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모두의 시선이 건우가 아닌 그 옆에 건우 손을 잡고 서 있는 초등학생 소녀에게로 향했다.
너무나도 귀엽고 예쁜 소녀였다. 살이 빠지며 예뻐졌다고 칭찬이 자자했던 은우조차 평범해 보일 정도로.
“어! 오빠 옆에 언니는 누구야?”
건우가 공부방에 들어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챈 은우가 헤드폰을 벗자마자 물었다.
“설마 띠리리리~. 숨겨 왔던 나의 수줍은….”
“뭐라는 거야, 저 바보 오빠는?”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는 동우를 은우가 타박했다.
“뭐라고 하는 거긴? 너의 시대가 끝났다는 의미의 노래지.”“헐, 뭐래. 바보 오빠, 오늘 공부가 잘 안 돼?”
“바보는 내가 아니라 너지. 넌 드라마도 안 봐? 딱 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잖아. 그동안 숨겨왔던 형의 딸이 나타난 느낌? 그럼 어떻게 되겠어? 너는 형의 동생, 쟤는 형의 딸. 자고로 사람은 형제보다 자식을 더 아끼기 마련이야. 형의 사랑이 너에게서 저 아이에게로 옮겨가는 건 당연한 거라고나 할까? 그리고 생긴 것만 봐도 쟤가 너보다 더 예쁘잖아. 흐흐흐.”
“이익! 큰오빠, 작은오빠 말이 사실이야? 저 언니가 오빠 딸이야? 나보다 저 언니가 더 예뻐?”
동우의 장난스러운 도발에 넘어간 은우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그렁그렁하게 변했다. 아무리 어른인 척해도 은우는 아직 애였다.
“네가 은우야? 사진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예쁘네.”
그때 울먹이는 은우를 달래기 위해 건우보다 소녀가 먼저 나섰다. 은우는 예쁘다는 소녀의 칭찬에 경계심을 살짝 풀었다.
“응. 내가 은우 맞아. 언니가 우리 오빠 딸이야?”
“아니. 우리 아빠는 최건우 선생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마흔 살이 넘어. 그러니까 최건우 선생님이 우리 아빠가 될 수 없어.”
“정말?”
“당연하지. 은우는 지금 엄마가 될 수 있어?”
“아니. 전에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 나는 아직 너무 어려서 엄마가 될 수 없다고.”
“거봐. 선생님이 우리 아빠가 되려면 은우 나이에 나를 낳아야 하는데 가능할까?”
“안 가능할 것 같아.”
“그래 맞아.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나는 우리 아빠 딸이거든.”
은우가 이해하기 딱 좋은 설명이었다.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은우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은우도 그녀의 행동이 싫지 않은지 웃으며 가만히 안겨 있었다.
“히히. 다행이다.”
“그런데 은우야. 방금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한 사람이… 역시 동우 오빠겠지?”
“응! 맞아. 언니도 아는구나, 동우 오빠가 바보라는 거.”
“응, 나도 딱 보니까 알겠더라.”
속삭이며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헐. 얘가 뭐라는 거야? 이봐, 처음 보는 초딩. 네가 날 잘 모르나 본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최동우. 이제 그만해.”
소녀의 말에 발끈한 동우가 한마디 하려는데 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섰다.
“아, 형. 형도 쟤가 하는 소리 들었잖아? 나보고….”
“바보라는 거?”
“그래 바로 그거!”
“솔직히 바보 맞잖아. 소희가 대체 몇 살인데 내 딸이라는 거야?”
“아니, 그건 그냥 장난으로….”
“은우한테 그런 장난을 쳐도 바보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도 바보야. 그리고 초등학생이 한 농담에 발끈해도 바보야. 그러니까 그만해.”
“에이! 진짜, 형은….”
건우의 단호한 정리에 은우가 동우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소희는 잠깐 이리로 와볼래?”
건우의 부름에 소희라고 불린 소녀가 동우, 정우, 은우 앞에 섰다.
“다들 인사해. 너희도 알지? 우리가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을 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장만복 회장님. 소희는 장만복 회장님의 손녀야. 그래서 성은 장 씨. 장소희야. 소희도 인사해. 바보같이 키 큰 녀석이 동우, 저기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는 재미없는 녀석이 정우. 그리고 은우는 방금 인사했지? 우리 집 귀염둥이 막내야.”
“안녕하세요, 오빠님들. 그리고 안녕 은우야. 저도 오늘부터 이곳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얼마 전 여주에서 장만복 회장과 건우가 약속한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장만복 회장의 손녀와 정우를 자연스럽게 이어줘 보자’라는 약속.
그동안 건우가 바빠서 잠시 미뤄두고 있다가 오늘 처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소희는 장만복 회장의 장담처럼 건우의 마음에 쏙 드는 똘망똘망한 아이였다.
“우리랑 같이 여기서 공부한다고? 아니 왜? 지금까지 그런 적은 없었잖아? 장만복 회장님은 핑계고 설마 진짜 형의?”
“야, 최동우. 너 정말 여기서 쫓겨나갈래?”
“아니, 당연히 농담이지. 하하하. 초딩 소녀, 만나서 반가워. 한 가지만 명심하면 돼. 나는 절대 바보가 아니야. 그럼 잘 지내보자고.”
“네. 동우 오빠.”
“그리고 말이야….”
“소희라고? 나이는 몇 살이야?”
동우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더 하려는데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정우가 말을 끊고 나섰다.
“안녕하세요. 정우 오빠. 저는 13살, 초등학교 6학년이에요.”
“그렇구나. 반가워.”
“네, 저도 반가워요.”
“그럼 너도 오늘부터 여기서 공부하는 거야?”
“네. 할아버지께서 그러라고 하셨어요.”
“너는 어떤데?”
“네?”
“네 생각을 물은 거야. 너는 여기 오는 거 괜찮아? 놀고 싶은 데 억지로 온 거 아니야?”
이곳에 와서 계속 생글생글 미소를 띠던 소희가 처음으로 웃는 걸 멈췄다. 그리고 정우를 바라보며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괜찮아요.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여긴 오빠가 두 명이나 있고, 예쁜 동생도 있잖아요.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거든요.”
“다행이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 나는 최정우고, 중3이야. 공부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네. 감사해요, 정우 오빠. 헤헤.”
의외였다. 지금까지 가족과 학교 친구들을 제외하고 오늘처럼 정우가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고 도와주겠다고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낯선 정우의 행동에 건우의 눈이 반짝였다.
***
“어디 보자. 인친님들이 새로운 글 좀 올렸나?”
얼마 전부터 인스타키로그램에 빠진 수용이는 아르바이트할 때도 종종 스마트폰을 열어 새로운 글이 올라왔는지 확인한다.
KGT대리점.JPG
♥X134
jjjiccu #첫줄안녕
#KGT대리점방문인증샷
#남들이다하길래나도올려봄
#번호이동#퓨처팩#일상#데일리
#사진스타그램#일상스타그램
#최건우#초이스에듀#흥해라
#다들예쁘고잘생김#나만오징어ㅠ
aifjo2 ㅋㅋㅋㅋㅋ 너도 KGT 인증샷 대열에 서는구나.
giqhoi_love 헐. 뭐가 오징어야? 네가 제일 예쁘잖아.
jjjiccu @aifjo2 응 나도 한번 따라 해봤어. @giqhoi_love 우왕. 고마워 ㅋㅋㅋㅋㅋㅋ
jong_car 소통해요. 잘 보고 갑니다.
I_sunggg 좋아요 누르고 갑니다. 제 계정에도 놀러 오세요.
_cjoupteng 선팔해주시면 맞팔 갑니다.
KGT수유대리점.JPG
♥X5
dkqjwld 오늘 우리 가족 전부 KGT로 넘어갔습니다. 아들이 꼭 퓨처팩 요금제가 필요하다고 해서 이왕 옮기는 거 다 같이 바꿔버렸습니다. 나 마누라 큰딸 셋이 같이 바꿔서 퓨처팩 공짜^^
#KGT인증샷나도동참
#아들아시험성적떨어지면죽음이다
“크크크크크. 어쩔. 성적 떨어지면 죽음이래. 요즘 들어 KGT 인증샷 올리는 게 유행은 유행인가 보네, 올라오는 사진들이 대부분 이런 것들인 걸 보면. 이러다 나만 뒤떨어지는 거 아니야? 에이, 진짜 아직 약정이 몇 달 남았는데 위약금 물고 나도 KGT로 옮겨야 하나.”
요즘 수용이 고민 중 하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통신사를 옮기고 싶지만, 위약금이 무서워서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위약금을 무느니 차라리 약정 기간이 끝날 때까지 폰을 두 개 유지하는 게 더 싸게 먹힐 정도다.
Rrrr
“와이?”
친구인 정구에게 전화가 왔다.
- 알바는 끝났냐?
“아니. 아직 한 시간 더 남았어.”
- 그래? 그럼 이따 다시 전화할까?
“됐어. 어차피 손님도 없어. 무슨 일인데?”
오늘따라 수용이가 일하는 편의점이 굉장히 한산했다.
- 그냥 심심해서.
“심심하면 공부나 해. 이번에 크리에이터팩인가 뭔가로 요금제 바꿨다며? 그럼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 아는 인친님은 아들 때문에 전 가족이 KGT로 넘어갔다더라.”
- 젠장! 나도 약정이고 나발이고 간에 KGT로 가야 했어. 완전 똥망이야.
C-Mobile 통신사를 이용하고 있던 정구는 아직 약정이 남아 KGT로 옮기지 못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크리에이터팩이라는 요금제에 가입했었다.
“왜 인마? 초이스 에듀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크레이듀 정도면 들을만하지 않아?”
- 들을만한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그게 무슨 말이야?”
- 크리에이터 그 X같은 게 아예 먹통이야. 인강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어.
“설마? 네 스맛폰이 맛이 가서 그런 거 아니야? 네 거 좀 구리잖아.”
- 나도 처음엔 그런가 했는데 그냥 크리에이터가 구린 거야. 퓨처는 존나 잘 돌아가거든. 풀HD 영상을 보는 것처럼 빵빵하게.
“통신사 문제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정부에서 인증한 애플리케이션이잖아. 교육부가 개당 3만 원이나 주고 사서 우리한테 나눠준 건데 그게 문제가 있으면 어떡해?”
- 내 말이 그거야. 와이파이로 돌리든 LTE로 돌리든 둘 다 안 돼. X발 이래놓고 무제한이라고 2만 원이나 받아 처먹는 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그럼 환불해달라고 해.”
- 내가 그걸 안 해봤겠냐? 크리에이터가 안 되는 게 자기들 잘못이 아니라서 환불이 안 된대. 무제한 요금제라서 무조건 한 달은 써야 한다나?
“지랄.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환불은 안 된다고 해도, 지금까지 쓴 요금만 정산해서 해지할 수 있게는 해줘야지.”
너무나도 황당한 말에 수용이까지 덩달아 화를 냈다.
- 그러니까 말이다. 내가 정말 X같아서, 다시는 C-Mobile 안 쓴다. 크리에이터인지 뭔지도 당장 지울 거야.
“야. 너무 화내지 말고 일단 기다려 봐. 너 내가 요즘 인스타키로그램 하는 거 알지? 내 팔로우가 삼천 명이 넘거든.”
- 미친. 이 와중에 네 인스타 자랑이냐?
“설마 그러겠냐? 네 이야기를 인스타에 남긴다는 거지. 그거 올리면 우리 인친님들이 알아서 퍼 날라 줄 거야.”
- 그래? 그럼 보상 좀 받을 수 있으려나?
“당연하지. 이번 주에 당장 보상 받을 수 있도록 해줄 테니까 일단 진정하고 전화 끊어 봐봐. 이따가 내가 게시물 하나 올리면 좋아요 누르는 거 잊지 말고.”
- 그래. 알았어. 이따 다시 전화할게.
“그래.”
전화를 끊은 수용이는 스마트폰 카메라 앱을 열었다. 그리고 셀카 모드로 바꾼 후 당장 눈물을 흘릴 것처럼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짓더니, 그 모습을 여러 장 찍었다.
나쁜C-Mobile.JPG
#첫줄안녕
#안녕하세요인친님들
#오늘매우슬픈일이있어요.
#친구가크리에이터팩을사용중인데
…
◇ 사람 태그하기 Jung999999
◇ 위치추가 : 녹번역 GG편의점
***
치열했던 선거가 끝났다. 많은 사람들이 여론조사와 다른 드라마틱한 반전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그 어떤 반전도 허용하지 않은 채 무난하게 막을 내렸다.
마지막 여론조사가 예상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력 후보자들이 전원 당선된 것이다. 이렇게까지 반전 없는 선거는 여론조사가 시작된 이래로 처음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여당이 계속해서 다수당의 위치를 지켜냈지만 그걸 가지고 야당이 패배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여당은 막판에 불어닥친 강력한 역풍을 이겨내고 자신들이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던 의석수를 지켰고, 세 야당은 초반 엄청나게 불리했던 약세를 극복해내고 여당의 과반수 획득을 저지했다.
어느 당도 권력을 독점하긴 어려운 상황. 네 개의 당이 그야말로 절묘하게 균형을 이뤄냈다.
그래서 정치전문가들은 이번만큼 재미없는 선거는 없었지만, 이번만큼 재미있는 선거도 없었다고 평했다.
항상 그렇듯 이번 선거에서도 역시 이권이 많이 오갔다. 여러 대기업과 이권 단체들이 개입했지만 그들 모두가 승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와룡그룹은 이번 선거의 최대 수혜자 중 한 곳이었다. 막판 위기에 몰린 여당에 큰 힘을 실어주며 많은 반대급부를 약속받은 덕분이었다.
초이스 에듀와 손을 잡은 동지그룹에 잠시 2위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여당이 약속한 반대급부를 받아내게 되면 동지그룹을 멀찍이 밀어내고 2위 자리를 확고하게 굳힐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예상대로 선거는 끝났고, 와룡그룹은 지금 축제 분위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