방문한 장인호 비서실장은 나이도 많고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강력한 막후 실세였다.

“하하하. 누추하다니. 나도 한때 이곳에서 몸담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친근한 곳이라네.”

“아! 그러셨지요. 예전에 청사에 계시면서 중소기업청장을 역임하셨던 사실을 제가 깜박했습니다.”

“잠깐 지냈으니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많진 않아. 그나저나 요즘 많이 정신없지?”

장인호 비서실장의 깜짝 방문에 의아해하던 김영운 특허청장은 그제야 그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를 깨달았다.

최근 불거진 특허권 분쟁 때문에 멀리 서울에서 이곳까지 은밀하게 방문했으리라.

“혹시 그 일 때문에 오신 거라면 서울로 호출하시거나 전화만 주셨어도….”

“아니지, 아니야. 내가 어떻게 공사다망한 김 청장을 오라 가라 하겠어.”

“아무리 바빠도 비서실장께서 부르시는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하하하. 그건 정말 고마운 말이군, 그래. 하지만 사안이 워낙 커서 은밀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어. 언론에서도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거든. 자칫 나와 청장의 만남이 언론에 흘러나가기라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스캔들이 될 수 있어. 그러니 대전청사에 일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방문하는 게 나아.”

“아! 역시 꼼꼼하십니다. 저는 그런 것까지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정치권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신경 안 써도 될 사소한 분야까지 신경 써야 해. 생각지도 못한 작은 문제로 낙마하는 경우가 무수히 많거든. 이번 일도 그래. 정말 별것 아닌 일인데, 최건우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사건을 너무 크게 키웠잖아.”

장인호 비서실장은 이번 특허권 분쟁이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건이 커져도 너무 커졌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상황을 몰고 갈 필요가 있었나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아직 애송이라서 그래. 게다가 애국심도 없어. 이래서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니까. 군대도 안 가고 편하게 사니까 나라 소중한 줄을 모르고 자기 잘난 줄만 안다니까. 어떻게 만든 프로그램인데 그걸 마이크로소프트에 팔 수가 있나? 이건 완전 국부 유출이나 마찬가지야.”

초이스 에듀가 특허권을 계속 가지고 있었으면 시비가 일었어도 힘으로 찍어누르면 그만이었지만 이제 그 권리가 마이크로소프트로 넘어간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장인춘 비서실장은 와룡그룹 계열사인 크레이듀가 초이스 에듀의 특허권을 침해한 사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특허권 분쟁으로 정부 입장이 곤란해진 게 귀찮고 짜증 날 뿐이었다.

“듣기로는 한국에서의 권리는 여전히 초이스 에듀가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그 부분에 착안해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 하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지금 라이브 스트리밍인가 뭔가 하는 것도 퓨처라는 앱을 통해 서비스되고 있는 거잖아. 권리를 완전히 팔아버리면 자기가 만든 프로그램을 역으로 돈 주고 써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니까. 그럼 마이크로소프트가 크레이듀에 그런 거액의 소송을 걸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

“그게 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정확하게 따지면 퓨처에 대한 특허권은 마이크로소프트가 가지고 있는 게 맞습니다. 초이스 에듀는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한국에서의 사용권리를 무료로 양도받은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복잡해. 그러니까 김 청장 자네 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퓨처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인가? 초이스 에듀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만 있고?”

정보팀을 통해 크레이듀가 퓨처의 짝퉁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건우는 이미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예견했었다. 그래서 절대 꼼수를 부릴 수 없게끔 대비를 단단히 해놓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흐음. 상황이 이런데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건가?”

“이게 좀 애매합니다. 냉정하게 따진다면 크리에이터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시장에서의 권리는 초이스 에듀가 가지고 있으니 실질적으로 지적 재산권을 침해받은 사람은 최건우 대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뭔가. 아까랑 같은 말 아닌가?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건가?”

“절대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비서실장님과 농담 따먹기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정확하게 누구의 권리를 침해했는지 법리적으로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충분히 논란의 여지가 있고, 언론플레이만 잘하면 최건우 대표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습니다.”

못마땅해 하던 장인호 비서실장은 그제야 김영운 특허청장의 말이 솔깃하게 들렸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게.”

“그동안 최건우 대표는 청렴하고, 건실하고, 도덕적이고, 착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앞장서는 그런 선량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말해 뭐하겠는가. 그것 때문에 우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 되었지 않은가? 자칫 국민들을 적으로 돌릴 수 있으니.”

“그런 이미지가 이번 소송에서 최건우 대표의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마이크로소프트가 크레이듀와 정부에 손해배상을 요구한 금액은 한화로 1조 원이 넘는 엄청난 거액입니다. 그런데 만약 소송을 건 주체가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니라 최건우 대표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돈독 오른 인간으로 보겠지. 우리나라 국민들 성향이 남 잘되는 꼴을 보면 배 아파하는 거잖아. 비행기 사고로 죽은 사람의 유가족이 항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면 당연한 권리라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을 상대로 장사한다고 비웃는 인간들이 태반인 곳이 이 나라잖아.”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한국 시장에 대한 권리는 초이스 에듀가 가지고 있으니, 마이크로소프트가 최건우 대표의 허락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소송을 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소송 전에 서로 최소한의 교감 정도는 나눴을 겁니다. 그러니 이번 소송의 실질적 주체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니라 초이스 에듀일 가능성이 높다고 언론에 뿌린다면 최건우 대표에게도 분명히 부담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최 대표도 소송을 계속 진행하기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오! 그거 묘수군, 묘수야. 부담이 되어 소송을 취하하거나 합의금을 대폭 줄인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이번 사건으로 인해 국민들의 신뢰가 추락한다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아. 그렇게 되면 최건우 그 녀석을 손봐줄 수 있으니까. 김 총장,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냈구먼. 이제 보니 정치감각도 썩 괜찮고, 특허청장으로 마무리하기에는 아까워 보여.”

“아이고 아닙니다. 저는 단지 비서실장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겸손한 척 말은 했지만, 김영운 특허청장의 얼굴은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장인호 비서실장에 선을 넣어 지금보다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은 욕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Rrrr

“이런, 왜 갑자기 전화가. 잠시만 기다리게, 웬만한 일 아니면 전화 연결하지 말라고 했는데. 으흠. 여보세요.”

특허청에서 면담 중이라는 걸 알고 있는 비서가 전화했다는 건 뭔가 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비서실장님. 지금 중요한 면담 중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급한 연락이 와서 전화드렸습니다.

“급한 연락? 누구에게 무슨 연락이 왔길래 그러나? 중요한 면담이라고 했을 텐데.”

- 그게, 마틴 나이트 미 대사가 지금 당장 통화를 하고 싶다고 요청을 해왔습니다.

“나이트 대사가? 무슨 일인지는 말하지 않고?”

- 네. 용건은 말하지 않고 급한 일이라며 당장 연결해달라고만 했습니다. 지금 통화대기 중입니다.

“뭐? 지금 기다리고 있다고? 이런, 내가 바로 전화 준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어서 연결해주게.”

주한 미국 대사가 전화기를 들고 자신과의 통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장인호 비서실장이 화들짝 놀라 전화 연결을 지시했다.

-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바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헬로우. 나이트 대사? 나 장인호입니다. 급하게 저를 찾으셨다고요?”

- 네. 백악관으로부터 청와대에 전하라는 급전이 와 있어서 말입니다.

“급전이요? 그렇게 급한 거면 청와대에 민정수석이 있는데 그리로 전달하지 않고요?”

- 비서실장께서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관련이 있어서 직접 연락을 드렸습니다.

“네? 지금 하고 있는 일이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

- 지금 특허청장과 면담하고 있는 일을 말하는 겁니다.

마틴 나이트 대사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장인호 비서실장은 뒷목이 쭈뼛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인즉슨 미국에서는 이미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파악하고 있으며,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와의 특허권 분쟁과 관련해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설마. 그 일 때문에 백악관이 나선 겁니까?”

- 설마라니요? 장 비서실장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한국 정부가 직접 나서서 마이크로소프트의 권리를 침해했으니 미국 정부가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나이트 대사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 진실이요? 대한민국 정부가 마이크로소프트의 특허권을 침해했다는 게 진실이지, 다른 진실이 있습니까? 지금 비서실장의 말은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아니 이보시오, 나이트 대사. 지금 내정 간섭을 하자는 겁니까?”

- 이거 갑자기 서운해지려고 합니다. 내정 간섭이요? 내정 간섭이 아니라 단지 경고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 특허권 문제에 손 떼지 않으면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세계무역기구)에 이번 일을 제소해서 국제적으로 불이익을 줄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것만큼 무시무시한 협박이 있을 수 있을까?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국가다. 그런데 만약 나이트 대사의 말이 현실이 된다면 한국의 수출업 전체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게 된다.

그건 국가 산업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귀찮고 사소한 특허권 분쟁이라고 쉽게 생각했던 장인호 비서실장은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나이트 대사. 이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 이유가 있습니까?”

마틴 나이트 대사가 강하게 나오자 장인호 비서실장은 한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봅니다. 저는 지금 협상을 하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비서실장이 계속 이번 일에 관여하면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맞게 대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너무나도 강경한 대답에 순간 장인호 비서실장의 말문이 막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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