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84화 (184/256)

제184화

와룡그룹 계열사 사장단 회의가 열리는 와룡호텔의 골드 드래곤 홀.

“오! 나 이사, 아니지 이젠 나 대표지. 오랜만이네, 나 대표.”

“대표라니요. 과분합니다. 조그마한 학원을 맡고 있을 뿐입니다. 그냥 예전처럼 이사라고 불러주십시오. 회장님.”

“그러면 쓰나. 엄연히 한 계열사의 대표인데. 듣자하니 이번 선거에서 나 대표도 꽤 큰 활약을 했다면서?”

“큰 활약은 아닙니다. 회장님이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여당이 지금과 같은 결과를 냈겠습니까? 저는 그저 회장님이 하시는 일에 숟가락을 하나 얹었을 뿐입니다.”

“하하하. 사람 참 겸손하기는. 교육 상임위원장인 조우철 의원이 자네 이름을 직접 언급했어. 그 양반이 그럴 정도면 꽤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와룡그룹 이인자인 와룡자동차 한준수 회장이 나성천 대표를 보고 먼저 아는 척을 했다. 한 회장은 그냥 오랜만에 보는 부하 직원에게 덕담을 건네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수 있지만, 나 대표나 다른 계열사 사장들의 입장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지금은 미끄러져 와룡그룹의 계열사라고 하기도 민망한 크레이듀라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한때는 와룡그룹의 직계 가족을 제외하고 그룹 내 서열 5위까지 올랐던 전력이 있는 나성천 대표다.

아무리 학원을 운영한다고 해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룹 이인자의 칭찬까지 받았으니, 이번 계열사 사장단 회의가 끝나면 다시 본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겸손한 척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성천 대표의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고, 다른 사장들은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한준수 회장의 덕담이 끝나자 평소 친분이 사장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 대표님. 이번에 정부와 천억 원이 넘는 계약을 맺으셨다면서요. 역시 나 대표님이십니다.”

“제조업체도 아니고, 어떻게 학원이 정부와 천억 원이 넘는 공급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나 대표님의 크레이듀 행을 두고 그룹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거라고 말하는 사람을 봤는데 그게 다 헛소리였군요. 이제 보니 전략적으로 자리를 옮기신 거였습니다. 하하하.”

“공급 계약만 한 게 아니라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이기는 데 적절한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조만간 본사로 승전한다는 소식만 기다리면 되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그렇고말고요.”

“역시 나 대표님입니다. 저는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술은 나 대표가 사는 겁니까?”

“나 대표님, 본사에 가시면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나성천 대표 주변에 몰린 사람들은 그가 이미 본사에 다시 발령이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표정 관리를 잘하기로 소문난 나성천 대표도 오늘만큼은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높은 천장에 달린 아름다운 샹들리에는 연회장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고, 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된 테이블 사이사이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회의라고는 하나 와룡그룹 계열사 사장들끼리 모여 즐겁게 먹고 마시며 서로 친목을 다지는 시간에 가깝다.

하지만 즐겁게 먹고 마시는 분위기는 어디까지나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실상은 권력자에게 줄을 서고, 서로 뭉치거나 헐뜯으면서 어떻게든 권력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이전투구의 현장이다.

상대가 잘나가면 금방 고개를 숙이며 찬양을 하다가도 조금이라도 약점이 보이면 웃으며 상대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날 가장 이슈가 된 사람은, 크레이듀라는 와룡그룹의 다른 계열사와 규모 면에서는 비교하기도 어려울 만큼 초라한 곳의 책임자인 나성천 대표였다.

정부를 상대로 천억 원이 넘는 매출고를 올린 것은, 사실 금액만 따진다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천억이라는 돈은 1년에 수조 원의 매출을 기록 중인 와룡자동차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그리고 여당에 도움이 되었다고 해도 말 그대로 도움을 조금 준 것일 뿐 선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장단 회의에서 신데렐라처럼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한준수 회장의 칭찬 한마디 덕분이었다.

“얼씨구. 좋아 죽네. 저 자식 저거 입이 귀에 걸린 거 맞지?”

“그러게요. 과장님. 나 대표가 저렇게 좋아하는 거 처음 봅니다.”

고자성 과장과 이준규 주임이 골드 드래곤 홀 입구에서 나성천 대표의 모습을 지켜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당연히 웃음이 나오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와룡자동차 한준수 회장이 직접 격려를 한 거잖아. 강력한 차기 총수 후보라고. 아무리 무뚝뚝한 인간이라도 이 정도 상황이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을 거야.”

“저렇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꼴 보기 싫은데요. 지금 확 고춧가루를 뿌려버릴까요?”

고자성 과장은 이준규 주임의 물음에 아직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에이. 사람이 진득하지 못하고 왜 그렇게 급해. 지금 가도 그럭저럭 효과는 얻을 수 있겠지만, 조금 이따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될 때 가면 더 주목받을 수 있잖아. 고춧가루는 그럴 때 뿌려야 제맛이지, 안 그래?”

“흐흐흐. 과장님은 역시 사악하세요. 제가 이래서 과장님을 좋아한다니까요.”

“참아줄래? 남자가 나 좋아해 주는 거 사양이거든.”

“아, 진짜! 그딴 유치한 개그를 하니까 아저씨 소리를 듣는 겁니다. 아재 개그 좀 참아주세요.”

두 사람은 나성천 대표에게 빅엿(?)을 먹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선거는 끝났으니 이제 껄끄러울 일도 없었다.

누가 선거에서 승리하든 그건 건우나 초이스 에듀에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괜히 서두르다가 선거에 개입했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서 참고 있었을 뿐이며, 이제 선거는 끝났다.

모든 조사를 마쳤는지 얼마 전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피해 추산액을 무려 10억 달러로 산정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1조 원을 넘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냉정하게 따져 실제 피해액은 그 돈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데이비드 하워드 부사장은 상당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 정부가 크리에이터 앱 개발에 참여했다고 선거에 이용한 것이 피해액 추정에 큰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고 했다.

실상은 크레이듀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앱이지만 대외적으론 교육부와 공동 개발한 것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로서는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도 소송을 걸 수 있게 된 것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만든 쇼일 뿐이지만 언론을 불러놓고 발표를 한 바람에 이제 와서 사실이 아니라고 둘러댈 수도 없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정부가 앞장서서 마이크로소프트의 특허권을 침해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만 해도 국제적 망신이 된다.

단순히 헤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일이 커지면 국가 신뢰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상황.

교육부나 크레이듀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나 마찬가지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위기에 처했다.

물론 아직 자신들이 그런 위기 처했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지만.

“아! 아! 잠시 후 제37회 와룡그룹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착석하지 않으신 분들은 사전에 공지한 대로 지정된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지금 곧 사장된 회의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아직 참석하지 않은 귀빈 여러분들은 조속히 자리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와룡그룹 사장단 회의가 시작되었다. 골드 드래곤 홀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안내방송이 나오자 재빨리 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그럼 지금부터 제37회 와룡그룹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와룡자동차 한준수 회장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한준수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향했다. 와룡그룹을 이끄는 거물답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선보였다.

한준수라는 이름이 호명되자 회의에 참석한 계열사 사장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한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후와. 이건 거의 조선로동당 전당대회 분위기인데요. 누가 보면 김일성이 현신한 줄 알겠어요.”

“여기 모인 권력바라기들에게 한준수 회장은 김일성 이상의 존재일걸? 소문에 의하면 형인 한윤수 그룹 회장이 몸이 안 좋대. 그래서 조만간 지금 자리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그룹 총수를 뽑는다고 하더군. 한준수 회장이 가장 유력한 후보이니 다들 잘 보여야지 않겠어?”

“한윤수 회장 아들은 어쩌고요?”

“한윤수 회장이 밀어주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은가 봐. 경험이 부족하니까. 게다가 한준수 회장의 포스가 워낙 강력하잖아. 그래서 그런지 수양대군의 고사를 예로 들며 한윤수 일가의 몰락을 예상하는 사람도 많아.”

“오! 그러고 보니 수양대군과 한준수 회장이 은근히 닮은꼴이긴 하네요. 엄청난 야심가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고요. 오죽하면 전대 회장이 ‘저 녀석은 자기 야심 때문에 그룹을 말아먹을 놈이야’라고 했다잖아요. 그런데 사람 잘 보기로 유명했던 전대 회장도 자기 아들에 대한 평가는 틀린 것 같아요. 흔들리던 와룡자동차를 세계적인 자동차회사로 우뚝 세워놨으니까요.”

한때는 와룡자동차의 적자가 너무 심해 와룡그룹 전체가 흔들린 적도 있었다. 한준수 회장은 그런 열악한 회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내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건 모를 일이지. 하나를 집중해서 키우는 것과 여러 회사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니까. 한준수 회장이 카리스마는 넘치지만 친화력이나 융화력은 부족해. 그런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쟁 관계에 있는 동지그룹 고현호 전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잖아.”

대한민국 경제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고대성 회장은 이제 일선에서 거의 물러났고, 지금은 셋째 아들인 고현호 전무가 동지그룹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재계서열 5위 자리에 정체되어 있던 동지그룹은 고현호 전무가 사실상의 동지그룹 총수가 된 이후 잊고 있었던 성장원동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얼마 전 기필코 와룡그룹을 누르고 재계서열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고 전무가 가장 신뢰한다는 김학수 상무나 마동수 이사는 개성이 정말 강해서 부하 직원으로 데리고 있기 정말 까다롭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고 전무가 예전 인터뷰에서 그랬어. 자기는 그냥 두 사람이 마음껏 활개를 펼칠 수 있도록 밀어주고 믿어준 것밖에 없다고. 어떻게 보면 한 고조인 유방과 비슷한 스타일이라 할 수 있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동지그룹과 와룡그룹의 대결이 더욱 기대되는데요? 꼭 초한지 같잖아요.”

두 사람이 수다를 떨고 있는 사이 한준수 회장이 단상에 올랐다. 그는 조금은 거만한 표정으로 아래를 훑었다.

이곳에 참석한 계열사의 모든 사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꽤 흐뭇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이크를 향해 한발 다가섰다.

“대 와룡그룹 계열사 사장단 여러분. 한준수이올시다.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이렇듯 열렬하게 환대해줘서 고맙습니다. 올 전반기에도 우리 와룡그룹을 위해 불철주야 애써주신 여러분들에게 그룹 회장님을 대신해 감사인사 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는 그동안 고생하신….”

한준수 회장의 축사가 시작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자성 과장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변했다.

“준규야. 지금이다. 쇼타임 시작.”

“오! 기다렸습니다. 과장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겠습니다. 하하하.”

이준규 주임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빨리 골드 드래곤 홀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는 네 명의 경비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초대장을 보여주십시오.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초대장은 없어. 그렇지만 난 들어가야 하거든.”

“죄송합니다.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냥 억지로 들어가는 수밖에.”

특공대나 운동선수 출신의 건장한 경비원이 네 명이나 입구를 지키고 있었지만, 이준규 주임의 얼굴은 긴장감 없이 평온했다. 오히려 그들을 비웃듯 여유를 부리며 뒷짐을 지고 있었다.

“장난은 곤란합니다. 어디 하나 부러지기 전에 가던 길 가시기 바랍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말입니다.”

가장 경험이 많았던 선임 경비원은 눈앞에서 깐죽거리며 웃고 있는 남자의 여유가 거슬렸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반발심이 생겨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오호. 감이 좋은 친구네. 마음에 드는걸. 어때, 이딴 곳은 그만두고 내 밑에서 일해보는 건?”

“관심 없습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면 입구에서 비켜서 주십시오.”

“관심이 없어도 관심이 생길 거야. 여기 뚫리면 밥줄 끊길 거잖아? 그러니 생각 있으면 초이스 시큐리티로 찾아오라고. 올 때 옆에 있는 찌끄레기들은 데려오지 말고. 그럼 실례.”

이준규 주임은 속삭이듯 말을 끝내고 곧장 입구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뭐해. 막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경비원들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이준규 주임은 산책하듯 여유로운 발걸음만으로 그들의 저지를 뚫어버렸다.

많은 움직임이 필요 없는 간결한 스텝이었지만 네 사람을 순식간에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가볍게 입구를 뚫어낸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나성천 대표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나성천 대표가 당황한 얼굴로 이준규 주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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